< 제 59화. 홍위의 세책례와 궁중 연회 (3) / 윤서와 평창 군주와의 만남 추가 >
윤서가 월대에서 내려오는데 이향의 후궁들이 보자는 전언이 왔다.
“제가 아직 일정이 있습니다. 다 마치고 뵈러 가겠습니다.”
윤서는 그리 말하고 평창 군주의 거처로 먼저 향했다.
군주는 어린아이답지 않은 수 싸움을 하고 지쳐서 삽살 강아지 몽몽이를 끌어안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이 나이 대의 아이들이 벌써 눈치가 빤해지고 철이 들면 안 된다.
그건 다 주변의 어른들이 아이에게 불안을 심어주며 빨리 어른이 되라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서는 진심으로 군주에게 미안했다.
“군주 자가, 제가 앞으로 더 잘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하고 송구해요.”
“무얼?”
군주의 새카만 눈동자가 윤서를 향해 지금까지와 다른, 한 가닥 따스함을 담고 반짝거렸다.
“자가께서 급박한 마음에 저를 위해 뺨까지 치시도록 일을 만들어 제가 송구합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으셨을 행위를 군주께서 무리하게 하시게 된 건, 어른인 제가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입니다. 그래서 송구하고, 그 사실을 잘 아시면서 무리해주신 자가께 깊게 감사드립니다.”
“······.”
윤서의 사과에 평창 군주는 무거웠던 마음 한쪽이 가벼워졌다.
정말이지 홍위가 아니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그걸 권가가 알아주다니, 정말로 늘 세심하게 다른 후궁들에게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살펴주신 어머니 같았다.
“···알면, 앞으로는 제대로 해.”
“예, 자가.”
“···몽몽이 고마워. 그리고 홍위 잘 돌봐주는 것도.”
“제가 아기씨를 사랑해요.”
“칫. 아까 아바마마도 연모한다더니, 권가 너는 왜 그리 솔직하게 말을 하느냐?”
“그게 제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니까요. 원손 아기씨를 사랑하고, 세자 저하를 연모하는 것, 그리고 이제 군주님도 사랑하게 된 것.”
“!”
“사랑이 가장 힘이 세답니다, 자가. 사랑은 모든 걸 이기게 하는 힘이에요.”
자가의 어머니께서 저의 영혼을 이리 보내 우리 홍위를 지키게 할 만큼이요.
윤서는 평창 군주와 비로소 마음 한자락을 공유하고 정 승휘의 상궁이 기다리고 있을 동궁으로 향했다.
******
“전하, 다시 한번 경하드리옵니다.”
사정전 앞뜰의 연회장, 악공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던 무희들도 물러가고 다들 불콰하게 술이 들어간 모습이었다.
공식 연회 절차가 끝나자 차례로 축하 인사를 올렸던 신하들도 각자 뜻이 맞는 이들끼리 더 가까이 머리를 대고 담소를 나누게 되고, 가장 상석의 연단에는 세종과 효령 대군만 나란히 앉아 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영의정 황희가 끙끙대며 계단을 올라 세종 곁에 다가섰다.
“전하의 성덕이 우리 세자 저하를 거쳐 저리 영특하신 원손 아기씨까지 굳건하게 이어질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이 노신은 이제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하! 오늘 죽기는. 경은 십 년도 더 넘게 너끈히 살며 우리 원손이 관례를 치르는 것도 볼 것이오.”
“허어, 우리 전하는 참, 매정도 하시지. 영상 대감, 여기 앉으시오.”
팔십이 넘은 신하가 불쌍해진 효령 대군이 얼른 황희에게 의자를 권했다.
세 사람은 나란히 앉아 내관이 따라주는 술을 한 잔씩 받은 후 그대로 내려놓고 뜰의 무리를 내려다보았다.
세자는 집현전의 성삼문 박팽년, 그리고 젊은 축에 속하는 정인지 등과 너털 웃음을 나누며 축하주를 받은 후, 바로 옆에서 열띠게 토론 중인 김종서와 박종우, 최부, 황보인, 안숭선, 한확 등 대신들과 함께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또 서쪽 편으로는 대군과 왕자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안평 대군과 광평 대군, 금성 대군과 귀인 양씨의 소생 한남군 등은 종이를 펴고 서로 번갈아 붓을 들어 글을 쓰며 박장대소 하는 것이 차운을 빌려 시를 짓는 모양이고,
다른 한 무리는 수양 대군을 필두로 임영 대군 등이 신빈의 소생 계양군 등과 더불어 호탕하게 웃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원손 홍위는 뜰 저편에 아이들 용으로 따로 마련된 차일 아래 열 살의 삼촌 영응 대군과 그 아래 수양 대군의 아들 도원군, 신빈 소생의 담양군, 정의 공주의 소생 여달 등과 함께 윷놀이를 하였다.
마침 두 손을 모아 윷가락을 높이 들었다가 “끼야앗” 괴성을 지르며 멍석 위로 던지는 홍위의 모습이 마침 월대 위 세 사람의 눈에 잡혔다.
“허허, 가장 어리신데 기세는 가장 윗질입니다.”
효령 대군이 대견하다는 듯 웃고는 “하아, 다행이에요. 다행입니다, 참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저리 각자 세가 나뉘어 있지만 세자가 저리 강건하고 어린 원손이 영특하여 사직에 근심이 없을 것이란 안도였다.
세종이 문득 황희에게 말했다.
“우리 세자에게도 경과 같은 신하가 있어야 할 터인데.”
“저하의 성품이 전하와 같이 인자하면서도 단호하시니 곧 적재적소에 젊은 인재를 쓰며 키워나가는 법에도 능숙해지실 것이옵니다. 그리고 전보다······.”
말을 이어가던 황희는 말끝을 흐렸다. 전하의 바로 뒤를 잇는 지존에 대한 사사로운 평가란 자각이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다.
“전보다 뭐? 경이 내게 못 할 말이 무에 있다고.”
“전보다 여유가 있어 지셨습니다. 전에는 지나치게 삼가셔서 이 노신이 보기에 안타까웠는데 이제는 농도 하시며 크게 웃으시고, 기세가 강하면서도 평안해지셨습니다.”
“그게 다,”
“제 여인이 생겨서”라는 말을 하려다 세종은 꿀꺽 삼켰다. 평소 지나치게 여색을 즐긴다는 평을 받아온 군주로서 말하기가 껄끄러운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대취하며 조금씩 흐트러졌을 때 이향이 월대 위 세종께 왔다.
황희 정승은 아까 벌써 취하여 집으로 부축을 받아 돌아갔고, 효령 대군도 막 돌아가셔서 홀로 앉아 계신 탓이었다.
“아바마마, 이제, 돌아가시겠습니까? 소자가, 모시겠습니다.”
“많이 마셨구나. 잠시 앉거라. 자치는 우리 세자에게 술 깨는 탕약을 가져다 올리거라.”
세종께서 이향의 뒤에 시립한 엄자치에게 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대전 내관 조창의도 멀찍이 물러나라 명했다.
“하실 말씀이, 계시옵니까?”
“어떠냐? 여기서 내려다보는 연회장의 모습이.”
이향은 몇몇이 빠졌어도 결국 마음과 뜻을 함께하는 이들끼리 나뉘어 무리 짓고 있는 신하들과 왕자들 무리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바로 조정과 왕실 내 세력의 판도였다.
“이게 네가 다스려야 할 사람들이다. 너는 이렇게 한 발 떨어져 위에서 내려다보며 관계를 파악하되, 사적인 호오(好惡)는 넣어두고 일을 잘할 능력을 갖췄는지, 일을 되게 할 자인지를 기준으로 사람을 알맞게 써야 한다.”
“예, 아바마마.”
이향은 크게 숨을 쉬어 술기운을 뱉고 자세를 바로 잡았다. 가르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찍이 아바마마께서 무엇이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것인지 힘써 파악하려 하지 않는 신하들을 꾸짖으시고는 하신 말씀이 있다.”
“무엇이옵니까?”
“‘주역의 태괘(泰卦)를 보면 나라 다스리는 방도를 알 것이다.’ 하셨다. 공자께서 태괘에 대해서 뭐라 하신지, 기억하느냐?”
“예, 태괘란.”
이향이 대답을 올리려 하는데 마침 엄자치가 술을 깨우고 몸을 보하는 탕약을 가져왔다.
먼저 마시고 답하라는 세종의 손짓에 이향이 탕약 주발을 들 때였다.
“아바마마, 무슨 정담을 이리 정답게 나누십니까? 형님 저하, 이 동생 오늘 참으로 원손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수양 대군이 휘청거리며 월대에 올라서 허리를 굽혔다.
“오호, 유가 왔구나. 나는 지금 네 형님이랑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니,”
“아닙니다, 아바마마. 아바마마께서 괘념치 않으신다면 저는 우리 수양이 여기 앉아 함께 아바마마의 가르침을 들어도 좋습니다.”
“···그래? 그럼 이 옆에 앉거라.”
세자 형님이 허락한 덕에 겨우 자리 하나 얻어 앉으며 수양 대군은 마음이 쓰렸다.
본래라면 국왕과 세자가 내관까지 뒤로 물리고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끼지 않을 분별력은 있었다.
그러나 오늘, 하필 오늘.
세 살배기 어린 조카는 조정 대신과 왕족 앞에 아바마마와 형님을 이어 조선을 통치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왕재를 지녔음을 너무도 당당하게 내보였다.
저 어린 조카가 생겨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여러 점술가가 은밀하게 예언했듯 저 조카의 단명이 현실이 된다면, 장차 형님의 보위는 결국 자신의 것이 되리란 야망과 자신감에 파사사삭 금이 가는 느낌이었다.
그 불안감에 술을 여러 잔 마시는데
“근데 그 홍위의 보모 말이오. 세자 형님은 벌써 손을 댔다면서 왜 후궁 품계는 안 내린 거지? 그런 여인이 속살 맛이 좋은데.”
하며 낄낄거리는 임영 대군의 음담패설이나 듣고 있자니 자괴감이 이는데,
마침 아바마마와 형님 전하가 붉은 용포를 입고 나란히 앉아 뜰을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대화를 하시는 것이 보였다.
자신도 형님처럼 아바마마와 저리 나란히 앉아 세상을 굽어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 충동을, 야망을 참지 못해 술기운을 빌어 월대 위까지 올라와서 형님의 허락 덕분에 겨우 자리 하나를 얻어 앉았다.
“아바마마께서 내게 주역의 태괘(泰卦)를 물으셔서 막 답변을 드리려는 참이었다.”
형님 저하께서 친절하게 대화 맥락까지 짚어주었다.
“아, 태괘는 예순네 개의 괘 중 열한 번째 있는 괘가 아닙니까? 저도 주역을 좀 공부하였으니, 경청하겠습니다.”
"그럼 태괘에 대해 공자께서 대상전에 쓰셨던 말씀을 옮기겠습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것이 바로 태(泰)가 드러난 모습이니. 임금은 이를 본받아 하늘과 땅의 도리를 마름질하여 이뤄내고, 하늘과 땅의 마땅함을 법으로 만들어 백성들을 이끌어야 한다.’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냐?”
“임금은 무엇이 바른 것인지를 먼저 파악하고, 그 바름에 따라 백성을 이끌어야 한다는 뜻으로, 때로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라도 그것이 바른, 정명한 것이라면 참고 인내하고 설득하며 그 길로 백성을 이끌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옳다. 그 때 아바마마께서 말씀하신 것은 백성에게 이로운 것만 먼저 생각한다면 길을 닦고 전쟁에 나가고 하는 꼭 필요한 부역을 어찌 지우겠냐는 뜻이셨다. 명심하거라. 다스림에 있어 태괘의 이치를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되느니라.”
“예, 아바마마.”
“그럼, 태괘 다음에 바로 비괘(否卦)가 나오는 것은 무슨 의미더냐?”
“예, 그것은 태괘의 태평한 때에 미리 비괘의 어그러짐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자신은 없는 듯 대화에 몰두한 아바마마와 형님을 보며 수양은 입안의 살을 짓씹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면서 아바마마께선 국가의 치도(治道)를 형님 저하께만 가르쳐주고 계셨구나.’
자신도 주역을 서너 번이나 읽으며 그 깊은 이치를 깨치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데, 왜 아바마마께서는 내게는 주역의 괘를 물으시지도, 가르쳐주시지도 않으시는가.
수양은 문득 소외감과 서러움을 진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 서러움은 이 대화를 듣게 허락한 형님에게로 삐뚤어진 분노로 변했다.
‘부러 과시하기 위해 이리 두는 것이지. 자신이 어릴 적부터 얼마나 철저하게 다스리는 자로 길러져 왔는지 보고 들으라고 나를 여기에 두는 것이다.’
수양 대군이 어떤 감정으로 자신과 부왕을 보는지 알지 못한 채 이향은 문득 전날 윤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리 홍위의 세손 강서원을 차릴 때 신하가 주관하는 유학의 가르침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아바마마나 제가 직접 홍위의 가르침을 주관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권가가 그리 말하더냐?”
세종은 대번에 윤서가 말한 것을 눈치챘다.
“그 아이는 한자도 모른다면서 핵심은 잘 아는구나. 공자의 가르침은 본시 다스리는 일에 대한 제왕학이다. 그런데 몇몇 후대의 유학자, 특히 주자가 공자의 가르침을 난도질하면서 수기(修己)인 심신 수양으로만 좁혀지는 경향이 있어. 유학이 그리 흐르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그럼 공자의 가르침의 정수라는 주역도 결국,”
“그러하다. 유야!”
세종께서 갑자기 침묵하고 있는 수양 대군을 부르셨다.
“유야. 주역은 다스리는 자가 마땅히 꿰뚫고 있어야 할 통치학의 근본 원리를 담고 있는 최고의 경서이면서, 또한 동시에 섬기는 자가 마땅히 몸에 익히고 실천해야 할 도리를 가르치는 경서이기도 하다. 네가 주역을 즐겨 읽는 걸 내 아느니, 약조하거라.”
“!”
“너는 마땅히 형님과 우리 홍위를 섬기는 도리와 이치를 주역에서 배운 바대로 실천하겠다고, 약조하거라!”
“!”
늘 자애로웠던 세종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을 발했다.
“약조하래도!”
“···예, 아바마마. 소자 성심을 다해 형님을 보필하겠습니다.”
“그래, 내 너를 믿는다, 유야. 그리고 향이 너 또한 동생을 마땅히 알맞게 쓰며 아껴야 할 것이고.”
“마땅히 그리할 것입니다, 아바마마. 심려 마오소서.”
어색해진 분위기를 이향이 무마하고 나섰다.
수양 대군은 그런 형님이 불안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형님의 눈빛이 전처럼 자애롭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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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서가 어딜 갔다고?”
불콰하게 올랐던 술기운을 탕약 덕분에 털어내고 동궁으로 돌아온 길, 홍위와 윤서부터 찾는 이향에게 박 상궁이 윤서는 없다고 고했다.
“머릿속이 온통 실타래처럼 엉클어졌다면서 정리해야 한다고 매금이랑 출패를 얻어 나갔어요.”
늘 공손하고 일 처리가 빠른 박 상궁이 오늘은 불경하게 짝다리까지 짚고 원수 대하듯 이향을 대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일이 있었습죠. 아주 큰 일이, 큰 결심이, 있었습죠.”
< 제 59화. 홍위의 세책례와 궁중 연회 (3) / 윤서와 평창 군주와의 만남 추가 > 끝
ⓒ 윤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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