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58화 (58/255)

< 제 58화. 홍위의 세책례와 궁중 연회 (2) >

“네 감히 나인 나부랭이 주제에 내 유모를 모욕하다니!”

평창 군주가 윤서의 뺨을 매섭게 올려 치며 소리쳤다.

“!”

“!”

평창 군주의 앙칼진 고함에 모두의 시선이 이리로 집중되었다.

월대 위 상석에서 신빈 김씨, 귀인 양씨와 담소를 하고 있던 소헌 왕후도,

계양군의 부인이자 한확의 첫째 딸 군부인 한씨, 조선 제일 부자 윤사로의 부인 정현 옹주와 은밀하게 대화하던 부부인 윤씨도,

고요히 악공의 연주에서 무슨 음이 틀렸는지 찾아내고 있던 정의 공주도,

요새 그 비누란 것을 쓰고 얼마나 피부가 좋아졌는지 화제 삼고 있던 다른 왕자의 부부인과 군부인들도 모두 평창 군주가 서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악공도 연주를 멈추고, 머리에 화관을 쓰고 푸른색 원삼에 긴 오색 소매를 펄럭이며 춤을 추고 있던 여악(女樂)도 움직임을 멈추자 교태전 앞은 갑자기 고요한 침묵에 빠졌다.

그 침묵을 평창 군주의 싸늘한 꾸짖음이 다시 깼다.

“상궁 옷만 입었다고 상궁이라더냐? 상궁 임명 교지조차 받지 못한 것이!”

“군주 자가, 이것이 대체.”

다시 손을 치켜드는 평창 군주 앞을 박 상궁이 막아섰다.

그러나 윤서는 불꽃이 튀기듯 싸늘하게 빛을 내는 평창 군주의 눈 속에서 그 저의를 단숨에 읽어냈다.

이향이 말했었다. 상궁은 후궁이 될 수 없다고.

평소 얼음 공주처럼 차가우나 예의만큼은 깍듯했던 군주가 이리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는 것은!

“송구하옵니다, 군주 자가.”

윤서는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아니, 권가야······!”

이 무슨 봉변이냐고 윤서를 일으키려는 박 상궁에게 윤서가 재빨리 속삭였다.

“전 저하의 후궁이 되어야 해요!”

“!”

박 상궁은 멈칫하고 재빨리 평창 군주를 보았다. 평창 군주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박 상궁은 “하!” 하고 양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마음 같아서는 ‘보모상궁으로 평생 딸처럼 함께 살자며!’ 권가의 목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다.

그러나 궐 안팎의 사정을 너무 잘 아는 박 상궁은 평창 군주가 왜 이러는지, 윤서가 평창 군주의 의도에 왜 맞춰야하는지 단숨에 납득하였다.

하아, 숨을 토해낸 박 상궁이 권가의 등짝을 팡팡 후려치며 소리쳤다.

“권가 너! 아이고, 밖에 나갈 때만 상궁복 입으라고 했지? 하, 중전마마께서 밖에 나가 무시당하지 말라고 하사하신 옷을 진짜 상궁이 된 것처럼 입고 뻐기더니! 아이고!”

그리고는 권가 옆에 털썩 주저앉아 사죄했다.

“군주 자가, 소인이, 소인이 잘못하였습니다. 상궁 임명 교지도 못 받은 권가를 동궁 내에서도 상궁 노릇하게 두었으니, 동궁전 궁인 관리를 책임진 저의 불찰입니다. 송구하옵니다.”

모두 다 들을 수 있게 우렁우렁 큰 소리로 외치는 사죄였다.

“권가, 다시 한번 상궁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면, 그땐 정말 가만 있지 않을 거야. 박 상궁도 나인 관리 똑바로 하시게.”

야무지게 경고를 남기고 여덟 살의 평창 군주가 턱을 치켜들고 정의 공주 곁으로 돌아갔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고 있던 정의 공주가 피식 웃고는 어린 조카에게 물었다.

“싫어하지, 않았어? 근데 왜 판을 뒤집어주었대?”

평창 군주는 새초롬한 얼굴로 감 식혜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꾹 다물었다가, 흙바닥에서 일어나 치마를 터는 권가를 보며 중얼거렸다.

“근정전에서 권가가, 어머니가 저를 보시던 눈빛으로······, 홍위를 내내 지켜보았어요.”

“···으응? 하긴 권가가 홍위에게 정말 각별하지.”

“우리 홍위는 어머니께 한 번 안겨보지도 못해서, 불쌍했는데······.”

울먹이며 평창 군주는 지난날과 오늘을 함께 떠올렸다.

열에 들떠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희아야, 가여운 내 새끼. 너를 두고, 저 어린 것을 두고 어떻게 가니. 이 험한 궐에 너희만 두고, 내가 어떻게.” 흐느끼시던 모습이 마지막으로 본 엄마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보던, 사랑과 염려와 믿음이 오롯한 그 애절한 눈빛으로 권가가 홍위를 보고 있었다. 그 긴 배강 내내 숨도 크게 내쉬지 않으며.

오롯하게 홍위만 눈에 담은 채 때로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꼭 어마마마께서 살아 돌아오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바마마께서 무릎에 앉히고 하신 말씀,

“희아야, 네가 궐에 예정보다 일찍 돌아오게 된 것도, 여기 이 털 복실한 강아지 몽몽이를 얻게 된 것도 모두 홍위의 보모 권윤서가 힘을 써 일어난 일이다. 이 궐에서 너와 홍위를 진심으로 위할 이는 아비와 함께 권윤서뿐이다. 그러니 권가를 믿고 따라야 한다.”

하신 당부를 군주는 믿지 않았다.

오히려 유모 백씨가 말한 내용을 믿었다.

“하, 권가 그것 참 맹랑하네요. 맹한 척하며 세자 저하를 내내 탐내왔던 거 아니겠어요? 아지(유모)가 병으로 출궁하자마자 우리 원손 아기씨를 앞세워 저하를 꼬신 걸 보면,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가여우신 빈께서 승하하시기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을 거에요.”

이것이 유모 백씨의 주장이었다.

군주가 보기에도 어릴 적 맹하게 자신을 돌봐주던 권가와, 지금의 권가가 같은 사람으로 보이질 않아 그간 의도적으로 속였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마마마 덕분에 궐에 들어왔으면서 모두를 속이고 동생 홍위와 아바마마까지 빼앗아 갔다고 미워하고 있었는데.

‘권가가 홍위한테 어마마마처럼 진심이라면 힘을 키우게 해야 한다.’

궐에서 지켜주고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가 없으면 홍위도 자신처럼 무관심 속에 내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군주는 잘 알고 있었다.

평창 군주는 싸늘한 시선으로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와 그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아까 강아지 몽몽이에게 산적 덩어리 하나를 가져다주려고 교태전 뒤뜰로 가다가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가 계성군의 부인 한씨에게 “상궁은 후궁이 되지 못하는 점을 이용하면 됩니다. 그쪽 일은 어찌 진행되고 있습니까?” 묻는 걸 우연히 들었었다.

이것이 바로 평창 군주가 권가의 뺨을 때려서라도 임명 교지를 받은 진짜 상궁이 아니라 나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두에게 확인시켜야 했던 이유였다.

총명한 권가가 대번에 알아채고 딱 맞게 행동해서 다행이었다고 안도하며 어린 군주는 연근 정과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권가는 박 상궁과 함께 이리 올라오너라.”

중전마마께서 윤서를 부르셨다.

박 상궁이 윤서에게 재빨리 물었다.

“너, 정말 후궁이 되려는 거지?”

“마마님도 알고 계셨어요? 상궁이 되면 후궁이 못 된다는 거?”

“알고 있었다. 전하께서 하도 이 상궁 저 상궁 다 건드려놔서 스스로 정하신 게야. 안 그러면 후궁 숫자가 너무 많아져서 골치 아파지니까.”

윤서와 함께 빠르게 월대 위를 향하며 박 상궁이 휴우 한숨을 쉬었다.

“···마마님, 죄송해요. 최근에야 저하를 깊게 연모하게 되었어요.”

“뭘 최근이야 전부터 눈은 맛이 가 있었구먼. 하아,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후궁 품계는 주는 대로 받는 수밖에 없다.”

“···예.”

“이젠 정말 호랑이 아가리에 들어가는 것이야. 정말로 정신 바싹 차려야 한다, 권가야!”

박 상궁이 간절하게 당부할 때 중전마마와 신빈 김씨, 귀인 양씨 등 전하의 여인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연회석 앞에 다다랐다.

옆으로 부부인 윤씨와 군부인 한씨의 시선이 베일 듯 느껴졌다.

“중전마마, 소란을 일으켜 송구하옵니다.”

윤서는 일단 꿇어앉으며 사죄를 올렸고,

“제가 다 궁인 관리를 소홀히 한 탓입니다, 중전마마. 중전마마께서 밖에 나갈 때나 행세하라고 내려주신 상궁 복장을 궐 안에서도 입고 행세하게 두었으니, 참으로 송구하옵니다.”

박 상궁도 윤서 옆에 꿇어앉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게 왜 편의상인가? 오늘 근정전에서 전하께서 ‘권 상궁’이라고 부르셨지 않은가?”

신빈 김씨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박 상궁의 말을 반박했다.

“조선 천하의 일을 다 관장하시는 전하께서 나인 나부랭이가 진짜 상궁인지 옷만 상궁 옷을 입었는지 어찌 구분하신단 말씀입니까? 궐 내에서도 상궁 옷을 입은 권가의 잘못이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중전마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번에 눈치챈 귀인 양씨가 소헌 왕후를 끌어들이며 무마에 나섰다.

“······.”

소헌 왕후는 입을 꾹 다무신 채 좌우로 고개를 돌려 두 후궁을 지긋이 한 번씩 바라보셨다.

그러자 신빈 김씨도, 귀인 양씨도 “송구하옵니다.” 고개를 숙이며 의자를 조금씩 뒤로 물렸다.

눈빛 하나로 제 잇속을 차리려는 후궁들을 제압한 소헌 왕후께서 윤서에게 물으셨다.

“백가를 무어라 모욕을 한 것이냐?”

“그건요, 할마마마.”

후궁 좌석과 떨어져 따로 동쪽 편에 마련된 연회석에 앉아 있던 평창 군주가 쪼르르 달려오며 소리쳤다.

중전마마께선 ‘네가 함부로 끼어들 자리가 아니니라’ 경고하는 눈빛으로 손녀를 보셨다.

그러나 평창 군주는 중전마마의 시선을 못 본 척, 최근 너무 귀여움을 받아 버르장머리가 없어진 아이처럼 입술을 비죽거리며 고자질하듯 일렀다.

“권가가, 할마마마, 똑같이 보모이지만 자기는 본래 양반으로 저의 보모가 사가에 있을 때 모시던 주인 같은 신분이 아니었냐고, 그리고 또 자신은 아는 것이 많아 우리 홍위에게도 재미난 노래와 많은 지식을 가르쳐 줄 수 있다며 저의 보모를 무시하였습니다!”

“흥, 권가가 양반인 것은 맞으나 그것이 장차 공주가 될 저의 유모에게 부릴 유세입니까? 혼내 주세요, 할마마마!”

“······!”

소헌 왕후는 홍위가 어리광 부릴 때 하듯 품을 파고드는 어린 손녀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겉으로는 혼내달라는 어리광이었지만 속뜻은 ‘권가는 어엿한 양반 출신의 나인이니 중인이나 천인 출신과는 달리 대우해 후궁 품계를 내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째서 권가랑만 어울리면 아이들이 이리 영특해지고 당당해지는가.’

홍위 손을 잡고 함께 온 권가랑 몇 번 이야기를 나누더니, 우리 희아도 어린 나이에 벌써 정치질을 하고 있다!

고개를 조아린 권가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신기해하던 소헌 왕후는 문득 권가를 만나고 자신도 많이 변했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늘 효성스럽고 엄숙하기만 하던 큰아들이 저 아이가 어여뻐 어쩔 줄을 모르고 몹시 집착한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소헌 왕후는 마침내 결정을 내리셨다.

“권가야, 너는 홍위를 끝까지 보필하고 싶다고 하였지?”

“!”

중전마마의 물음에 윤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권가야!”

중전마마께서 다시 대답을 재촉하셨다.

‘훙위는 분리불안이 거의 없어졌다. 밤마다 옆에서 함께 자 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가지게 되었으니.’

윤서는 오늘 홍위가 보여준 크나큰 성장을 믿기로 했다.

이향을 위해, 그리고 이향을 사랑하게 된 자신을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더 큰 힘으로 홍위를 지키기 위해 한 발 더 나가야 할 때다.

“제가 세자 저하를 깊게 연모하고 있습니다, 중전마마. 소인, 세자 저하의 여인이 되고 싶습니다.”

“하, 부끄러움을 모르고.”

어디선가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윤서는 개의치 않고 바라는 바를 정확히 말씀드렸다.

“하오나 아지(유모)께서 아직 몸이 다 완쾌하지 않았으니, 아지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무엇으로든 아기씨 곁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무엇으로든?”

“예, 중전마마.”

“···알겠다. 품계는 차차 정해 내려줄 것이니 일단 아지가 돌아올 때까지 보모 나인으로 홍위 곁에 있거라.”

“예, 중전마마.”

“네가 우리 홍위를 잘 보필한 점은 높이 살만하다. 그러니 앞으로는 더욱 공손하게, 매사 삼가고 조심해야 할 것이야.”

“예, 중전마마. 명심하고 또 명심하여 삼가 근신하겠습니다.”

*****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 상궁 패는 써보지도 못했으니.”

신빈 김씨의 전각 희락당.

연회에서 며느리 계성군 부인 한씨와,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와 함께 돌아온 신빈 김씨가 아름다운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결국 세자 곁에서 그 요물을 떼어내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러자 미모가 출중하기로 유명한 한확 가문의 장녀 계성군 부인 한씨가

“아이, 어머니. 저희 가문에서 어찌 그걸 두고만 본답니까?”

말하며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를 향해 화사하게 웃었다.

그러자 윤씨 부인도 자못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것이 제법 머리를 썼습니다만, 일이 이렇게 된 것도 나쁘진 않아요. 공개적으로 후궁 책봉을 논했으니 윗전 마음대로 높은 품계를 줄 수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아이를 가지지 못한 후궁은 기껏해야 승은 상궁이거나 최고로 주어야 승휘 정도지요. 동궁의 내궁엔 하도 세자 저하의 손을 타지 못해 한이 맺힌 승휘가 여럿이고, 그중 다수가 저희 쪽 사람입니다!”

****

그리고 마침내, 연회가 끝나자마자 동궁의 후궁 전각에서 윤서에게 호출이 왔다.

< 제 58화. 홍위의 세책례와 궁중 연회 (2) > 끝

ⓒ 윤인수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