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화. 군주의 마음을 힘껏 헤아리는 법 (2)
<절반은 기존 이야기와 동일하고, 뒷부분이 새로 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결국 무엇이 나왔습니까, 부인? 시대가 흐르면서 더 나은 조세 제도가 나왔습니까?”
“역사 관련 시험을 볼 때마다 조선 최고의 조세 개혁으로 매번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대동법이란 조세 제도이지요. 혼군이어서 폐위당한 왕 하나는 이 대동법을 실시했다는 이유로 후대에 꽤 괜찮은 왕으로 평가받고 있으니 잘 들어보세요. 아, 근데 그 전에, 너무 힘이 듭니다!”
윤서는 이향의 가슴을 밀며 몸을 비틀어 이향의 팔에서 벗어났다.
자세가 너무 불편해 역사 관련 지식을 떠올리는 데 집중하기 어려웠다.
책상 옆에 팔짱을 끼고 서서, 윤서는 백성에게 말할 수 없이 큰 괴로움이 되는 공물을 일괄적으로 쌀로 거둬들이게 한 대동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집집마다 부과되던 공물을 토지 단위로 산정해 쌀로 거둬들이는 법이기 때문에 땅을 가진 지주들 저항이 무척 심했습니다. 그러나 백성을 위하는 진실된 의지를 가진 신하들이 꿋꿋하게 추진하면서 근 백 년에 걸쳐 자리를 잡게 되었고, 덕분에 상경제와 화폐 경제가 꽃을 피우게 되었다고 하지요.”
“그게, 언제 일이오?”
“약 150년 후에 임진왜란이란 일본의 침입 전쟁이 있었고 그 후에 초토화된 국토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실행한 것입니다.”
“잠깐, 윤서! 전쟁과 조세를 섞지 말라. 전쟁은 일간 전쟁사만 따로 정리해 주도록.”
일단 설명을 시작하자 이향은 지금까지 보이던 느물거리는 태도를 싹 버리고 무섭도록 진지해졌다.
주의 깊게 경청하고 들은 내용을 적으면서 동시에 머릿속으로 현안과 비교하는 듯했다.
“그리고 ’삼정문란‘이란 말이 있었습니다.”
윤서는 토지 세금인 전정, 군포를 내야 하는 군정, 환곡미의 환정의 문란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짤막하게 설명했다.
“제가 기억해 전하는 것은 짧은 지식에 불과하니 이것을 바탕으로 실무에 적용하시는 것은 저하께서 빼어난 신하들과 검토하여 진행하세요.”
“으흠, 좋소. 이것만으로도 정말 많은 도움이 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던 이향이 문득 물었다.
“부인의 세상에서 이런 고등교육은 누가 받는 것이오?”
“의무교육이라고 하여 모든 국민이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총 12년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저처럼 대학교라 하는 곳을 더 가서 공부하게 되지요.”
“의무만 12년을! 모든 국민이! 그럼 노비도 교육을 받는단 말이오?”
“저하, 저의 세상에서는 노비도, 왕도, 양반도 없다니까요. 그저 모두 법 앞에 평등한 인간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원칙적으로 그러하고 사람 사는 곳이니 부와 권력을 기반으로 상류층, 중류층 등으로 나뉘지만 이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고요.”
“아하!”
이향은 윤서를 한층 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부인은 후궁으로 궐의 대소사나 처리하며 살기엔 부적절하오. 그러니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요?”
“우리 평창 군주 오면 홍위도 같이 반 시진씩 여러 분야의 기초 지식을 고루고루 가르쳐주고.”
“아, 예! 좋습니다!”
우리 홍위와 또 홍위를 아낄 그 누나를 가르치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다.
“그리고 지난 번에 말한 대로 밤이면 여기 비현각에서 나의 일인 집현전이 되어 분야별로 고루고루 아는 바를 모두 가르쳐 주시오.”
“···예.”
정의 공주와 책도 지으라고 했는데, 중전마마께 글자 가르쳐 드리며 심리 상담도 하고.
게다가 비정기적으로 대군, 공주 모임에도 가야 하는데.
자운고랑 비누 만들어 파는 것도 해야 하고.
대체 내 일정이······?
“내가 신하들하고 뭔가 막힐 때 자문을 받으러 내관을 보낼 때도 있을 것 같으오. 그러니 그때마다 답을 주시오. 내 따로 집현전 학사만큼 녹봉도 챙겨 드릴 것이니.”
뭔가 일이 좀 과하게 흘러가고 있다!
“물론 나는, 나를 너무 연모하시는 부인을 위해 밤마다 동온돌에서 최선을 다하는 걸로 부인의 노고에 보답하겠습니다.”
이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꼬리에 매달고 윤서를 바라보았다.
윤서는 그 미소에 마음이 설레면서도, 이 기회를 이용해 평소 이향의 거리낌 없는 애정 행각에서 느껴지는 모멸감을 없애기 위해 세심하게 짜온 이야기를 꺼냈다.
“저하.”
“말씀하시오, 부인.”
“제가 가진 지식이 저하의 치세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부인. 이러한 지식은 고금의 어떤 서책에서도 얻을 수 없는 아주 귀중한 것이오. 부인을 만나게 된 행운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럼 저를 그에 걸맞게 대우해 주세요.”
이것이 인재를 지극히 아끼는 세자의 마음을 힘껏 헤아려 드리는 두 번째 청이었다.
“그 어떤 서책도, 그 어떤 인재도 저하께 드릴 수 없는 미래 지식을 주는 인재에 걸맞게 저를 대우해 주세요.”
“···어떻게 말이오?”
방금까지 자신의 애정과 윤서의 애정을 확신하며 여유 있게 굴던 이향의 태도에 초조와 미미한 불쾌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군주는 노여워하는 존재라는 중전마마의 말씀이 귀에 쟁쟁 울렸다.
그러나 윤서는 이향에게서 등을 돌리고 그의 손길에 마구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옷고름을 고쳐매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 이향에게 가는 대신 집무실 중앙에 놓인 회의용 탁상에 가 이향과 마주 볼 수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손길에 흥분하면서도 왜 그것이 모욕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지 이유를 구체적으로 이향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저하의 품에서 가빠지는 숨결을 애써 고르며 저하의 곁에 있고 싶어 보모 나인으로 계속 머물고자 한다는 저의 말이 절반의 진실이라면, 나머지 절반의 진실은 제가 이 상황을 모욕적으로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저하.”
“모욕적이라니, 내 너를 지극히 연모하여서,”
“알아요, 저하. 그것이 조선국 세자로서 저하께서 제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애정의 형태라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제게 사랑이란 제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형태로 애정을 표현하고 원하는 곳에서 잠자리를 하는 것이지 궁인들 보는 앞에서 입맞춤을 당하거나, 어제처럼 어명에 의해 저하께 안겨야 하는 상황이 아니에요.”
“내가 널 그리 대한 건, 부러 그러한 것이다!”
이향의 어조가 분노에 일그러졌다.
“내가 연모하게 된 여인이 하필 나인이라서, 네가 말하는 그 평등하지가 않은 여기 조선의 궐에서 하필 네가 저 밑바닥 나인의 신분이라서, 그래서 부러 궁인들이 보도록 입맞춤을 하고, 온 궐이 알도록 너를 안았다. 세자가 이토록 연모하는 여인이니, 네 털끝 하나 건드릴 엄두를 감히 내지 말라고. 이러한 나의 애정이, 이러한 나의 연모가, 윤서 너에겐 모멸이었던 것이냐?”
정말로 모멸을 당한 듯 이향이 수려한 얼굴을 처참하게 구겼다.
“!”
순간 윤서는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아찔해졌다.
다른 시대 다른 체제 하의 두 사람은 이토록이나 큰 오해의 간극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윤서는 늘 금욕적으로 한시도 옷깃을 풀지 않은 채 세종의 완벽한 아들로 세종의 위대한 업적을 계승하였다던 역사 속 문종이 처음으로 인간의 모습을 한 살아 있는 사람으로 실감 되었다.
그러자 너무도 수려하고 고귀하여 덕질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다고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고귀한 사내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엄청난 연모의 배려를 21세기 인간이란 암암리의 우월의식으로 놓치며, 그의 진심을 어떻게 왜곡하여 오해하였는지를 선명하게 깨달았다.
이향의 비호가 없었더라면 윤서는 진작 전균처럼 맞아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향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 윤서를 사랑하고 있는데, 윤서는 정작 강제로 오게 된 삶이란 껍질에 싸여 이향을 제대로 보길 거부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제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나 사춘기 소년처럼 설레는 사내에게 나는 무엇을 한 것인가.
윤서는 몸을 일으켜 이향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진심을 담아 사죄하였다.
“저하, 제가 제 세상 기준으로 저하의 행동을 재단하여 무례한 모욕이라 경솔히 판단하고, 저하께서 제게 주시는 그 배려와 진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리석게도 저하의 말씀을 듣고서야 저하의 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
“그리고 저하의 말씀을 통해 저의 오만과 무례를 깨달았습니다.”
윤서는 홍위를 위한다면서 실은 자신이 홍위를 위태롭게 하고 있음을 자각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진실로 홍위를 사랑하고 홍위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을 딱 한 사람만 뽑아야 한다면 그 사람은 아버지 이향이지 권가의 몸에 소환된 자신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향보다 자신이 홍위를 더 사랑할 수 있다고 자만하였고, 그 결과 홍위를 구실로 이향의 사랑을 깊게 살펴보지 않고 오해했고, 그럼으로써 우리 홍위의 안위와 장래를 제 손으로 위태롭게 하고 있었다!
뼈 아픈 자각은 통렬한 반성과 사과로 이어졌다.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저하. 다시는 저하의 마음을 저의 잣대로 왜곡하지 않겠습니다.”
이향은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는 여인을 보았다.
온통 몸과 마음을 흔들어놓고, 거대한 의무가 가득하던 밋밋한 세상에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애정을 아들에게 주는, 그리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지식을 많이 가진, 이방의 여인을 보았다.
제 나름의 의지와 기준이 강하여 정말로 궐의 담을 넘어 강을 헤엄쳐 저 멀리 달아날 수 있는 여인을.
자신이 사랑하는 만큼 힘써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려 했기에 함부로 오해하였던 여인이 온힘으로 사죄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이향은 진실로 묻고 싶었으나 차마 묻지 못했던 물음을 마침내 꺼내 놓았다.
“···진성이 다시 빛을 내고 그 금가락지가 너를 다시 너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한다면, 그때 너는 어찌할 것이냐?”
결국 이 질문이 나왔다.
기회가 온다면 돌아갈 것인지.
날개옷을 빼앗겨 나무꾼의 아내가 되어야 했던 저 전설 속 여인처럼, 날개옷이 다시 주어진다면 아이 둘을 겨드랑이에 끼고서라도 날아갈 것인지.
모든 민담과 전설에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과 두려움이 투사되어 있다.
저 먼 옛날부터 윤서처럼 홀연히 다른 세계의 지식과 생동감을 가지고 누군가를 매혹시켰다가 올 때처럼 홀연히 사라져버린 그런 존재가.
애 둘을 만들 정도로 자신을 깊게 사랑한다 자부하여 사슴의 경고를 어기고 날개옷을 내어주었다가 아내를 잃고 만 사내들이.
사랑하는 내내 언제든 아내가 날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끝내 불안하였을 그 사내들이.
그리고 날개옷은 없지만 날개옷 같은 세자빈의 가락지를 혹여 잃어버릴까 혹은 누가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 허름한 저고리 섶 속에 숨겨 반닫이 장 속에 꽁꽁 넣어둔 윤서도 이제 자신에게 물어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비밀을 밝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향에게 청혼을 할 때 제일 먼저 가졌어야 하는 마음가짐은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될 때까지 함께 하겠노라는, 현대로 돌아갈 기회가 오더라도 결코 이향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심하는 일이어야 했다!
윤서는 몸을 일으켜 이향의 눈을 바라보았다.
“저고리 섶 속에 꿰매어 숨겨 둔 가락지를, 버리겠습니다, 저하. 제가 스스로 저하의 곁을 떠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하아.”
묻고 싶었고, 듣고 싶었던 대답이 윤서에게서 흘러나오는 순간, 이향은 안도감에 몸이 휘청거렸다.
“내게도 고백해야 할 비밀이 있다, 윤서야. 들어 주겠느냐?”
온전히 제 것이 되겠다 말하는 여인을 얻고서야 이향은 세자로 살아오는 긴 세월 동안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고독한 심정을 풀어놓을 엄두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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