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화. 군주의 마음을 힘껏 헤아리는 법 (1)
“권가야, 일어나거라.”
중전마마께서 맨 땅에 엎드려 있는 윤서에게 일어나라 말씀하셨다.
윤서는 홀가분하게 일어나 홍위부터 눈에 넣었다.
우리 홍위는 자선이와 함께 낚시 놀이 삼매경이었다.
중전께서도 권가의 모습을 보았다.
바라는 청이 이루어질까 긴장했던 얼굴이 부드럽게 풀리며 지극한 애정을 담고 홍위부터 눈에 담는 권가의 모습을.
“원손 아기씨께서 참으로 좋은 보모 나인을 두셨습니다, 중전마마.”
청송 심씨 사가에서 본방 나인으로 따라 들어와 일평생을 중전과 함께 한 최 상궁이 슬쩍 중전의 판단을 확인해주었다.
“내의원에 일렀더냐?”
“예, 중전마마. 일간 동궁에 가 권가 나인을 진맥하고 탕제를 지으라 전해두었습니다.”
“들었느냐?”
중전마마께서 윤서에게 물으셨다.
“예, 중전마마. 감사합니다. 성심을 다해 달여 마시겠습니다.”
“그 약이 무슨 약일 줄 알고 덥석 먹겠다는 게야?”
“······!”
무슨 약이냐니.
온갖 사극에서 보았던 흉한 약 목록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혹시······?
윤서는 놀라 고개를 돌려 중전마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중전마마께선 처음으로 윤서에게 환히 웃어 보이시며 말씀하셨다.
“네가 간밤에 고단하였다 들었다. 몸 상하지 말라고 지어주는 약이니, 잘 먹거라.”
“!”
세상에.
윤서의 얼굴이 화락 달아올랐다.
중전마마께서 또 눈을 반짝이며 말씀하셨다.
“향이는 지금 네게 푹 빠져 온 세상의 좋고 귀한 것 모두를 네게 주고 싶어 한다. 아마 하늘의 달이라도 딸 수 있으면 따다 네게 주려 하겠지.”
“···예······.”
“그러면 권가 너는 어찌해야 하겠느냐? 장차의 군주가 너를 지나치게 어여삐 여겨 무리하게 빈으로 책봉하고 싶다고 나설 때, 너는 어찌해야 하겠어?”
“···법도에 맞지 않으니 거둬주십사 하고,”
“틀렸다.”
“···예?”
“주고 싶어 하는 군주의 마음을 법도를 들어 거절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느냐?”
“소인은 아둔하여 잘 모르겠으니,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
중전마마께서는 윤서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네가 우리 홍위에게 진심이니 내 그간 왕실의 며느리, 그리고 비극을 겪은 중전으로 알려주마. 권가야, 군주는 노여워하는 존재다. 만인지상의 위치에 서서 지극히 큰 권한을 가지셨기에 자신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 거절하는 것도 노여워하고, 줄 수 없는 걸 내려주십사 청해도 노여워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예, 중전마마.”
“자신의 마음을 힘써 헤아려 삼가 받들려 하지 않는 자를 가장 노여워하느니.”
“!”
“네가 홍위 곁에 계속 남아 있으려면 세자의 마음을 힘껏 헤아려 청을 올려야 할 것이야. 알겠느냐?”
이향의 마음.
윤서를 제 여인으로 삼고자 하는 이향의 마음.
윤서가 아닌 이들이 고하는 모든 말들이 자칫하면 이향의 노여움을 자극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불현듯 들었다.
“···중전마마, 조언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래, 네 입으로 세자에게 청하거라. 세자는 지금 다른 그 어떤 이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터이니.”
그 말을 끝으로 중전께선 홍위에게 다가가 함께 낚시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엄격하던 중전마마의 얼굴이 홍위를 보며 자애롭게 빛나는 걸 보며, 윤서가 글자를 가르쳐 드릴 때 홍위도 종종 같이 와서 배우게 해야겠다고 마음 먹을 때였다.
뒤에서 젊은 여인의 활달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마마마, 어마, 우리 원손 아기씨!”
정의 공주가 큰아들 안여달과 함께 궐에 들어온 것이었다.
여섯 살의 여달은 홍위를 보자 “원손 아기씨! 같이 낚시해요.” 소리 지르며 달려갔다.
아들의 뒷모습을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보던 정의 공주가 시선을 돌려 윤서를 보았다.
“공주 자가 오셨습니까?”
윤서가 깊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자, 정의 공주가 손을 잡아 일으키며 놀리듯 말했다.
“호칭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휴우, 이제 입궐하는 공주까지 다 아는구나.
부끄럽고 민망해 얼굴을 붉히는 윤서의 귀에 대고 정의 공주가 속삭였다.
“오라버니가 그리도 열정적일 줄 누가 알았겠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야, 정말.”
“······.”
궁궐에 프라이버시란 정말로 없구나. 하아.
그날, 오후까지 홍위는 여달과 신나게 놀고, 윤서는 정의 공주와 육아서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온종일 놀아 금세 잠이 든 홍위를 두고 이향을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비현각에서 이향을 알현할 수 있다고 알려주려 온 엄 상전은 김종서 대감과 정인이 대감이 방금 비현각을 떠났다면서,
“한데 그 두 대감이 관복을 벗어 손에 들고 안에 입는 얇은 도포 차림으로 돌아갔네. 하아, 저하께서 이제 낮 동안의 공식적인 업무를 끝내면 무조건 씻으시고 얇은 천으로 된 벙벙한 의관을 갖추시겠다고 하시더니, 신하들도 저하를 따라 더위를 참지 않으실 모양이시네.”
“하아, 세상이 어찌 되려는가.” 하고 혀를 찼다.
좋은 일이다.
겹겹이 겹쳐 있느라 꼭 시중드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관복이 사라지면 의복 시중을 들 사람도 덜 필요할 것이고, 그럼 일상에서 사람을 부리는 일에도 변화가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윤서는 등롱을 들고 자박자박 비현각을 향해 걸었다.
어제 미래에서 온 영혼이라 고백하러 가던 때처럼 심장이 심하게 쿵쾅거리지 않았지만, 또 다른 의미로 긴장되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뜨거운 시간 후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서는 중전마마께서 조언해주신 대로 ‘이향의 마음을 힘껏 헤아려 세심하게 청을 올리기’ 위해 읽은 모든 역사서 속 문종과 조상님 세자빈 권씨 사후가 궁금해서 띄엄띄엄 읽었던 실록 속 세자 이향의 모습을 바탕으로 나름의 복안을 마련한 참이었다.
“저하, 권가 나인이 왔습니다.”
“드시라 하라.”
내관이 문을 밀어 열자 문 앞에 벌써 이향이 서 있었다.
종기로 갑자기 죽게 되었다는 말 때문인지, 이향은 이제 얇은 도포도 벗고 얇은 홑저고리를 느슨하게 풀어 입고 있었다.
쇄골 미남이셨네, 우리 저하.
윤서가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자,
“부끄러워하시긴, 부인. 간밤엔 그리 격정적으로 나를 희롱하시고 새삼.”
다정하게 놀려대는 이향의 몸짓 하나하나엔 눈앞의 여인이 완전히 자신의 사람이란 확신에서 생겨나는 여유가 충만하였다.
이제 그 믿음에 부합하게 힘써 헤아려 행동해야 할 때다.
윤서는 조상님 권씨 사후 두세 번 간택령을 내려 새로 세자빈을 뽑으려 하였다는 기록은 있었지만 끝내 국혼을 올렸단 기록은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이향이 세자빈 자리를 채우는 데 진심으로 관심이 있진 않으리란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자신을 세자빈으로 책봉하고 싶다는 무리한 주장을 하는 이유가 현재 동궁전 후궁 최고의 품계인 종4품 승휘보다 높은 품계인 종3품 양원이나 종2품 양제로 윤서를 책봉하게 하기 위한 연막작전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간밤에 수양 대군의 반정에 협력했던 무리를 입에 담지도 말라는 엄명으로 추론하건데, 이향도 세종처럼 빼어난 인재를 지극히 아끼는 군주이니 윤서의 현대 지식에 지극히 욕심을 낼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힘써 헤아린 분석을 바탕으로 윤서는 장차의 성군 이향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할 인재상을 제시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향은 벌써 슬금슬금 윤서의 옷고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윤서는 그 나쁜 손을 떼어내며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저하, 오늘 밤은 도저히 무리입니다.”
그러자 이향은 윤서를 번쩍 안아 언제 마련해 두었는지 모를 기대기 좋은 쿠션 같은 의자에 앉으며 심상한 목소리로 답했다.
“알고 있소, 부인. 그저 조금 어루만지기만 할 것이오.”
“······.”
호학(好學)이시자 호색이신 전하의 아드님이 맞으시네.
“저하, 제가 아주,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으니, 좀 집중을.”
“아바마마를 닮아 한번 읽거나 들은 건 어지간하면 다 기억하니, 개의치 말고 말씀하세요, 부인.”
“······.”
에라, 모르겠다.
윤서는 옷 안을 파고드는 커다란 손을 애써 무시하며 고하고자 하는 말을 계속했다.
“저하, 만능 인재를, 갖고 싶지 않으십니까?”
“빼어난 인재는 언제나 군주의 기쁨이지요.”
“제가 서당 같은 초급 교육, 기관에서 성균관 같은 고급, 교육기관까지, 근 이십오 년 가까이, 다방면으로 공부하였, 습니다!”
“오호, 그래서 장원 급제 할 실력이라 하셨군요.”
“이런 빼어난 인재를, 후궁에서 썩히기는······, 아깝지 않으십니까?”
“!”
몸을 더듬던 손길이 딱 멈췄다.
이향이 윤서를 숨도 못 쉬게 껴안더니, 귀에 입술을 대고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부인, 간밤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마음에 무척,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꿈에서도 찾던 사내보다 잘 생기고 밤일도 잘하는 나를 내치려 하시는 겝니까?”
“그게 아니라요. 후궁이 되면 전각을 따로 받아 서온돌에서 나가야 하고, 그러면 지금처럼 저하를 마음대로 못 뵙고.”
“으흠, 그러해서라······. 부인은 생각보다 나를 훨씬 더 좋아하시는군요.”
대답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이향이 가슴을 들썩이며 웃더니 다시 손길을 재개했다.
“계속 말씀하세요, 부인. 낭군인 나를 너무 좋아해서 자선당 서온돌에 계속 가까이 머물고 싶은 여인 외에 또 어떤 만능 인재가 되고 싶은지.”
“······.”
누가 역사서에 문종이 단아하고 단정하고 여색을 멀리하는 군주라고 적었어!
의뭉스럽기가 아주!
하지만 한고비는 무사히 넘었다.
이제 두 번째 고비를 넘을 차례다.
“저는, 다방면에 지식이, 아주 많습니다. 특히 조선이 어떻게 발전하고 쇠퇴하였는지, 잘 알지요.”
“그러면, 지난번 화폐에 관한 것 외에 다른 것도 말해보세요.”
“저하, 전하께서 전국의 토지를 조사해 만드신 연분구등법을, 시행하셨습니까?”
“!”
이번에도 이향은 손길을 멈추고 몸을 굳혔는데, 아까와는 다른 의미였다.
윤서가 조각조각 흘리는 지식이 백성의 삶과 조선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 수 있는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저 윤서를 꽉 안고 미동도 없이 한참 생각하던 이향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윤서를 안은 채 업무용 커다란 책상 뒤 의자에 앉더니, 한 손으로 세붓을 들고 명하였다.
“부인, 조선의 조용조 제도의 시대별 변천에 대해 말씀하세요.”
업무용 의자는 아까 쿠션처럼 놓인 의자와 달리 이향 한 사람 앉기에도 빠듯해서 아까처럼 안정적인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윤서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이향의 목을 단단히 감고서야 떠오르는 대로 말할 수 있었다.
“세종, 그러니까 지금 주상 전하의 묘호가 훗날 세종이신데, 세종께서 백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연분구등법은 그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실제 시행의 어려움 때문에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실질적인 어려움이 있었단 말이오?”
“책에 쓰여 있기는 일단 아홉 단계로 나누는 것 자체가 번잡하고, 토지의 기름짐이 해가 지나며 달라질 수 있고, 날씨에 따라 풍흉도 매년 달라지고 무엇보다 몇 등급을 평가하느냐가 객관적 기준이 없어 뇌물을 주고 낮은 등급으로 평가받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으흠······. 원래는 정인지가 만든 안을 토대로 내년에 시행할 예정이었는데.”
중얼거리며 유려한 필체의 한문으로 윤서가 말한 내용을 휘리릭 적은 이향이 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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