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 황녀의 명이라면 기꺼이. (106/146)


#106. 황녀의 명이라면 기꺼이.
2022.09.05.



“실로 골치 아프고 하찮은 것들이지.”

“으으. 차라리 교묘한 정치 싸움이나, 너 하나, 나 하나 주고받는 수 싸움이 더 나아. 뭘 하려는지 예상을 할 수는 있잖아.”

그 말 그대로. 상대가 자신과 비슷한 수준 혹은 더 뛰어나거나 좀 떨어진다면 자신이 가진 지식과 상식선에서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

예측할 수 있다면 대비할 수 있고, 역으로 공격을 해서 적을 무너뜨릴 길을 찾기도 수월하겠지.

하지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올리비아는 앓는 소리를 내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적은 그야말로 미지다. 너무 대단해서 미지라는 뜻이 아니라, 아니, 대단하긴 하지.

오로지 가진 힘만으로 모든 것을 쓸어버릴 수 있는 것들이니까.

어차피 정화를 명목으로 대륙 전체를 피에 잠기게 할 거고, 그럴 힘이 있는데 뭐하러 머리를 굴리겠나.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고 후일을 위한 계획을 세우는 건 어디까지나 ‘미래’를 바라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뒤가 없다는 건 정말 골치 아프네. 차라리 대륙 정벌이라도 했으면 이렇게 앞이 깜깜하진 않았을 텐데. 하긴.”

잠시 말을 끊은 그녀가 크라이어를 위아래로 훑었다.


“당신과 전쟁을 했을 때도 딱히 전술이라고 할 만한 걸 들고 나오진 않았지. 그냥 당신이 선두에 서서 모조리 밀어버렸으니까.”

단 한 사람이 수십, 수백의 기사를 검 한 자루로 도륙 내며 순식간에 중앙을 돌파한 후, 좌익과 우익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

그건 그야말로 자연 재해나 다름없는 광경이었지만,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재해였겠군.”

“굳이 말로 안 해도 잘 알고 있네.”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런 것까지 통할 필요는 없을 텐데.

불퉁한 마음을 눈을 가늘게 뜨는 것으로 대신한 올리비아는 이내 서류를 모조리 밀어버렸다.


“좋아. 이렇게 된 바에야 힘에는 힘으로 대응하겠어. 호위 따위 마음대로 하라고 해. 그쪽에서 힘만 믿고 나온다면 이쪽에서는 더 큰 힘으로 눌러주지. 그러니까.”

크라이어를 향해 다가선 올리비아가 턱을 치켜들고 외쳤다.


“가라! 크라이어!”

그녀가 힘차게 삿대질하자 크라이어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끝을 잡고 손톱에 가볍게 입술을 내렸다.


 


“황녀의 명이라면 기꺼이.”

그런 그럴 한껏 거만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올리비아가 이내 뭉친 어깨 때문에 앓는 소리를 냈다.

손끝부터 느껴지는 미지근한 숨결에 귀 끝이 조금 붉어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깨 어름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올리비아는 원래 하려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아무튼 호위를 들여서 뭘 하려는 건지는 그쪽에서 저질러 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니 여기까지만 머리를 굴리고, 진짜 할 이야기는 따로 있잖아?”

“그래. 그래서 밤까지 기다렸지.”

은근하고 나지막하게 깔리는 목소리와 어스름한 조명까지, 느른하게 가라앉는 공기가 그를 휘감자 올리비아가 성마르게 입을 열었다.


“당신 과거에 전문적으로 사람을 꼬여내서 뭔가를 도모하는 인력이었어?”

로맨틱이고 감성이고 박살 내는 그 말에 담긴 초조함과는 달리 올리비아의 뺨은 어느새 발갛게 익었고, 눈가도 달아올랐다.


“이렇게 일일이 반응할 거면서 부추기기는.”

“뭐? 누가 누굴 부추겼다고!”

“전문적으로 그런 일을 하지는 않았다. 뭐, 그러지 않아도 사람이 꼬이긴 했던 모양이지만.”

애매한 대꾸에 올리비아가 미간을 찌푸리자, 크라이어는 그녀의 미간을 살살 눌러 폈다.

그의 손을 잡아 내리며 올리비아가 물었다.


“구체적으로 좀 말해봐. 사람이 꼬이다니? 그만한 권력을 쥐고 흔들었다는 거야? 아니면 특별한 능력? 그것도 아니면 설마 진짜 범…….”

말을 하다 말고 굉장히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올리비아의 입가가 씰룩거리자, 크라이어는 지체없이 미간을 문지르던 손가락을 굽혀 동그란 이마를 가볍게 튕겼다.


“다행히 역사에서 지워질 만큼 지독한 범죄자는 아니더군. 권력자라면 권력자고 능력이라면 차고 넘쳤던 거 같다만.”

넘치는 능력과 사람을 개미 떼처럼 끌어모을 수 있는 권력을 거머쥔 과거.

크라이어는 볼셰이크가 제국의 주인이 되기 전 존재했던 제국을 지탱하는 가장 큰 거목이었다.

황제가 그를 견제하다 못해 제국의 가장 단단한 방패이자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로운 검을 제 손으로 파묻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거대한…….

얼굴은 물론이거니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까마득한 과거의 인물이 자신에게는 어떤 의미였던 걸까.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묘한 확신이 있었다.

아마도 아무 의미도 없었으리라.

그러니 그런 마지막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바라는 부활의 순간 그토록 분노했겠지.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크라이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권력이 먼저인가, 능력이 먼저인가로 따진다면 권력이 먼저였겠지. 아무래도 황제의 사촌 형제였으니까.”

“황족이었다고? 전대 황족이라면…….”

지난 제국의 황실을 더듬는 올리비아의 말에 크라이어는 손을 저었다.


“그런 것이 중요한 건 아니지. 결국 태생부터 가진 권력을 능력이 찍어 눌렀으니까.”

“당신 지금 자신의 과거를 말하고 있다는 거 인지하는 거지? 자기 입으로 자기가 대단하다고 하고 있는 거 아는 거지?”

“그런 눈으로 봐도 내 기억에 없는 과거니 솔직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과 다름없어서.”

정말로 그랬다. 애초에 올리비아를 만나지 않았다면, 자신의 과거 따위는 찾아볼 생각조차 없었겠지.

원치 않는 부활과 강제로 찍힌 노예의 낙인을 가지고 끝이 보이지 않는 수렁으로 가라앉기만 하던 그에게 과거는 무의미했으니까.

하지만 하얀 손 하나가 제 앞에 나타났다.

이 손을 잡으면 너를 그 수렁에서 꺼내주겠다고 말하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그 손을 잡고 그 목소리를 따라 지금에 이르렀다.

올리비아가 자신의 과거에 관심을 가졌기에 기꺼이 관심 한 점 없는 과거를 찾았다.


“그 능력이라는 거. 혹시.”

“그래. 단신으로 대륙 전체의 운명을 가를 만큼 상식이나 인지에서 벗어난 강자였다고 하더군.”

그건 인간이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과 동시에 올리비아는 납득했다.

그래.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인간을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 아닌가.

대륙을 혼자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강…… 잠깐.


“맙소사. 그러면 당신, 무력이 늘고 있는 게 아니라.”

“본래 가진 것을 회복하고 있는 거지.”

“그레타가 당신의 과거를 알고 있다면, 무력을 회복하기 위해 단순히 시간 벌기로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건가? 아니, 애초부터 당신이라는 카드를 쥐고 있으면 다른 것들은 필요 없잖아? 대륙 전체를 갈아버릴 정도면 굳이 제국을 흔들거나 하지 않아도 되니…… 아.”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던 올리비아가 탄식했다.


“제국을 흔든 적도 없었지.”

이번 생에서는 크라이어가 올리비아의 곁에 있기에 제국에서 이런저런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 전의 생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의 존재조차 몰랐다.


“결국 시간 싸움이란 말이네.”

크라이어가 과거의 무위를 완전히 회복하는 순간,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그 낙인. 혹시 힘을 회복할 때마다 뭔가 느껴지는 게 있어?”

“글쎄. 말했듯이 내 힘은 빌어먹을 신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서. 딱히 느껴지는 건 없다.”

“그렇다면 다행이긴 하지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올리비아는 머리에서 김이 날 것 같은 기분에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할 수 없는 것을 보면서 눈물 흘리고 걱정하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을 차근차근 해나가야만 하니까.


“그보다, 그러면 결국 당신을 왜 역사서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거야? 바로 전 제국의 역사라면 빠짐없이 살폈을 텐데. 심지어 황족이었다면 당연히 더 자세한 기록이 장대하게 남아 있는 게 정상이잖아.”

“반역자였다.”

그 말에 올리비아의 속눈썹이 풍랑에 흔들리는 나비의 날개처럼 빠르게 팔락거렸다.

반란.

어떤 천인공노할 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역사에서 지워지는 경우였다.

왜 이제까지 그 가능성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까 할 정도로 명확한 이유가 아닌가.

올리비아는 입을 벙긋거리다 헛숨을 내뱉었다.


“반역……이라고. 전 제국의 반역자라면 볼셰이크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어째서 가문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거지?”

설령 지난 제국에서 반역자의 가문과 그 일원 그리고 역사까지 통째로 지워버렸다 하더라도 분명 볼셰이크의 역사서에는 어떤 단서라도 남아 있어야 할 터.

그렇기에 이제껏 불러들인 수없이 많은 역사가들도 모두가 정체를 알 수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지 않나.

그 볼셰이크의 역사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자였으니까.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너무나도 간단하고 빠르게 나왔다.


“볼셰이크와 접점이 없었으니까.”

“뭐?”

“당대 볼셰이크 가주가 문을 걸어 닫고 제국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

올리비아는 아까보다 한층 더 어벙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리다 곧 허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지. 그래.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도 없는 조상님들이야 양손으로 세도 모자랄 만큼 많았으니까.”

“볼셰이크의 역사서가 방대하다고 해도 어쨌건 그 역사서를 기록하는 사람의 관심사가 반영되는 것이지 않나.”

“맞아. 그런 맹점이 있었네.”

힘이 빠진 듯 소파에 늘어진 올리비아가 짧은 신음을 삼키다 배슬배슬 웃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혹시 정신이 나갔나? 싶었지만, 크라이어는 그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

올리비아는 헤실거리는 얼굴 그대로 입을 열었다.


“뭐야, 당신 결국 희대의 범죄자가 아니었잖아? 난 또 마왕을 강림시키려고 한 국가 정도는 몰살시킨 경력자인 줄 알았지. 그래서 이번에도 고대신이 그 짓거리를 좀 더 확대해서 대륙 전체를 다 끌어들여서 모조리 다 죽이는 건가? 했다고.”

“지나치게 구체적인데.”

“당신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까 이런저런 헛생각도 그만큼 들기 마련…… 뭐, 뭐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콧날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크라이어의 숨결이 입술에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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