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돌아왔지 않나.
(105/146)
105. 돌아왔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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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돌아왔지 않나.
2022.09.01.
황녀에게 경고를 주라는 명령을 티슨은 잊지 않고 수행했다.
물론 그의 계획답게 정교함과 세밀함 따위는 날려버린, 아주 단순하지만 위력은 확실한 쪽으로.
당연히 계획없는 계획답게 그레타가 위험에 빠지는 상황에서 인질로 잡힌다, 라는 부분만 뺀 것이긴 했지만.
어쨌건 효과는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외교관들이 쓰는 것보다 족히 두배는 크고 무거운 막사가 육중한 소리를 내면서 올리비아를 덮친다면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경고 치고는 선을 넘은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과격했지만, 명령을 내린 그레타나 수행하는 티슨이나 올리비아가 죽지만 않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으리라.
어차피 무너질 제국의 혼란은 차기 황제의 죽음으로 더 빠르고 더 격렬하며, 크게 불러올 수 있다는 건 머리가 없는 그들도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물론 제국의 후작, 그것도 오랜 역사를 지닌 하인데르가의 보니타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황녀궁에서 올라오는 심상치 않은 보고와 ‘평화’라는 대전제를 목적으로 황궁에서 밀려 내려오는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결국 머리는 없고 힘은 넘치는 두 사람의 합작으로 일어난 경고는 막사를 나서는 올리비아를 덮치는가 싶었지만…….
막사의 가장 중요한 기둥에서 일어나는 균열을 알아차린 이가 있었다.
-으직.
그레타의 앞을 막고 티슨을 도망치게 내버려 둔 크라이어는 귓바퀴를 타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 소리가 제 인내심이 바스라지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이글거리는 욕망을 숨기지도 못한 채 줄줄 흘리면서 저를 바라보는 그레타의 속살거림을 참아내다 못한 그의 인내심이 기어이 박살 나려고 하고 있다고.
-우지직.
그 희미한 소리가 조금 더 확연해 졌을 때, 크라이어는 무의식적으로 올리비아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이것을 여기에 두고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었으니까.
자신의 과거를 듣는 대가로 이 시시하고 구역질 나는 연극에서 역할을 다 했으니 오늘 할 일은 다 했…….
-으지지직!
크라이어는 생각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이미 땅을 박차고 있었다.
“……이어 님?”
그레타가 눈을 깜박하는 찰나 그녀의 코앞에 있던 인영은 빗살같이 쏘아져 나갔고, 그가 박찼던 땅은 인간이 남겼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선연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사냥제가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일어난, 끔찍했지만 생각보다 허무하게 끝나버린 사건으로 시간이 빈 사이.
이곳저곳에서 그제야 정신을 차렸으면서도 혀를 칼 삼아 제각기 떠들던 외교관들의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떡 벌렸다.
-우지끈!
“어?”
“내가 말하고 있는데 어디를 보는 건…… 어어?”
“이게 무슨 소리…….”
크라이어의 귀에만 들리던 소리가 다른 이도 들을 수 있는 굉음이 되는 순간, 황녀가 머무는 막사가 그대로 내려앉았다.
“으, 으아아악!”
“전하! 황녀 전하께서!”
“저게, 저게 왜 무너져! 전하!”
얼마간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던 이들 중 몇몇이 겨우 제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침을 튀겨가며 고함을 질렀다.
그들의 시선은 이제 막 무너져내리는 황녀의 막사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그레타만은 끝까지 크라이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또 제 곁에서 사라졌다.
곁으로 돌아온 시간은 지극히 짧았고, 떠나가 버린 그분은 결코 돌아보지 않는다.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결국 두 사람만 남겠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그때를 위해 참고 또 참겠지만.
그가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이유가 너무나도 명확해서 그레타의 눈은 번들거렸다.
“황……녀의 기사.”
까드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잇새로 새어 나온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숨길 생각도 없는 살의와 질투심이 끈적하게 눌러붙어 있었다.
잠시 제게로 돌아왔던 그분께서 쓸 곳이 있으니 정화하지 말라는 말씀만 하지 않으셨더라면.
이를 까득까득 갈아대던 그레타는 곧 몸을 돌려 그대로 사라졌지만, 그녀의 행방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레타가 막 제 몸을 감추었을 때, 올리비아는 뺨에 달라붙던 불쾌한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제 앞을 가로막은 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를 깔아뭉개려던 막사의 기둥을 등으로 막아낸 사내.
“크라이어.”
“다친 곳은?”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그냥 아까처럼 베어내지, 그걸 왜 등으로 받아서.”
혀를 차면서도 올리비아는 빠르게 그를 훑은 뒤 한숨을 내쉬었다.
“다친 곳은 없어 보이네. 참 지독하게 튼튼한 몸이야.”
툭툭 내뱉는 말의 기저에 깔린 오롯한 걱정에 크라이어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막사로 외부와 차단되어 있어서 그런 걸까.
그는 이 순간 세상에서 그녀와 단 두 사람만 남은 것 같았다.
아마도 이 말을 밖으로 꺼내면, 그런 망할 소리 하지 말라며 펄쩍 뛰겠지.
그녀가 그에게 익숙해진 만큼, 그도 그녀에게 익숙해졌다.
늘 머물던 자리, 늘 돌아오던 곳에 그녀가 없으면 참을 수 없을 만큼.
“왜 웃는 거야. 나도 같이 웃어.”
“돌아왔지 않나.”
일견 뜬금없어 보이는 대꾸에 올리비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크라이어가 제 곁으로 돌아왔다.
새삼스럽게 그의 입으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난데없이 막사가 무너지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통해 온몸으로 해일과 같이 밀려들었다.
그 찰나 손끝 저릿해서 잘게 떨릴 만큼 큰 희열에 올리비아는 잠시 넋을 놓았다.
하지만 그 직후 그녀는 오만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친!
방금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그가 제 곁으로 왔다는 것 하나만으로 기뻐…… 했다고?
이런 진짜 미친!
몇 번이나 죽음을 반복하고 회귀한 후 그녀가 세운 목표는 단 하나였다.
생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크라이어를 끌어들였을 때도, 하루가 지나고 양손으로 셀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갔을 때도.
이번에야말로 살아남는다.
그것 하나만큼은 결코 흔들리지도 부서지지도 깨지지도 않는 목표였다.
분명 그랬을 텐데.
“크라이어.”
저도 모르게 짓씹듯 흘러나온 이름에 그가 천천히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그 검붉은 눈동자에서 넘실거리는 안도와 더 깊은 곳에서 웅크린 그녀를 향한 진심을 발견한 순간, 올리비아는 직감했다.
어쩌면 언젠가, 살아남는다는 목표보다 이 남자를 더 우선시하는 날이 올 거라고.
크라이어가 모르는 사이, 그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미래를 올리비아 역시 그려내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놓지 못하는 미래를.
가라앉은 막사 안에서 밖에서 기시단의 커다란 고함 소리가 울릴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사냥제에서의 소동은 보는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만큼 망가진 일꾼의 시체가 발견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뒷조사는 이제 시작했지만, 올리비아는 딱히 그 조사를 이어가게 만들 생각이 없었으니 거의 끝났다는 말이 맞겠지.
이 사건을 일으킨 놈과 목적을 명확히 알고 있으니 가뜩이나 식은땀을 흘려대며 눈을 데굴데굴 굴려대는 외교관들을 구태여 들쑤실 필요는 없을 테니까.
“다친 곳은?”
“없어. 긁힌 상처 하나도 없다고. 먼지 좀 들이마셨을 뿐이니까.”
막사가 무너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나 주고받은 문답에 올리비아의 눈썹이 비죽 솟았다.
“왜 이렇게 집요해. 몸에 관한 거라면 내가 거짓말한다고 당신이 눈치채지 못할 리도 없는데.”
“아니, 몸에 관한 거라니 말을 꼭 그런 식으로…….”
크라이어는 드물게 말끝을 흐리며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걱정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나.”
“뭐든 지나치면 모자란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지.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정말로 멀쩡해. 보라고.”
올리비아는 아예 작정을 한 건지 제 얼굴을 이리저리 삐죽거리며 들이밀다가 곧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치맛자락과 붉은 물결처럼 흔들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장난스럽게 베어 문 미소까지.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시야에 박혀, 이 사소한 순간이 크라이어에게는 지울 수 없는 화인처럼 남았다.
“어때?”
“그……래. 다친 곳은 없군.”
정말로 입에 담고 싶은 말은 다른 것이었다.
찬탄하고 싶었다.
지금 내 눈에 네가 얼마만큼이나 찬연하고 다채롭게 빛나고 있는지.
돌아서면 잊어버릴 이 소소한 시간조차 너와 함께라서 가지는 의미와 무게가 얼마만큼이나 달라진 건지.
그런 것들을 피부 한 겹 아래 묻어버린 크라이어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
그제야 제대로 납득한 그의 반응에 올리비아는 어깨를 한번 으쓱인 후 곧바로 서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자 그럼 슬슬 연극의 뒷정리를 해볼까.”
올리비아는 그레타가 보낸 ‘원하는 보상’이 적힌 서류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성질도 급하지.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한 보상을 해주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이런 전갈을 보내다니.”
“이미 준비해둔 것을 보내기만 한 것일 테니까.”
“그건 알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뒷일은 생각하지 않…… 아, 그래. 생각이란 게 없지.”
신랄한 평을 내린 올리비아는 서류 모서리를 툭툭 두드렸다.
“위협을 느꼈으니 안전하게 느낄 수 있는 호위를 자신이 지정하게 해달라? 그것도 제국 기사가 아닌 제가 데리고 온 사람 중에서?”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다른 서류 뭉치를 당긴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뒤적거렸다.
“노르덴국에서 온 사람 중에는 아무리 봐도 호위로 쓸 만한 사람이 없지 않아?”
“서류에 적힌 내용만 봐서는 없다.”
크라이어의 답에 올리비아는 잡고 있던 서류 뭉치를 밀어버렸다.
“그렇다면 이 서류에 적힌 사항 외에 다른 것을 숨겼다는 거네. 이걸 이렇게 대놓고…… 하, 계획이라는 게 없는 것들이니 결국 그 호위라는 것도 닥쳐 봐야 알겠지.”
이번 일로 올리비아는 깨달았다. 고대신을 모시며 대륙을 정화한다는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켜 피를 흘리려는 것들이 어떤 것들인지.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면서 굳건한 신념이 있고, 그 삐뚤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힘도 가지다니. 이렇게 골치 아프고 하찮을 줄이야.”
목을 울려 낮게 웃은 크라이어가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