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 여기에 있군. (100/146)


#100. 여기에 있군.
2022.08.15.



“그래. 내 딸아.”

대체 얼마 만에 들어보는 딸이라는 소린지…….

올리비아는 허물어지듯 웃으며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좀 피곤하고 그러네요.”

딸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아주며 그러지 말고 무슨 일인지 말해보라고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는 올리비아와 똑같은 푸른 눈동자에 더할 나위 없이 넓어서 딸의 모든 것을 안아줄 수 있는 바다를 담고 속삭였다.


“내 딸아. 너는 볼셰이크란다.”

마주한 딸은 이미 장성하여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훌륭한 후계자가 되었고 심지어 제가 좋다는 남자까지 데리고 왔건만, 아버지의 눈에는 첫울음을 터뜨린 아기의 기억이 여전히 선명했다.


“네가 무엇을 원하건, 무엇을 하건 늘 기억하렴.”

만약 지금이 ‘황제’와 ‘차기 황제’의 얼굴로 마주 앉아 있는 거라면 대단히 냉혹하지만, 지독히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었다.

네가 누구인지 기억하고, 그에 걸맞은 선택과 행동을 하라.

하나, 아버지와 딸로서 마주 앉은 이 자리에서 듣는 그 말은 더없이 따뜻하고, 그야말로 가없는 내리사랑만을 담고 있어서…….


“볼셰이크는 너를 지지할 거란다.”

태양이 동쪽에서 뜬다는 진리처럼 덤덤하게 흘러나온 아버지의 진심에 올리비아는 울 듯이 웃고 말았다.

아마도 모든 일이 무사히 끝난 후 아버지께 전말을 말씀드리면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나리라.

그리고 그런 아버지에게 마음껏 어리광이라도 부리겠지.

언젠가 미래의 어느 날을 위해…….


“황제 폐하께서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되잖아요.”

올리비아가 배시시 웃으며 타박 아닌 타박을 하자, 황제는 눈가를 누그러뜨리며 답했다.


“안 되겠지. 그렇지만 기꺼이 그리할 거란다.”

그 안에 담긴 결코 부러지지 않는 거대한 진심에 올리비아는 쑥스러운 듯 물었다.


“아버지.”

“음?”

“저 좀 안아 봐도 돼요?”

“그런 건 묻지 말아라.”

아버지는 그녀가 처음 빛을 받고 나온 날에 그랬던 것처럼 올리비아를 꼭 안아주었다.

***

아직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새벽.

-똑똑


“들어 와.”

올리비아의 허락 뒤로 문이 열리면서 엄청난 양의 서류가 밀려 들어왔다.

평소 때처럼 집무실을 꽉 채운 서류의 산을 바라보는 올리비아는 무심한 얼굴로 턱짓했다.


“긴급부터 이쪽에 두고.”

“네.”

그녀는 연달아 네 방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중요하고 급한 것, 중요하지 않지만 급한 것,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것, 그리고 중요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은 것 순으로 놓아둬.”

이윽고 올리비아만이 알 수 있도록 구분된 서류의 산맥이 깎여 나가길 한참.

펜을 들고 결재를 고심하던 올리비아의 어깨가 움찔했다.

하얀 서류 위로 짙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으니까.

어느새 온 건지 크라이어가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왔어?”

“조금 전.”

“왔으면 부르기라도 하지.”

“아니, 그냥 보고 싶어서.”

숨 쉴 틈도 없이 돌아온 답에 올리비아는 입을 꾹 다물었고, 크라이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동안 까맣게 가라앉은 그의 검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펜을 내려두고 일어났다.


“얼굴이 그게 뭐야.”

“음.”

툭 내뱉은 그녀의 말에 크라이어는 몸을 뒤로 빼며 퍼석한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간지 얼마나 됐다고, 십 년은 늙은 얼굴로 왔네.”

“그 정도까지.”

“그 정도야.”

크라이어의 말을 싹둑 잘라버린 올리비아가 그의 손을 끌고 소파에 앉혔다.

그녀의 손길에 별다른 저항 없이 끌려온 크라이어는 그대로 소파에 등을 깊숙이 묻으며 앉았다.

언제나 올려다보던 남자를 내려다보니 뭔가 묘하게 다른 기분이 들기는 했다.

올리비아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크라이어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눈가를 스치듯 지난 그의 손가락이 곧 뺨을 감싸자 그의 입술 사이로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뭐야, 사람 얼굴 보고 한숨이나 쉬고.”

그의 손길이 마치 유리 인형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지나치게 조심스러워서 올리비아는 괜스레 퉁퉁거렸다.

그에 크라이어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여기에 있군.”

“그럼 내가 여기에 있지 어디에 있어? 이상한 말 하지 말…… 으앗!”

올리비아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크라이어가 그녀를 당겨 안았다.

엉거주춤하게 그의 다리 위에 앉게 된 올리비아는 불편한 듯 몸을 움찔거렸지만,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크라이어의 나지막한 말에 온몸에 힘을 뺐다.


“잠시만.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은 크라이어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체향에 섞인 희미한 장미향이 그의 폐부를 깊숙이 찌르자 그제야 그는 조금쯤 안심할 수 있었다.

고작 며칠이었다.

그것도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고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건 보러 올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그런데도 시간은 까마득했고, 거리는 아득하기만 했다.

크라이어에게 올리비아와 떨어져 있다는 건 그랬다.

그는 정말이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올리비아가 곁에서 사라지자 형편없이 무너졌다.

올리비아가 제게 등을 보이며 멀어지는 순간부터 너무나도 깊이 뚫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그의 가슴 한중간에 비릿한 바람이 불었다.

그건 폭풍이 아니었다. 바람은 휘몰아치지도, 거칠게 용오름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저갱 같은 크라이어의 가슴에서 느릿하게 불어 서서히 온몸을 잠식할 뿐.

그건 뭐라고 해야 할까.

가질 수 없는 것을 아주 잠깐 가졌다가 영영 잃어버렸을 때 느끼는 그런 것이었다.

허무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이 그의 핏줄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후회했다.

정보가 필요했기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택했다.

올리비아와 떨어지는 것을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향한 욕지거리가 혀끝까지 밀려 올라왔지만, 그것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일은 없었다.


‘……니까,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인형을 하나만 더 만들고 나면 당신이 굳이 제국에 있을 필요는 없을…….’

다만 눈앞에 있는 그레타를 그저 지나는 길의 돌을 보는 시선으로 내려다보았을 뿐.

일을 빨리 끝내야겠군.

아니, 끝내기만 할 게 아니라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실패할 수 없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또 이런 식으로 올리비아의 곁을 떠나야만 할 테니까.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나와 어떻게 처음 만난 건지 말해.’

과거를 헤매던 그는 두서없이 입을 열었다.


“내가 잃어버린 기억. 그것도 내 과거를 잘 알지는 못 하…….”

“크라이어.”

그의 말이 시작되기도 전에 올리비아가 그를 불렀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마치 매달리듯 자신을 안고 있는 그의 등을 느릿하게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지금 말하지 않아도 돼.”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올리비아가 덧붙였다.


“언제건 들을 수 있으니까.”

그 말이 크라이어에게는 언제건 자신의 곁에 그녀가 있다는 의미로 들렸다.

형편 좋게 듣고 싶은 대로 들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실제로 그녀는 그의 품에 있고, 앞으로도 있을 테니까.

그녀를 만나지 못한 시간과 앞으로 곁에 있을 시간까지 헤아리면, 요 며칠의 헤어짐은 찰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크라이어는 그 찰나조차 참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깨달았고.

그는 입을 다물고 그녀가 쓸어주는 등과 그녀를 안은 팔, 그녀의 들이켜는 숨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긴장으로 꽉 조여있던 그의 등과 목에서 어느 정도 힘이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올리비아는 문득 짧게 웃었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나 거대하고 터무니없이 강하다 못해 인간이 아닌 괴물이라 불리기에도 손색없는 남자가 마치 어린애처럼 굴고 있다니.

이 남자의 이런 면을 내가 아니라 다른 누가 볼 수 있을까.

그러자 기묘한 만족감이 차오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불안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녀가 소리 내어 웃은 탓에 그 진동이 그대로 크라이어에게 전해졌고,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올렸다.

코끝을 스치는 새빨간 머리카락이 일렁거림과 동시에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대체 무슨 짓을 당하고 온 거야.”

놀리는 듯한 목소리의 바닥에 깔린 걱정과 조금 다른 감정도 맞닿은 몸을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글쎄.”

크라이어는 그 이상 말하지 않고 다시금 그녀의 어깨, 아니 이번에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 미지근한 숨결이 목선을 타고 흐르자 간지러웠는지 본능적으로 몸을 뒤튼 올리비아가 곧 그의 등을 탁탁 내려쳤다.


“이제 그만 놔. 잠시라기에는 너무 길잖아.”

말투는 퉁명스럽고 밀어내는 힘도 있었지만, 크라이어도 그만 웃고 말았다.

슬쩍 눈을 돌린 끝에 닿는 그녀의 목덜미가 새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였으니까.

그대로 이를 드러내 가볍게 깨물면 그대로 눈이 돌아갈 만큼 달콤한 과즙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안고 있던 팔에서 힘을 풀었다.

곁에 있다. 내가 그녀의 곁에 있고, 그녀가 내 곁에 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서, 목 안쪽에서 만족스러운 긁는 소리가 울릴 정도였다.

순순히 허리를 놓아주는 크라이어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올리비아가 막았다.


“일어나지 말고, 일단 누워. 진짜 말도 안 되는 몰골이니까.”

“이제 괜찮다만.”

“보는 내가 안 괜찮으니까 좀 누우라고.”

낑낑거리며 그의 강철같이 단단한 어깨를 누르는 올리비아를 보던 크라이어는 결국 소파에 누웠다.

힘들게 그를 눕히는 데 성공한 올리비아는 반대로 몸을 일으켰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그의 시선을 느낀 올리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열이 나잖아. 심지어 그 낙인은 좀 더 뜨거운 거 같아. 차가운 물하고 수건 준비시킬 테니까 잠시만 있어.”

“아니, 그냥 곁에 있는 편이 낫겠다.”

멀어지려는 그녀의 소맷자락을 잡은 그가 꺼져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를 내자 올리비아의 미간에 골이 깊이 파였다.


“뭐야, 정말 아픈 거였어?”

“그래.”

“낙인이?”

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무언은 긍정이라 하지 않았던가.

올리비아는 열을 내리는 방법이고 약이고 전부 치워버리고 크라이어가 바란대로 그의 곁에 남았다.


“황녀를 이런 바닥에 앉힐 수 있는 건 당신뿐일 거야.”

“그거 마음에 드는군.”

“내가 바닥에 앉는 게? 하긴 당신 바짓가랑이도 잡긴 했지. 하여간 볼꼴 못 볼꼴 다…….”

“아니.”

크라이어가 손을 들어 마른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오로지 ‘나’뿐이라는 부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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