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 가거라. (99/146)


#99. 가거라.
2022.08.11.


자신에게서 돌아서는 올리비아를 잡을 수가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는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저 뒷모습이 모든 것이 끝난, 자신이 마침내 노예의 굴레를 벗은 후에 그가 볼 미래인 것 같아서.

-달칵.

휘몰아치는 그의 내면과는 상관없이 올리비아는 계획대로 크라이어와 그레타를 남기고 사라졌다.

일부러 몸에 힘을 빼면서 그레타의 호위인 케슬란까지 자연스럽게 빼면서.

그렇게 넷 중 둘이 떠나고 둘만 남은 자리.

그녀의 빈자리에 남은 잔향을 시선으로 더듬던 크라이어는 곧 그의 뺨을 송곳처럼 찌르는 그레타의 시선에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끝을 모르는 역겨운 것이 있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제 낙인을 쓰다듬으며 노래하듯 속삭이던 더없이 저열한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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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대륙을 정화하고 남는 건 오로지 우리 둘뿐이에요.’

그 안에 제 아비인 마법사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놈이 저것의 손에 죽어 사라진 후였다.

크라이어는 그레타를 보면서도 증오와 체념, 절망과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그럴 가치가 없었으니까.

눈앞에 있는 저것은 어디까지나 고대신이 부리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 도구가 대단히 성가시고, 지독하게 집요하며, 끝을 모르게 탐욕스럽다 하더라도 결국 도구일 뿐.

글쎄, 마법사는 대체 고대신의 바람대로 대륙을 정화한 후 뭘 하려고 했던 걸까.

그렇게나 말이 많던 놈이었건만, 끝내 그것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죽어 나자빠졌지.

크라이어의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텅 빈 눈을 마주한 그레타는 허리 아래부터 느껴지는 전율에 잘게 몸을 떨며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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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크라이어. 크라이어 님. 저를 위해 이곳에 남다니. 대체 얼마만에 둘만의…….”

눈물짓는 그레타의 애절한 목소리는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지독하게 역겨운 집착이 되어 크라이어의 그림자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

크라이어와 올리비아, 그리고 그레타의 삼자대면 며칠 후.

황제가 올리비아를 불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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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냥제 맡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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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폐하.”

안부 인사는커녕 예고도 없는 갑작스러운 명령에도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올리비아는 담담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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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좀 앉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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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폐하.”

황제가 눈짓하기도 전에 그의 곁에 있던 가장 가까운 사용인인 세바스찬이 차를 내왔다.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차향을 뒤로 한 채 피곤한 눈가를 문지른 황제는 저와 제 아내를 정확히 반씩 닮은 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여느 때처럼 그저 축객령을 내리면 되었을 터였다.

황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그의 명령을 담담히 받았고, 아마도 훌륭하게 수행할 것이다.

그런데도 황제는 불현듯 그러고 싶었기에 올리비아를 잡았다.

그건 어쩌면 아비의 예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저 아비의 괜한 기우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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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느냐.”

황제는 어느새 제국의 가장 거대하고 단단한 기둥에서 딸 가진 아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근엄한 얼굴이 풀어지고, 늘 전날 새벽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일하는 아버지의 핏발 선 눈을 마주한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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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은요. 그런 거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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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분명히 있지 않느냐. 가슴을 열고 다 털어놓으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무슨 말이라도 하거라. 애비한테 털어놓으면 좀 가벼워질 수도 있으니.”

올리비아가 어릴 때 즐기던 초콜릿 범벅인 쇼콜라타탕을 은근히 밀어주는 아버지를 그녀는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회귀하는 동안 아버지의 최후를 본적은 단 한 번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첫 삶에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전장의 괴물을 막으려 몸소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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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통촉하여 주십시오. 폐하께서는 부디 옥체를 보증하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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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말을 거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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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황제는 잘 쓰지도 않는 검을 집어 들며 올리비아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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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를 데리고 가라. 어디로 갈 지는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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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폐하! 저도 남겠습니다! 저도, 저도! 저도 볼셰이크입니다! 제국을 위한 마지막 방파제란 말입니다!’

올리비아가 비명처럼 외쳤지만, 황제는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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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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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버둥 치는 올리비아를 당겨 안은 기사가 날듯이 그 자리를 떠났고, 그녀는 그제야 자신을 돌아보는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 황제는 웃고 있었다. 아비의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많은 말을 들은 것 같아서 올리비아는 발악을 멈추고 그의 마지막을 배웅해야만 했다.

올리비아는 제국의 방파제가 아니라 등대가 되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다음 생부터는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았다. 그녀를 강제로 내보내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살아남아 후를 도모하기 위해 황제가 벽이 되는 동안 제국의 꺼지지 않는 불이 되기 위해 움직였으니까.

비장하고 가슴 조이는 과거, 아니 오지 않은 미래를 떠올리던 올리비아는 곧바로 그것들을 털어냈다.

뭐, 그것도 다 실패해버렸으니 차라리 같이 벽이라도 됐으면 좋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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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애비를 보는 시선이 뭔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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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서 있을 걸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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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쇼콜라 타탕에 포크를 푹 꽂던 아버지가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아버지와 똑같이 쇼콜라 타탕에 포크를 푹 찍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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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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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없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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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누굴 닮아서 고집은.”

황궁이 박살 나서 가라앉는 순간까지 자리를 지키던 아버지 닮아서가 아닐까요.

그런 말을 지나치게 단 타탕과 함께 삼킨 올리비아의 이마 께에 거칠고 마른 손끝이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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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지 않느냐. 자세히 말할 필요 없으니 뭐라도 털어놓으라고.”

동그란 이마를 슬쩍 매만진 아버지의 말에 올리비아는 흐리게 웃었다.

아버지의 말대로 뭐라도 털어놓으면 편해질까. 털어놓으면.

회귀했어요. 그것도 여러 번. 제국이 단 한 명에게 패하고, 온 대륙이 불타올랐어요. 저는 죽고, 또 죽으면서 살기 위해 아득바득 이를 갈고 있어요.

모든 것을 말하면 아마도 아버지는 믿어 주리라.

하지만 황제는 믿지 않겠지.

비록 더없이 사랑하는 딸이라도 그 입에서 허무맹랑한 소리가 나온다면 아버지가 아닌 황제는 믿으면 안 된다.

무릇 이 드넓고 강대한 제국을 아우르는 이라면 그래야만 하니까.

만약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황제로서 제 말을 다 믿는다면 당장이라도 궁의를 부를 터였다.

황제께서 광증이 도지신 거 같으니 진료하라고.

그리고 볼셰이크의 피를 잇는 황제는 절대 그러지 않겠지.

그런데도 올리비아의 한마디면 아버지는 움직일 것이다.

도와주세요.

이제껏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담는 딸.

그 한마디면 아버지가 아닌 황제의 명으로 노르덴국은 물론이고 그레타도 당장 그녀 앞에 무릎 꿇고 그녀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끝나버리겠지.

제국의 힘이란, 황제의 한마디란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리 간단히 끝날 일이었다면 올리비아는 처음부터 크라이어가 아니라 황제에게 달려가 모든 것을 고했으리라.

그래. 그렇게 해보기도 했었지.

세 번째 삶이었다. 목을 부여잡고 눈을 뜨자마자 올리비아는 허겁지겁 달렸다.

새벽에 미친 사람처럼 궁을 가로지르는 그녀를 본 사용인들은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만 벌렸고, 기사들은 얇은 잠옷 차림의 황녀를 보지 않고 지키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그리고 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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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폐하…… 페…… 아니, 아버지.’

한밤중에 맨발로 뛰어온 올리비아의 피 맺힌 목소리에 황제는 주변의 모든 이를 물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기 무섭게 황제는 노르덴국에 은밀히 사람을 보냈고…….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만약 그때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면, 지금 그녀가 회귀한 채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그 삶에서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 처절하게 무너졌다.

처참하게 끝나버린 그 생을 되풀이할 생각은 전혀 없다.

어느새 올라온 핏물을 꿀꺽 삼킨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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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평화는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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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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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이야기라도 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런 ‘아무’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올리비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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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랑하기는.”

아버지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올리비아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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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다. 네가 반드시 해달라고 한 일인데 허투루 할 리가 없지 않느냐.”

그래.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와 고대신 쪽을 파헤치면서 황제에게는 따로 간곡히 말했다.

세계 평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대륙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세월이 흐른 지 어언 백여 년이 지난 현재.

대회의를 앞당기고, 첫눈에 반한 남자를 후궁처럼 불러들였다는 추문을 감수하면서까지 제국의 황녀가 ‘평화’에 이리도 목숨을 걸 이유가 없다.

하지만 황제는 기꺼이 세계 평화를 위해 대륙 전체를 조율했다.

당연히 황녀의 부탁만으로 움직인 건 아니었다.

대륙에서 유일무이하고 더없이 강력한 제국의 영화를 최우선으로 두더라도 전쟁이 아닌 평화라는 패를 집어 드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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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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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혹시 생각이 바뀌었느냐? 노르덴국의 새 외교관과 하인데르 후작이 몇 번 만났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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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소한 것도 신경 쓰고 계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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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않느냐.”

잠시 황제의 얼굴로 돌아온 아버지를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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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데르 후작하고는 잘 풀었어요. 노르덴국과도 뭐, 잘 지내야죠.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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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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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비단 노르덴국만이 아니라 대륙 어느 나라와도 ‘전쟁’을 할 필요는 없다. 아니,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전쟁으로 피가 흐르는 것이야말로 고대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던가.

그러니 제국 단위로 움직이는 건 오히려 방해가 될 뿐.

더해서 이 일과 관련 없는 이들이 끼어드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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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뭐, 그 정도는 애비가 잘할 수 있는 일이지. 가진 것도 없는 놈들이 투닥거리면서 내 눈치 보는 게 피곤하긴 하다만.”

타국간의 외교 분쟁을 투닥거림이라고 명명하는 아버지가 어느새 마지막 남은 쇼콜라 타탕 조각에 포크를 찔러넣는 동시에 올리비아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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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아니,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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