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그러니까……. 돌이요?2022.01.24.
그 은근한 물음에는 여러 가지 의도가 담겨 있었지만, 그가 올리비아에게 듣고 싶은 말은 정해져 있었다. 다름 아닌 대륙에서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지만,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제국이 전쟁을 일으킬 마음이 없다는 확답. 물론 그런 확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한 나라의 지도자, 그것도 저 제국의 꼭대기에 서서 온 대륙을 내려다보는 이가 어떤 주제 건 확답을 한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 그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예상을 박살 내며, 올리비아는 아주 거침없이 시원하게 답했으니까.
“네. 평화는 무엇보다 소중하니까요. 그러니 만약 대륙의 평화를 저해하는 무리가 있다면, 제가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직후 사위에 무덤 같은 정적이 내렸다. 당혹과 경악이 범벅된 이들은 입을 뻐끔거렸지만, 누구도 쉬이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으니까. 올리비아는 그런 그들을 향해 아주 확실하게 한 번 더 못 박았다.
“세계 평화를 지켜야겠죠.”
지난 네 번의 삶에서 전쟁 선포는 늘 노르덴 국왕이 했었다. 그런 그가 이미 죽어버렸기에 아마도 이번 생에서 대륙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선포는 왕세자가 하리라. 물론 전쟁 자체는 크라이어 혼자 했다. 노르덴 국이 제국이 아닌 다른 나라들과 손을 잡긴 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크라이어에 비하면 미미했을 뿐. 하지만 전쟁을 일으키기 전이라면 말이 다르지. 지난밤, 아니 희끄무레하게 동이 터오는 새벽. 그레타의 이야기에 입맛이 뚝 떨어졌지만, 쥐고 있던 빵은 다 먹은 생존 기술을 발휘한 올리비아가 말을 꺼냈다.
‘내일 국장에서 분명 누군가는 대회의 이야기를 꺼낼 거야. 내게 확인받고 싶을 테니까.’
‘대회의라면, 평화?’
‘그래. 그들에게는 제국이 전쟁을 시작하지 않는다는 건 꽤, 아니 대단히 큰일이니까. 그리고 나는 경고할 거고.’
크라이어가 그녀의 입가에 있던 빵 부스러기를 익숙한 듯 훔치며 물었다.
‘왕세자나 왕이나 꼭두각시일 뿐인데, 그들에게 경고해서 무엇 하려고?’
그에 올리비아는 더없이 황녀답게 미소했다.
‘꼭두각시에게 경고하는 게 아니야. 꼭두각시의 말에 뭐 얻어먹을 게 있나 몰려드는 하이에나들에게 경고하는 거지.’
그래. 노르덴 국에서 시작한 전쟁은 무려 제국을 상대로 하는 것이었다. 전쟁 말미에는 온 대륙이 전쟁의 겁화에 불타오르긴 했지만, 어쨌건 시작은 제국을 상대로 한 선전 포고였지. 그런 전쟁을 소국에 불과한 노르덴 국 홀로 일으킬 수 있었을까. 결국 그 전쟁은 제국이 무너진 후 얻을 이득을 위해 노르덴 국의 손을 잡은 나라로 이루어진 연합이 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니 잘 알아듣게, 잊지 못하도록 제대로 경고를 해야겠지. 올리비아는 홀의 반대편, 그녀와 가장 먼 곳에 서 있는 노르덴 국의 왕세자를 흘긋 바라본 후 전체 홀을 서늘한 눈으로 훑었다. 시리도록 푸르고 선명한 그녀의 시선에 몇몇은 마른침을 삼켰으며, 몇몇은 눈을 피하기도 했다. 이윽고 숨소리조차 죽어버린 고요 속에서 올리비아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지켜볼 겁니다. 볼셰이크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 국장이 진행되며 엄숙하고 웅장한 음악이 홀 전체에 울려 퍼질 무렵. 아이작은 왕궁 심처의 어느 그림자 속에서 대단히 불손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밥값을 할 길이 요원했으니까.
‘궁에 들어간 돌이 어디에 쓰이는지 알아야 해.’
그에게 정보수집을 시킨 황녀의 요구는 저 한 마디가 끝이었다. 자연스럽게 이어질 뒷말을 기다리던 아이작은 적당한 시간이 지나도 입을 열지 않는 황녀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돌이요?’
‘그래. 돌. 일단 그것만 알아 오면 돼.’
거기까지 떠올린 아이작은 혀끝까지 밀려 나온 소리를 꿀꺽 삼켰다. 일단이라니, 일단으로 치부될 일이냐고 이거. 아무리 자신이 정보수집과 교란에 특화된 아켄델이라 해도, 뭐가 있어야 능력 발휘를 할 수 있지 않겠나. 물과 공기만 던져주고 빵을 만들어 오라는 주문과 다름없는 올리비아의 명령에 아이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제국에 붙어 있게 해준 은혜가 있지 않나. 심지어 이런 일을 위해 자신을 거둔 상대를 처음부터 실망시킬 수는 없는 노릇. 아이작은 올리비아에게 묻고 또 물어서 알아낸 것을 되짚었다.
“꽤 커다란 돌이라고 했고, 왕궁 어딘가로 들어간다고 했으니……. 결국 누군가 그 돌을 옮기고 있다는 말이잖아.”
물론 마법사가 그는 전혀 알지 못하는 마법을 부려 돌을 어떻게 한다면 답이 없는 상황이지만. 아이작은 아예 그림자 속에 털썩 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법사는 또 무슨 일이야.”
어쩐지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라고 하더니. 대체 정보수집을 보내면서 누가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마법사에 대해서 듣기 전에는 ‘밥값’을 들먹이지만, 어쨌건 과거에 인연을 홀로 독하게 이어온 그에게 살길을 열어주고자 하는 하해와 같은 마음을 지닌 황녀 전하인 줄 알았지.
“제가 이어받은 아켄델의 모든 것을 뒤져봐도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의 정보수집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당연히 닿지 않을 올리비아를 향한 한탄을 내뱉은 아이작은 이내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본국으로 돌아가 삶아진 사냥개 신세가 되지 않은 것도 결국 그가 어떻게든 움직여 살길을 찾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게 제국의 황궁보다 훨씬 느슨한 노르덴 국의 왕궁을 제집 안마당처럼 이리저리 들쑤시던 아이작이 커다란 나무 아래 주저앉았다.
“이건 틀렸어. 이대로 계속 돌아다니는 건 아무 의미 없…….”
혼잣말을 흘리던 아이작이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이고, 삭신이야. 어째 국장날까지 이렇게 부려 먹나. 사람 잡네, 사람 잡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을 짊어진 이들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 자리에 나타났다. 궁하면 통한다고, 볼셰이크와 연이 닿은 조상님께서 말씀하셨던가. 어느새 올라간 건지, 나무 위에 몸을 숨긴 아이작은 인부들을 자세히 살폈다.
“그만큼 비싼 값을 쳐주잖아. 잔소리 말고 얼른 움직여. 이렇게 서 있는다고 돌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말을 하다 말고 목소리를 낮추는 인부에게 또 다른 인부가 투덜거렸다.
“알지 알아. 이 일은 비밀리에 한시라도 빨리 끝내야 한다고.”
돌을 짊어진 인부는 짧은 휴식을 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아이작이 둘의 그림자에 스며들었다. 왕궁에서 비밀리에 옮겨지는 돌이라니. 게다가 비밀?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들어도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다니.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발에 불이 나게 뛰어다닌 제 노력을 폄하하는 것 같아 별로였지만, 우연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딱히 맞는 표현이 없기도 했다. 코앞에서 흔들리는 네모반듯한 돌을 보던 아이작은 여우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아무래도 밥값은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
“아무쪼록 편안한 귀환이 되시길 바랍니다.”
고개를 숙이는 노르덴 국의 왕세자를 향해 마주 목례한 올리비아는 곧 마차에 올랐다. 국장이 끝나자마자 돌아가는 건 대단히 무례한 일이었기에, 귀환길에 오른 건 그녀뿐이었다. 하나, 누구도 그녀의 무례를 탓하거나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제국의 황녀가 국장 하루 전날 도착해 왕세자에게 직접 위로를 건넨 것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니까. 빠르게 질주하는 마차에서 올리비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한숨과 함께 토해냈다.
“아이작이 뭐라도 알아 오기를 바라야겠네.”
직접 노르덴 국에 가기로 결정했을 당시에는 호랑이 굴에 호랑이를 잡으러 간다고 생각했었다. 왕궁을 직접 들쑤시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왕세자를 상대하며 아주 작은 정보라도 얻어내려 했으니까. 하지만…….
“미친 것의 눈에서 벗어나는 게 최우선이지.”
마법사를 ‘정화’시킨 마법사가 자신을 거슬린다고 했으니 최대한 눈에 띄지 않아야만 했다. 그렇다고 납작 엎드려, 두려움에 벌벌 떨지도 않을 테지만. 미친 것을 무서워서 피하는 건 피하는 거고, 살아남기 위해 할 일은 해야 하지 않겠나. 눈을 감은 올리비아는 기도처럼 중얼거렸다.
“크라이어는 분명 제단 이야기가 나왔다고 했었지. 그걸 확인할 수 있다면 그레타의 다음 행보를 예측할 수 있을지도……. 그러니 믿어 볼게요, 조상님. 리아나프 아켄델의 후대를.”
*** 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노르덴 국으로 향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고 빨랐다. 뭐, 어디론가 떠날 때보다 집으로 돌아갈 때가 상대적으로 더 빠르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으리라.
“폐하를 뵙습니다.”
노르덴 국에서 돌아온 직후 곧바로 황제를 찾아, 딱히 영양가 없는 보고를 끝낸 올리비아는 곧 그녀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으으. 으으으.”
푹신한 소파에 기듯이 올라앉아 늘어진 올리비아는 앓는 소리를 냈다. 호랑이 굴에서 하루 머물렀을 뿐이건만, 이렇게나 피곤할 일인가. 하긴, 잘 갈린 바늘처럼 신경이 바짝 곤두선 채 며칠을 보냈으니 머리가 과부화 되는 것도 당연하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하게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올리비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지난 네 번의 생을 겪으면서 몸으로 체득한 사실이 있지 않은가.
“움직이는 편이 덜 아파.”
힘들다고 축 늘어져 있으면 통증만 심해질 뿐. 차라리 간단한 산책이라도 하면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편이 훨씬 낫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몇 번째 삶이었던가.
“같이 나갈까? 크라……. 아.”
늘 그가 있던 곳에 위치한 텅 빈 의자를 본 올리비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젠 숫제 칼로 쑤시듯 머리가 아팠으니까. 볼셰이크에 대해 조금 더 뒤져보겠다며, 오늘 밤은 아예 책에 파묻히겠다고.
“그 조사에 동참이나 할까.”
지금쯤 크라이어가 책을 넘기고 있을 곳에 시선을 주던 올리비아는 이내 크게 숨을 들이켰다.
“바깥 공기나 마셔야지.”
그렇게 홀로 휘적휘적 방을 나서서 복도를 지나던 그녀가 우뚝 멈춰 섰다. 늦은 밤에 홀로 돌아다니면 필시 귀찮은 일이 생기겠지. 올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기울이다 이내 간단히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네 번의 삶을 겪으면서 황궁을 자기 손금보다 더 잘 알게 된 그녀는 손쉽게 사용인들의 옷을 보관하는 방에 들어섰다.
“잠깐 빌릴게.”
사용인의 옷 중 손에 잡히는 대로 하나 집어 든 그녀는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도록 꼼꼼하게 틀어 올려 모자 속에 감췄다. 아무리 사용인 옷을 갖춰 입었다 해도, 황궁에서 제 머리 색을 알아보지 못할 이는 없을 테니까. 그러다 멈칫했다.
“어라? 리본 색이 좀 다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