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눈을 뗄 수가 없다니까.2022.01.27.
그녀가 골라 입은 사용인의 옷만 앞치마를 고정하는 리본 끝의 색이 다른 것들과 달랐지만, 이내 관심을 끊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어차피 잠깐 산책길에만 입고 돌려놓을 옷이 아닌가. 게다가 리본 전체도 아니고 끝에서 팔랑이는 부분의 색이 좀 다른 것 정도야, 구태여 궁의 기강이니 뭐니 들먹일 필요도 없으리라. 이윽고 가벼운 걸음으로 궁을 나선 올리비아는 세 개의 갈림길에서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 보자. 이쪽으로 가면 장미 정원이고, 저쪽은 분수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길을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인들이 주로 드나드는 작은 오솔길.
“오늘은 신선하게 다른 곳으로 가볼까. 옷도 이렇게 입었고.”
사용인의 옷을 입고 장미정원이나 분수대 쪽에서 얼쩡거리다가 누군가 마주치기라도 하면 귀찮아지겠지. 그쪽은 황족이나 허가받은 이들만 오갈 수 있는 곳이니까. 경치를 구경하러 나온 것도 아니고 머리를 식히러 나온 길이니 새로운 곳도 나쁘지 않으리라. -사박사박. 가끔 울리는 벌레소리와 뺨을 간질이는 바람을 제외하고는 고요한 사위에 올리비아의 발소리만 울렸다. 한동안 걸음을 옮기던 올리비아는 별 생각 없이 멈춰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있으면 보름이네.”
달의 모양을 가늠하는 그녀의 허리춤에서 리본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그녀의 뒤쪽에 위치한 수풀 속. 올리비아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누군가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실핏줄이 터진 듯 벌겋게 물든 흰자위, 이를 너무 꽉 깨물어 턱에 진 주름, 그리고 서서히 벌어지는 입까지.
“왔……구나.”
팔랑이는 리본 끝의 색을 확인한 여자의 얼굴이 한순간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수풀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 여자의 손에서 달빛을 받은 과도가 둔중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보름이면 회의가 열릴 텐데, 이맘때쯤에 무슨 일이 있…….”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홀로 생각에 빠져 있던 올리비아는 뒤쪽에서 들리는 새된 목소리에 황급히 뒤를 돌았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 리본까지 가지고 있으면서어어어!”
분노와 증오가 드글 거리는 고함과 함께 올리비아의 눈동자에 번뜩이는 검날이 들어왔다. 그녀는 헉, 소리를 낼 틈도 없이 몸을 앞으로 던졌다. 귀족도 아니고 황족이 땅을 구르다니. 위엄이며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살기 위해서라면 땅을 만 번이라도 구를 수 있는 올리비아는 열심히 굴렀다.
“죽어! 죽어버려!”
그렇게 눈먼 과도를 피해 이리저리 구르던 올리비아의 등 뒤를 딱딱한 나무가 막아섰다.
“으앗!”
-카가가각! 올리비아의 머리 위쪽, 그녀의 몸통보다 굵은 나무에 과도가 튕기는 소리가 크게도 울렸다. 용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행운으로 공격을 연달아 피한 올리비아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왜 안 가던 길로 들어서서!”
평소 가던 산책길이 뭐가 어떻다고. 들키면 그냥 황녀라고 밝히면 될 걸! 신선이고 나발이고 새로운 곳으로 왔다가 이게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하지만 올리비아는 넋을 놓거나, 떠나버린 어이를 잡는 대신 나무에 박힌 과도를 뽑으려는 여자의 배를 발로 뻥 찼다. 힘이 모자랐는지 뒤로 물러나지 않고 휘청거리기만 하는 여자에게서 간신히 빠져나온 올리비아는 순식간에 여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암살자는 아니다. 그런 결론이 난 순간.
“정신 차려!”
크게 외쳤지만, 이미 눈이 완전히 뒤집어진 여자의 귀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위압감으로 저 여자를 제압할 수 있다면.
“그게 되겠냐! 이 머저리 같은! 정신 차려, 이 미친!”
황녀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험악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지만, 눈이 완전히 돌아간 상대의 귀에는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과도가 얼굴로 짓쳐오는 순간.
“이런 젠……!”
팔을 교차하며 얼굴부터 찔러 들어오는 과도를 막으려던 올리비아의 귓가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입이 험하단 말이지.”
그와 동시에 뭔가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과도 끝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도 눈을 감지 않았던 올리비아의 시야로 익숙한 등이 들어왔다. 더없이 넓고,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한. 크라이어. 그는 가볍게 검을 털었고, 올리비아는 그의 등에서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물었다.
“죽……였어?”
“그래.”
지독하게 덤덤하고 간결한 답이 돌아왔다.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눈앞에 있는 꼴을 보면 당연히 죽었겠지. 핏물이 구두 끝을 적시는 것을 내려다보던 올리비아는 불현듯 떠올렸다.
‘일단 손을 쓰면 피를 봐야 한다.’
과거의 어느 날 크라이어는 그리 말했었지. 지난번 무투 대회에서는 진검을 뽑지도 않았으니 피를 볼 일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그가 검을 털어낸 궤적에 붉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크라이어가 피를 꼭 봐야만 하는 이유는 고대신의 빌어먹을 고약한 취향 때문이었……. 올리비아가 생각을 끝맺기도 전에 마치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크라이어가 툭 내뱉었다.
“너를 죽이려 했으니까.”
전혀,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어?”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피하느라 엉망이 된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 귀 뒤로 넘겨준 크라이어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순간이라도 눈을 뗄 수가 없다니까.”
뺨의 솜털을 스치는 거친 손끝, 미묘한 온기, 일렁이는 검붉은 눈동자까지. 그를 마주한 올리비아의 속눈썹이 풍랑에 정신없이 흔들리는 나비의 날개처럼 빠르게 파닥거렸다. 속이 거북했다. 아니, 속이 간지러웠다. 깃털이라도 잔뜩 삼킨 것처럼 부푼 가슴께가 간질거려서. 올리비아는 참지 못하고 제 머리카락 끝을 잡고 빙글거리는 크라이어의 손을 쳐냈다. -짝! 예상했던 것보다 지나치게 큰 소리에 제풀에 놀란 올리비아는 토끼 눈을 떴지만, 크라이어는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그의 반응에 올리비아는 쿵쿵거리는 심장 고동을 덮으려 짐짓 더 크게 외쳤다.
“내, 내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도 아니…… 읍, 으으읍! 읍!”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면 어쩌자는 거냐.”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아니 그녀의 얼굴 반쯤을 막은 크라이어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차림으로 나왔다는 건 사용인들을 줄줄이 끌고 나오기 귀찮아서 아닌가.”
물론 그의 말이 맞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거나 말거나, 아예 제 얼굴 전체에서 느껴지는 그의 온기와 코끝으로 훅 밀려오는 서늘한 바람…… 냄새. 올리비아는 귀 끝까지 빨갛게 물들어 금방이라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거 뭔데! 이게 뭐야!
“으, 으읍, 으으읍!”
방금 전처럼 그의 손을 쳐내려 버둥거리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라이어는 아예 입을 가리지 않은 반대쪽 팔로 올리비아의 허리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조용히 좀 해. 황녀가 목청껏 소리친 덕분에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으니까. 귀찮아질 것 같으니.”
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간다.”
짧은 경고인지 통보인지 모를 말만을 남긴 채 크라이어는 다리에 힘을 줬다. -쩌적. 사람이 밟은 것 정도로는 절대 갈라져서는 안 될 돌바닥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크라이어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귀를 찢어발길 듯 사나운 바람 소리와 함께 올리비아는 눈앞이 다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에게 안겨 이런 식으로 이동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런데도 숨이 막히도록 밀려오는 그의 향기에 시야가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달칵.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에 올리비아의 집무실에 도달한 크라이어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올리비아를 조심스럽게 내려준 그가 창 너머를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일의 처리는 내일 하는 게 낫겠지. 익……숙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까.”
죽음을 논하는 크라이어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올리비아의 말에 의하면 무려 네 번이나 그녀를 죽인 자는 다름 아닌 자신이 아닌가.
“아무튼 오늘은 일단 쉬는 것이……. 황녀?”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올리비아를 내려다보던 크라이어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곳에 오기 직전, 황녀는 왜인지 모르지만 제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지 않았던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던 크라이어가 멈칫했다. 올리비아 앞에서 피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혹시 그것 때문에 다시 자신을 두려워하는 건가? 그건 아닌가. 몸을 떨거나 식은땀을 흘리는 기색은 없으니. 그렇다면 설마……. 다친 건가? 아니, 다쳤을 리가 없다. 잘린 풀조차 그녀를 상처입힐 수 없도록 검을 휘둘렀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황녀?”
크라이어가 올리비아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올리비아는 제 눈을 한 손으로 가린 채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좀 떨어져.”
그에 크라이어의 눈이 잠깐 커지다 이내 미간이 확 좁아졌다.
“무서운가.”
“뭐?”
“내가 아직도 두려운…….”
크라이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올리비아가 밀어내던 그의 가슴팍을 콱 말아쥐었다.
“무섭긴 뭐가 무서워! 그게 아니라 너무 가깝다고!”
거의 멱살을 잡듯 그의 상의를 움켜쥔 올리비아는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됐어. 아무것도 아냐.”
밖에서 집무실로 돌아오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올리비아는 혼란과 혼돈의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왔다. 그래. 아무것도 아닐 거다. 그를 앞에 두고 심장이 미치도록 두근거렸던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테니까. 사람이란 본디 위험한 상황에 있을 때 마치 사랑에 빠진 듯 심장이 빠르고 크게 뛰는 법. 심지어 죽을 뻔했으니 보통 위험한 상황이 아니었지 않나. 당연히 심장이 목구멍을 뚫고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 그게 아니잖아. 올리비아는 눈치를 국에 말아 먹은 순진한 아이가 아니다. 그때 제 심장의 두근거림은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려고? 저를 네 번이나 죽인 남자. 그런 남자에게 설렘을 느꼈다고 그 뒤에 뭔가 이어질 수가 있을까. 올리비아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설렘을 느끼건 심장이 두근거리건, 위에서 아래로 추락하건. 살아남는 게 먼저다. 사랑이고 나발이고 일단 숨이 붙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회귀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더 남았는지도 알지 못하고…….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생존을 최우선으로. 억지로 눌러둔 감정이 가슴을 두드리는 통에 심장이 따끔거렸지만, 참을만했다. 깊이 숨을 들이켠 올리비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하아,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산책 한번 잘못했다가 죽을 뻔했네.”
평소처럼 돌아온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라이어가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