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당……신은.2021.12.16.
손톱 달이 뜬 밤. 황궁의 외곽, 지독하게 깊고 어두운 심연과도 같은 지하 감옥. 몇십 년 동안 열리지 않았던 그 지하 감옥을 들여다보는 이가 있었다. 제국에서 멀고 먼, 노르덴 국의 왕궁의 중앙에서.
“아직 숨이 붙어 있네.”
그레타는 죽은 듯 누워 있는 남자를 더듬으며 주변을 살폈지만, 들여다보는 것에도 한계가 있기에 사위는 뿌옇게 뭉개지기만 했다. 이윽고 이마로 핏줄이 불룩 솟자 그레타는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고대신의 가호로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마법을 쓰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목에서 올라온 피를 삼키는 그레타는 무표정했다.
“저놈 말고는 아무도 없네.”
다행히도 의식은 실패했지만, 저놈은 죽어야만 한다. 정확히 말하면 정화되어야만 했다. 죽기야 당연히 죽어 나자빠지겠지. 제국의 지하 감옥에 있는 놈의 말로는 지나가던 원숭이라도 그릴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냥 죽으면 안 돼.”
그레타는 지나치게 ‘마법’을 쓴 탓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눌렀다. 저 멍청한 놈이 제 몸에도 고대신의 문양을 새겨 넣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일이 아주 복잡해질 뻔했어. 실핏줄이 터져 벌겋게 물든 눈을 한 채 그녀는 입술을 비집고 나온 핏방울을 핥았다.
“태워버려야지.”
고대신의 흔적이 어설프게 남아 있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저 먼 제국의 지하 감옥에 있는 남자를 깨끗하게 정화시키려면 제물이 필요할 터. 하나가 아닌 둘. 그레타가 설렁줄을 당기자, 사용인이 아닌 왕세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세자의 곁으로 다가선 그레타는 눈을 한 번도 깜박이지 않는 그의 밀랍같은 뺨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사람이 하나 필요해요.”
“사람이 하나 필요하다.”
왕세자는 그녀의 말을 똑같이 따라하며 설렁줄을 당겼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들의 앞에 벌벌 떨며 고개를 바닥에 박고 있는 여인이 자리했다. 왕궁의 물건을 도둑질한 이였지만, 그레타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만약 눈앞의 여인이 무고한 이였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았으리라. 여인이건, 청년이건 혹은 노인이나 아이였다 하더라도 피를 볼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상관없었으니까.
“기뻐하렴. 너를 정화 시켜 줄 테니까.”
여인의 턱을 쥐고 올린 그레타는 망설이거나 시간을 끌지 않았다. 이윽고 여인의 몸이 불타오르자 그곳과 멀고 먼, 제국의 황궁. -핏, 피핏. 불꽃이 튀는 소리와 함께 노르덴 국에서 온 남자, 그레타의 꼭두각시도 동시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기괴하게도 불이 일었지만, 그 불은 정확히 꼭두각시만을 태웠을 뿐. 그가 누워 있던 침대에는 그을린 흔적도 없었다. 여인과 남자가 불타오르는 것을 지켜보던 그레타의 입술이 벌어졌다. 높고 낮은,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말인지 노래인지 모를 것을 속살거리던 그녀의 눈이 뱀의 그것처럼 번뜩이는 순간. -화르륵. 지하 감옥에서 죽은 듯 늘어져 있던 남자의 쇄골, 고대신의 문양이 자리한 곳에 불이 붙었다.
“끄, 끄아아악! 끄아아!”
남자는 불길 속에서 비명을 질러댔고, 당연한 수순으로 지하 감옥을 지키던 이들이 몰려와 그 광경을 보았다.
“이게 뭐야! 아니, 물! 물을 가져와!”
“모래라도 상관없으니까!”
그들의 다급한 처리에도 타오르는 불 속에서 몸부림치던 남자의 눈에서는 빛이 사라졌다. 남자를 모조리 살라 먹은 불이 꺼지고 매캐한 연기만 흩날리는 가운데.
“왜…… 이 주변은 탄 자국 하나 없이 멀쩡…….”
헛숨과 함께 흩어지는 이의 말을 뒤로한 채, 고대신을 섬겼던 남자는 정화되어 시커먼 시체만 남겨졌다.
*** 제국 수도의 외곽에서 일어났던 연쇄 실종 및 살인 사건의 범인과 노르덴 국에서 온 손님이 새카맣게 타오른 밤 이후, 며칠이 흘렀다. 하늘이 끝이 없어 보일 만큼 맑고 높은 날. 타국의 기사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있는 황녀 궁의 한쪽. -채챙!
“이번 무투 대회를 위해 본국에서 특별히 보내준 검일세.”
“허, 좋군.”
“좋다 마다. 이 검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쪽에서는 화려한 장식과, 날이 바짝 선 새로운 검을 뽐내고 있었고. -캉! 카캉!
“여어, 전보다 실력이 조금 는 것 같은데?”
“자네에게 그런 소릴 듣다니 오히려 실력이 녹슨 것 아닌가.”
“헛소리!”
다른 한쪽에서는 진짜 검을 맞대며 대련이 한창이었다. 그런 무리들이 저희끼리 이런저런 대화며 검을 주고받는 또 다른 한편.
“무투 대회라.”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타국의 기사들 무리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커다란 나무 위쪽. 빽빽한 나뭇잎이 절묘하게 외부 시선을 가리는 자리에 앉은 남자는 다리를 건들거리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들 헛물은 기가 막히게도 켜네.”
제국에서 열리는 무투 대회다. 그야말로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이들이 우글우글 몰려들 터. 고작 기사 흉내나 내는 놈이나, 기사 흉내도 내지 못하는 놈들이 무얼 하겠다고.
“쯧.”
가볍게 혀를 찬 남자는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저들은 그와 다른 처지니 저렇게 안일하고 생각 없이 행동할 수 있겠지. 만약 저들이 황녀의 머리카락 끝도 보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나름의 생을 살아가리라. 하지만 자신은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작? 아이작. 어디 있나?”
여우 눈을 접어 웃은 그는 곧 그를 부르는 피로한 낯의 기사를 발견하고 기척도 없이 나무에서 내려왔다.
“어이, 찾았나?”
피로한 낯의 기사는 소리나 기척도 없이 불쑥 나타난 아이작을 보고 움찔했지만, 그런 것도 잠시. 한낮의 유령 같은 그의 행태가 익숙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봐, 어디에 갔었나.”
“아, 잠깐 저쪽에.”
대충 모여 있는 무리 중에 한곳을 가리키자 피로한 낯의 기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들 무투 대회로 떠들썩하군.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찾았네. 아이작 자넨 어떤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아이작은 구태여 되묻지 않았다. 그리고 말을 꺼냈던 피로한 낯의 기사 역시 별다른 답을 바란 건 아니었던 듯, 한탄 섞인 말을 이었다.
“다들 저리 신나하니 무슨 축제 같지만, 아니지 않나. 무투 대회라니. 재수 없으면 대회 중에 팔다리 하나둘 분질러질 수도 있고.”
그는 별 볼 일 없는 자신의 검을 툭 두드렸다.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아무 희망이 없기는 하지만, 저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군. 세상은 정말로 불공평하기 짝이 없어.”
그렇게 한탄에 한탄만 하던 기사는 그제야 아이작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는지, 그에게 동의라도 구하듯 은근한 말을 건넸다.
“자네나 나나, 이대로 돌아가면 끝 아닌가. 애초에 버림패로 이곳에 보내졌으니까.”
깊은 한숨과 함께 나온 말에 아이작은 이번에도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 사실이긴 하지만, 지독히 우울하고 미래도 없는 징징거림에 동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기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코로 흘려버리던 아이작은 별안간 귀를 움찔거리더니 이내 눈을 빛냈다. 그리고 잠시 후.
“아이작? 아이작? 아니, 또 이렇게…….”
뒤에 홀로 남은 이는 허탈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허 참, 또 이러는군.”
아이작과 마주 보고 이야기하다가도 잠깐 한눈을 팔면 감쪽같이 그가 사라지곤 했다. 처음에는 황당하고, 기분도 나빴다. 멀쩡히 같이 대화하던 이가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그러려니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심지어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근처에서 찾을 수도 없었으니……. 하지만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별로 없었고, 그 중 한 명인 아이작과 척을 지는 것도 싫어 이제는 그러려니 할 뿐. 그는 무투 대회에 들떠 이리저리 화려한 검을 뽐내는 기사들을 바라보다 곧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 그 무렵, 아이작은 황녀 궁의 복도에 내린 그림자를 타고 걷는 중이었다. 그는 주변을 기민하게 살피며 어제와 달라진 점을 살폈다.
“……으로 돌아갔다고…….”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
사용인들이 흘리는 한 두 마디에 노르덴 국에서 온 갑작스러운 손님이 이미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아챈 아이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한창 국장 준비로 정신없을 노르덴 국에서 갑작스럽게 제국으로 사람을 보낸 것도 의아했건만, 이렇게 또 난데없이 돌아갔다? 심지어 사용인들조차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무언가를 피해 도망치는 것이 아닌 이상 그런 식으로 돌아갈 리는 없었을 텐데.
“흐음.”
그러고 보니 며칠 전 궁이 좀 시끄럽더니. 또 그놈의 ‘밤나들이’인가 했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군.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황궁을 빠져나갔다가 들어온 밤. 느닷없는 폭우와 함께 황녀의 궁으로 세 사람이 들어왔다. 아니, 한 놈은 끌려들어 왔지. 먼발치에서 어렴풋이 본 거라 확실치 않지만……. 아이작은 턱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본능이 이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외치고 있었으니까. 노르덴 국의 손님. 폭우가 쏟아지던 밤의 세 사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있다면, 돌파구가 될 수도 있겠는데.”
그는 이대로 본국으로 돌아가 사냥 뒤에 삶아질 사냥개가 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니 피로한 낯의 기사처럼 저를 가여운 동지로 여기며 넋두리나 늘어놓을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움직여야겠지. 그처럼 외부에서 온 사람이 새로운 곳에 정착하려면 세 가지 조건 중 하나, 혹은 여러 개를 만족시키면 된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사거나, 누군가의 두려움을 파먹거나,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거나. 이곳이 그저 여행 가다 지나치는 마을이 아니라 제국의 황궁이라는 점에서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충족시키기 매우 힘들겠지만, 어쨌든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긴 매한가지. 게다가 그 역시 그저 지나가는 여행자가 아니니.
“뭐 하다가 정 안 되면, 밤중에 몰래 찾아가서 볼셰이크 역사에 꽤 오랜 기간 꽤 비중 있는 가문의 핏줄이라고 있는 힘껏 빌어 볼…….”
영문을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아이작이 불현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림자 속에 있던 그는 그림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림자 역시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대낮인데도 그곳에만 어둠이 내린 듯 어스름한 곳에서 고요히 그를 응시하는 검붉은 눈동자.
“당……신은.”
소문의 ‘그’ 기사 이리라. 노르덴 국의 이름 없는 기사였지만, 황녀의 눈에 들어 제국에 자리를 잡아 버린 남자. 소문과 뒷이야기만 무성한 그 기사와 직접 마주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이작은 헛웃음을 삼켜야만 했다. 이름이 없어? ‘아직’ 이름이 없는 거겠지. 황녀 전하께서 눈앞의 남자에게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저 조각 같은 얼굴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