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잠깐이라도.2021.12.20.
아이작은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여우 눈을 접어 웃었다. 저 밖에서 무투 대회니 뭐니 떠들어대는 기사 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이가 아닌가. 가문 내력인지, 아이작은 생존 본능에 누구보다 충실했다. 그리고 그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저 남자를 잡으라고. 그는 이내 여우 눈을 접어 웃으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작, 아이작 아켄델입니다.”
하지만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크라이어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그건 무례하기 그지없는 반응이었다. 먼저 인사를 건넨 아이작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였으니까. 하지만 아이작은 모멸감에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뜬금없는 말을 꺼냈을 뿐.
“황녀 전하께서 대대적으로 무투 대회를 여시는 이유를 알겠군요.”
그는 크라이어에게서 천천히 한 발 뒤로 물러나며 덧붙였다.
“그날 당신의 이름이 전 제국에 울릴 테니까.”
크라이어를 알고 있는 올리비아 외에는 지나가던 원숭이가 들어도 어이가 없을 말이리라. 얼굴 하나 믿는 별 볼 일 없는 왕국의 기사 놈이 무투 대회에서 이름을 떨치다니. 크라이어는 여우 눈을 접어 웃고 있는 아이작을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어떻게 봐도 비꼬거나 빈정거리려는 의도를 찾을 수 없었다. 뭐, 어딘지도 모르면서 씩씩대는 멧돼지처럼 무작정 그를 향해 적개심을 드러내던 놈들보다는 제대로 눈이 달린 건가. 딱 그 정도의 감상을 마친 크라이어는 아이작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쳤다.
“밤놀이에 어울리지 마라.”
나른하게 가라앉은 속삭임이 귓바퀴를 타고 흘러들자, 일시에 아이작의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깨달았다. 저 남자야말로 황녀를 찾으러 나섰던 밤놀이 손님들을 처리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지금도 자신이 실없이 흘렸던 ‘밤중에 몰래 찾아 간다’는 말을 듣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리라. 아이작은 멀어지는 크라이어의 그림자가 아니라, 그의 흔들림 없는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아이작에게 경고를 날린 크라이어는 단 몇 걸음만에 그의 이름과 존재를 잊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한 사람만이 꽉 차있었으니까. 소리나 기척 없이 황녀의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선 그의 눈에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광경이 들어왔다. -사각, 사각사각. 산맥을 이루고 있는 서류와 그 서류 너머에서 들려오는 펜이 종이를 누비는 소리와 부드러운 잉크 냄새. 그는 능숙하게 기밀 서류들을 헤치고 끊임없이 펜을 움직이는 작은 머리통을 찾아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펜을 따라 흔들리는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 끝이 불그스름했다. 아마도 뺨이며 눈가도 똑같이 물들어 있으리라. 크라이어는 올리비아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쉬어야 낫는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테고. 일부러 병을 키우는 건가.”
머리 바로 위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올리비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언…… 콜록, 콜록콜록.”
입을 열기 무섭게 바짝 마른 목이 갈라지며 격한 기침이 터져 나왔고, 크라이어는 격렬하게 흔들리는 둥근 어깨를 지긋이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언제 왔냐고 묻는 거라면, 방금. 그보다.”
뒷말을 잇지 않았지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크, 크흠. 일부러 병을 키우는 바보 같은 짓은 안 해. 체력이 국력이라는 조상님들 말씀도 있었고.”
목을 가다듬은 올리비아는 서류에 마지막 방점을 찍으며 덧붙였다.
“하나만 더 보고 좀 쉴 거야.”
“며칠째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만.”
“그야 며칠째 하나만 더 봐야 하는 서류가 밀려 있으니…… 으앗!”
그녀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높아진 시야에 의자 팔걸이를 꽉 잡았다. 크라이어가 불쑥불쑥 그녀를 한팔로 안아 올려 시야가 높아지는 것 자체는 익숙했지만.
“지금 쉬어라.”
“이 의자,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기나 해……?”
의자째 그녀를 들어 올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다른 것보다 무겁긴 하군.”
올리비아와 의자를 한번에 들고 책상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내려둔 크라이어의 답에 올리비아는 기가 막혔다.
“집무실 의자는 암살 방어도 겸하는 목적으로 웬만한 장정들 대여섯이 달라 붙어도 움직이지 않도록 만들어진다고.”
“웬만한 장정들이 힘이 없다고 치지.”
“그게 그렇게 가볍게 넘어갈! 아니…… 당신이라면 가볍게 넘어갈 만하지.”
확실히 열이 올라 앞뒤 분간이 안 되긴 하는 모양이었다. 칼질 한방으로 제국의 성벽을 무너뜨린 저 크라이어가 무거운 의자 하나에 쩔쩔맬 리가 없겠지.
“의자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세 개씩 쌓아 올려서 양팔에 올려놓고 돌릴 수도 있…….”
의식의 흐름대로 조잘거리던 핏기 없는 입술을 커다란 손이 막았다. 그의 손이 차가운 건지 제 얼굴이 뜨거운 건지.
“열이 더 올랐군.”
혀를 차는 그의 말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제 얼굴이 뜨거운 모양이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에 크라이어는 입을 막았던 손을 떼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썩대는 올리비아를 안아 올렸다. 그의 품에 축 늘어져 안긴 올리비아는 여전히 펜을 쥔 채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정말 여기까지는 해야만.”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올리비아의 눈가는 열로 인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크라이어는 그런 그녀를 소파에 눕히며 동그란 이마부터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에 눈을 감은 올리비아의 귓바퀴를 타고 옅은 한숨이 섞인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잠깐이라도.”
크라이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짝 힘이 들어갔던 올리비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에게서 전해지는 온기는 서늘했고, 눈을 덮은 손은 거칠었으며 그 탓에 시커먼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편안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올리비아는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 크라이어가 편하다니. 지금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건만.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자연 재해와 같은 남자가 곁에 있어서 그런 걸까.
“열이 나긴 나나 보네, 당신 손 시원해.”
“열은 며칠 전부터 계속 나고 있었잖아.”
“그야 뭐…… 그보다 반대쪽 손 상처는?”
올리비아가 티 나게 말을 돌렸지만, 크라이어는 순순히 받아 주었다.
“아물었다.”
“벌써?”
“적당히.”
그의 답에 올리비아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너무 대충이잖아. 제대로 치료받아.”
“검을 쓰는 데 지장이 없으니 상관없다.”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손바닥이 뚫린 채로 얼마나 더 있을 생각이야. 그리고 아프잖아. 몸 좀 챙겨. 원래 자기 몸은 자기가 챙겨야 하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 끝에 크라이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고 싶군.”
할 말이 궁색해진 올리비아는 괜히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린 크라이어의 손마디를 톡톡 두드리거나 살살 긁으며 어린애 같은 장난을 쳤다. 이윽고 올리비아의 손이 스륵 늘어지고, 아주 조용해졌다. 어느새 기절하듯 잠이 들어버린 올리비아의 숨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짧고 빠르지만 고른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크라이어는 이내 느릿하게 손을 뗐다. 눈을 감고 무방비하게 잠든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크라이어가 다시 손을 뻗었다. 발긋하게 달아오른 뜨끈한 눈가를 쓸어주자 올리비아가 본능적으로 꿈틀거리며 차가운 그의 손에 얼굴을 부볐다. 그 순간 크라이어의 입가에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완전히 풀어진 미소가 번졌다. 이윽고 그는 올리비아 위로 커다란 담요를 덮어준 후, 그녀의 바로 곁에 자리 잡고 책을 펼쳤다. 쌔근쌔근 고른 숨소리와 희미하게 풍기는 올리비아의 향기에 크라이어는 천천히 잠겨 들고 있었다. *** 그날 밤. 서늘한 밤공기와 함께 기사들이 모여 있는 응접실에 들어선 아이작은 술잔을 집어 들다 멈칫했다.
“이 길은 아니니까…….”
한 기사가 다른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아이작은 근처에 있는 기사에게 다가섰다. 그는 자연스럽게 쥐고 있던 술잔을 건네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미끈한 얼굴의 기사를 향해 턱짓했다.
“설마 오늘 밤놀이를 하려는 건가?”
“그럴 거라는군.”
마치 물러날 수 없는 전투를 준비하는 듯이 비장한 기사를 보던 아이작은 고개를 기울였다. 뭐, 밤놀이 간 놈들이 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으니, 비장하기야 하겠군. 지금 이후로 다시는 못 볼 기사에게서 시선을 떼어낸 아이작이 흘리듯 물었다.
“무투 대회가 열린다고 하지 않았나.”
그에게서 술잔을 건네받아 이미 반쯤 비운 기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투 대회가 열리긴 하겠지만, 그런 쪽으로는…….”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모두가 다 알 수 있으리라. 저 미끈한 얼굴의 기사가 무투 대회에서 단 몇 초 만에 뭉개질 테고, 황녀의 눈에 들기는커녕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볼 가능성도 없다는 사실을. 아이작이 막 다른 술잔을 잡는데, 불쑥 누군가 끼어들어 입을 열었다.
“왜 저리 위험을 자초하는 건지 원.”
쯧쯧 혀를 찬 피로한 낯의 기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될 터인데 왜.”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밤놀이, 아니 죽으러 가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뭐긴.”
“음?”
“아니, 무슨 생각이 있겠지.”
아이작은 두루뭉술한 답을 흘리며 입을 다물어 버렸지만, 입 안에서 다른 답을 굴렸다. 뭐긴, 하룻밤 사이에 신세를 고치고 싶은 거지. 눈앞에 놓인 현재가 너무 힘들어 오로지 사는 것, 그러니까 ‘생존’만 생각하는 피곤한 낯의 기사와는 달리 미끈한 얼굴의 기사는 욕심이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내일이나 미래를 꿈꾸는 것이리라. 피곤한 낯의 기사의 말과는 달리 저 기사 역시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는 것은 아닐 테니까. 비록 사냥이 끝나고 삶아지는 사냥개는 아니더라도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는 못할 터. 맡긴 일을 실패하고 돌아온 이가 아닌가. 타고난 얼굴과 입담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실패자에게 또 다른 기회를 쉬이 내어줄 만큼 현실은 녹록지 않다. 몇 번이고 황녀 궁의 지도에서 가야 할 길을 더듬고 또 더듬는 기사를 바라보던 아이작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술잔을 내려두었다. 밤놀이라. 아이작은 애초에 이 제국에 발을 디딜 때부터 황녀의 궁에서 제국의 귀족들을 살피다 걔 중 괜찮은 이에게 붙을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황녀의 곁을 차지한다는 둥, 황녀의 눈에 띄어 한순간 신분 상승을 한다는 둥. 기사 아닌 기사들이 모여 쑥덕거리는 이야기에 그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밤놀이에 어울리지 마라.’
그 밤, 그를 스쳤던 나지막한 목소리가 여전히 선연하게 귓가에 울리자 아이작은 본능적으로 귀를 문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