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범인, 어디 있어.2021.12.02.
그레타는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궁내장이 느끼는 공포가 그녀를 웃게 만들었으니까. 다시 왕세자의 입을 통해 그레타가 말했다.
“별궁의 일을 끝내도록 해. 한시라도 빨리.”
*** 사건이나 사고는 언제나 예상치 못하게 일어난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사건 혹은 사고라 부르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번 사건 역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시각, 아무도 생각지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그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조차 예상치 못하게……. -스륵, 털썩. 정신을 잃은 인영이 고대신의 문양이 얼룩덜룩 그려진 천위에 놓였다.
“으, 허억, 허억허억.”
남자는 턱까지 차오른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잃은 앙브흐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으로부터 몇십 분 전.
‘응? 오늘도 일을 나온 거야? 열심히 하는 건 고맙지만, 지나치면 몸을 망치게 될…… 읍? 으으읍!’
앙브흐는 남자에게 납치당했다. 그 타렌가의 후계자가 너무나도 간단히 그의 손에 들어왔다. 남자의 계획은 지극히 단순했다. 다음에 마주치면 반드시 납치한다. 고작 그것뿐. 그 ‘타렌’가의 후계자를 납치할 생각을 하면서 저토록 빈약한 계획이라니. 지나가던 원숭이도 웃을 일이 아닌가. 하지만 여타의 납치범들과 남자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다. 다름 아닌 납치의 이유. 보통 납치범들이 누군가를 납치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복수, 혹은 돈. 그리고 두 가지 경우 다 범인들은 자신이 잡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납치하는 대상에게 접근하는 방법부터, 그를 납치하는 과정, 그리고 납치 후처리까지 꼼꼼히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신이시여. 나의 신이시여. 신이시여.”
남자는 결코 잡힐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가 갑자기 그를 잡으러 오는 모든 이를 한 번에 눕혀버리고 도망칠 수 있는 대단한 힘을 얻은 건 아니다. 단지, 의식에서 마지막 제물이 바쳐지면, 그의 신이 강림하실 터. 신을 맞을 그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으랴. 남자는 정신을 잃은 앙브흐의 보드라운 분홍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신께서 오시니.”
앙브흐의 순수한 선의로 시작된 인연은 대단히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 시간을 조금 되돌려, 앙브흐가 납치되기 몇 시간 전.
“여긴가.”
“여기야.”
노르덴 국에서 온 남자가 짚은 공터에 도착한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는 핏자국을 발견했다.
“얼마 되지 않았다. 며칠, 아니 어쩌면 이틀 내.”
핏자국을 살핀 크라이어의 말에 올리비아가 주변을 훑어보았다. 지난번처럼 기묘하게 달콤한 냄새가 날 뿐, 이렇게나 선연한 핏자국이 있는데도 피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문양이다.”
크라이어는 잡초 더미에 교묘하게 가려진 일그러진 고대신의 문양을 찾아냈지만, 올리비아는 그보다 다른 것을 찾고 있었다.
“황녀?”
그의 물음에 올리비아는 주변을 샅샅이 헤쳐보는 것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시체. 피가 나왔다면, 시체는?”
“없다.”
단호한 크라이어의 답에 올리비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면 아직 실종이네.”
죽지 않았다면 아직 구해낼 가능성이 있다.
“이 핏자국의 주인이 누군지부터 알아내야겠지.”
올리비아의 행보는 흡사 폭풍처럼 거칠 것 없었다.
“가라. 나의 백성을 찾아내.”
올리비아는 사람을 풀었다.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을. 어떤 일을 하건 시간과 자원이 필요한 법. 그리고 어지간한 일이라면, 자원을 정신 나간 듯 쏟아부어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대륙 유일의 제국, 볼셰이크 황가의 유일한 핏줄인 황녀가 사람을 푼다는 것은 ‘시간’을 그야말로 극적으로 줄일 만큼 많은 이를 동원한다는 의미이리라.
“전하, 찾았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하루를 살아가기도 버거워하던 모녀가 사라졌음을 단시간에 찾아냈다.
“언제 사라졌지.”
“그, 그것이 잘 모르겠습…….”
모녀의 이웃들은 하나같이 모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안듯했다.
“아무래도 사정이 너무 어렵다 보니, 몰래 도망이라도 갔나 했지요. 차라리 도망가기를 바라기도 했고요.”
늙수그레한 여인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털어놓은 이야기를 뒤쪽에서 듣고 있던 올리비아가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도망가기를 바랐다는 여인의 말인즉슨, 그들에게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만약 모녀가 도망가고, 모녀를 쫓는 이들이 나타났을 때 이웃들이 침묵하려면, 그들의 행적을 몰라야만 한다. 전문으로 인간을 사냥하는 이들의 이목을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 속일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 올리비아는 황궁에 들어서자마자 노르덴 국에서 온 남자를 찾았다.
“어딨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머무르던 방에…….”
사용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올리비아는 주저 없이 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가리켰던 공터에서 핏자국을 발견했으니, 범인은 그곳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러니 지금 범인이 있는 곳을 알아내야만 했다.
‘이곳.’
‘여기? 여긴 공터일 텐…… 뭐야, 죽었어?’
‘아니, 정신을 잃었다.’
범인이 있는 곳을 알려 주겠다던 노르덴 국에서 온 남자는 올리비아와 크라이어가 뒤집어 놓은 공터를 짚고 실 끊어진 인형처럼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남자의 뒤에 그레타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 아니, 아예 그가 그녀의 인형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니 남자가 이렇게 느닷없이 기절하는 것도 아마도 마법인지 뭔지의 영향일 테지.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실종된 모녀에게는 남자가 정신 차리기를 기다릴 시간 따윈 없었다. 황궁의 한쪽. 타국의 사신들이 머무는 곳이라 평소에는 고요한 궁에 소란이 일었다. -탕! 문짝이 뜯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당장이라도 누군가 하나 씹어 먹을 듯한 기세로 올리비아가 남자를 찾았다.
“황녀 전하를 뵙…….”
기적적으로 올리비아가 나타나기 직전 정신을 차린 남자가 기계적으로 무릎을 굽히기도 전, 올리비아는 단숨에 그의 코앞에 섰다. 그녀는 가차 없이 남자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남자보다 한참이나 작은 체구였지만, 그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남자를 압도하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죽은 생선과 다름없는 눈을 들여다보며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범인, 어디 있어.”
하지만 남자의 눈동자는 여전히 탁하기만 할 뿐. 그가 입을 열지 않자, 올리비아는 한층 더 그를 가까이 당겼다.
“네가 알고 있다고 자신했기에 제국으로 오는 것을 허락한 거다.”
남자의 뿌연 눈을 가른 푸른 눈동자는 남자의 뒤에 있는 그레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뼈를 헤집듯 서늘한 시선을 느낀 그레타의 입꼬리가 확 뒤틀렸다. 황녀. 제국의 황녀. 아무것도 아닌 것이 한순간 눈엣가시가 되더니, 이제는 손톱 끝에 박힌 가시처럼 거슬렸다.
“말해.”
올리비아가 남자와 거의 코가 닿을 듯 가까워지는 순간. -우당탕! 남자의 목이 거의 직각으로 꺾이면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한순간 손이 비어버린 올리비아가 고개를 들자, 아주 가볍게 남자의 뒷덜미를 잡고 날려버린 크라이어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크라…….”
올리비아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 -으드드득. 무언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손을 밟고 있던 크라이어가 말했다.
“범인, 어디 있어.”
그리고 그렇게 크라이어에게 손가락이 뭉개진 남자는 웃고 있었다. 더없이 기쁘게. 그리고 남자, 아니 그레타는 기꺼이 입을 열었다. 오직 크라이어를 위해서.
“범인은…….”
“전하! 황녀 전하!”
활짝 열린 문으로 구르듯 달려온 사용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황녀 전하! 타렌 영애가 실종되었습니다!”
*** 옛말 그른 거 별로 없다고.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예상치 못한 나쁜 일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연달아 온다고 했지. 모녀의 실종이 밝혀지기 무섭게, 그 타렌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인 앙브흐도 실종되었다. 이렇게나 공교로운 타이밍에 두 실종이 완전히 별개의 사건일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하루 이틀 걸리는 거리가 아닌 곳에 머물던 타렌 후작도 딸의 실종 소식을 듣고 하루 이틀 만에 황궁에 왔다. 푸른 피를 이은 자의 체통이나 품위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몰골로. 그는 무리한 이동으로 다리도 제대로 펴지 못해 거의 기다시피 올리비아에게 다가와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부디, 황녀 전하. 부디. 제 딸을…….’
올리비아는 그저 그의 손을 꽉 잡아 주었을 뿐. 그 자리에서 왜 타렌 영애 혼자 상회에 드나들었냐는 물음 같은 건 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타렌의 구역이 아닌가. 나쁜 마음을 먹은 이들이 있다 하더라도 감히 ‘타렌’을 건드리는 이들은 없으며, 만약 외부의 어중이떠중이가 그러려고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사람들이 그들을 막아설 곳.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나 발 벗고 그녀를 애지중지 여기는 건 비단 앙브흐가 ‘타렌’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이제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앙브흐가 오롯한 선의와 호의로 그들이 어려울 때마다 손을 내밀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앙브흐는 사람들을 선의로 대했고, 사람들 역시 앙브흐에게 그 선의를 돌려주었다. 선의에 선의로. 하지만 그 결과 앙브흐는 무방비하게 범인에게 노출되었고, 사라졌다. 소리 없이 절규하는 타렌 후작을 뒤로한 채 올리비아는 밖으로 나섰다. 이 피비린내 진동하는 사건을 끝내야만 했으니까.
“전하.”
그녀를 기다리는 수많은 이들을 앞에 두고 올리비아는 단호히 명했다.
“대기해.”
지금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쉬이 받아들이기 힘든 명령이었지만, 누구 하나 그녀의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그저 따를 뿐. 그림자 속에서 그 광경을 보던 크라이어의 눈이 일렁거렸다. 올리비아의 등은 여느 때처럼 작았고 가는 어깨는 평소처럼 연약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그녀가 아주 거대한 산과 같이 느껴졌으니까.
“크라이어.”
“여기 있다.”
범인이 어디 있는지 안다. 고작 노르덴 국에서 온 남자의 말뿐이었지만, 올리비아는 그 남자의 입을 빌린 그레타의 말을 믿었다. 누구보다도 고대신에 진심인 마법사와 그의 딸이, 감히 고대신과 관련된 일에 허튼짓하지 않으리라는 어딘가 조금 비틀린 신뢰가 있었으니까. 올리비아는 여러 말 하지 않았다.
“들었지?”
“그래.”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둘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말이 오갔다. 이윽고 올리비아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자.”
“나의 황녀가 명한다면.”
크라이어는 대단히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 안아 올렸다. 이윽고 올리비아와 크라이어가 이마를 맞댔다. 서로를 응시하던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두 개의 호흡이 서서히 하나의 고동이 되어 뛰는 순간, 둘은 이마를 맞댄 채 천천히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대신의 일그러진 제단이 있는 곳으로.
“끝낼 시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