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나의 황녀.2021.11.29.
고향이라니. 그에게는 토악질이 나올 만한 단어가 아닌가. 애초에 ‘노르덴 국’이라는 나라가 없던 시대의 사람인 크라이어를 강제로 부활시키고 노예로 만든 자들의 입김이 누구보다도 뜨거운 나라를 두고 고향? 하지만 둘은 이미 이리 하기로 입을 맞춰둔 상태였다.
‘노르덴 국에서 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하고 가자. 어차피 그 자리에 당신도 동석할 거잖아.’
‘아마도. 그래서 무엇을?’
‘내가 당신은 물론이고 고대신의 고자도 모르는 것으로.’
올리비아의 말에 크라이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다 멈칫했다.
‘그러면 날 곁에 둔 이유를 뭐라고 설명할 거지? 설마.’
설마 뒤에 생략된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올리비아는 크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당연히 첫눈에 반했다는 헛소리는 안 할 거야. 그리고 왜 당신을 곁에 뒀는지 말하지도 않을 거고.’
‘그렇게 넘어갈 수 있나?’
‘있지. 나는 제국의 황녀고, 노르덴 국에서 올 사람이 왕세자가 아닌 이상 대놓고 나에게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뭐, 왕세자도 물을 수야 있지만, 답을 해주는 건 어디까지나 내 마음이야.’
그리 말하는 올리비아는 그 어느 때보다 제국의 황녀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을 맞춘 건 맞춘 것이고,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으리라. 그렇기에 말을 하는 올리비아의 입안에도 혓바늘이 돋을 지경이었지만, 크라이어는 덤덤하게 올리비아의 말을 받았다.
“그렇군요. 고향 사람은 오랜만입니다.”
이것으로 올리비아와 크라이어의 ‘진짜’ 관계는 숨겨졌을 터. 만약 그레타가 직접 이 자리에 있었다면, 올리비아와 크라이어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를 알아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그녀의 인형뿐. 그것도 가끔 귀가 잘 들리지 않고, 눈앞도 뿌연…….
“하지만 면식이 없는 이니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크라이어는 간단한 말로 올리비아에게 눈앞에 있는 남자가 ‘고대신’이나 ‘마법사’와 관련 없다는 사실을 알렸지만, 올리비아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가, 아쉽게 되었네.”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입 모양으로만 전했다. 눈을 봐. 밑도 끝도 없는 한마디였지만, 크라이어는 되묻지 않고 즉시 노르덴 국에서 온 남자의 눈을 살폈다. 응접실에 들어선 후 처음으로 남자의 죽은 생선같이 뿌연 눈과 마주한 크라이어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뿌연 눈동자 너머 익숙한 시선이 느껴지는 순간. 일자로 다물려 있던 크라이어의 입술 사이로 그르렁거림에 가까운 부름이 새어 나왔다.
“그레타.”
그리고 마치 그 부름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의 뿌연 눈에 구역질 나는 환희가 들어찼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았다. 마치 운명처럼. 아니, 운명이겠지. 그와 그녀는 운명일 수밖에 없다. 그를 찾아내고, 그를 부활시키고, 그와 함께 정화될 세상에서 살아남을 이는 오로지 그녀뿐이니. 물론 올리비아도 크라이어의 낮은 으르렁거림을 들었다. 그녀는 마법사의 딸이 그레타라는 사실을 지금까지는 몰랐지만, 크라이어를 보고 단숨에 알아챘다. 그리고 크라이어가 그녀가 아닌, 그녀 너머를 본다는 사실도.
“크라이어.”
남자의 입을 타고 그레타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남자의 죽은 생선 같은 눈은 아이러니하게도 더없이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크라이어도 알고 있었다. 그레타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어떤 목소리로 제게 속삭이며, 어떤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지. 그는 과거 기억이 없는 사람이지, 눈치가 없는 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레타의 사랑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혐오하고 경멸했다면, 그에게 강제로 노예의 족쇄를 채우고 피의 길을 가도록 강요한 그녀를 증오했다면. 그랬다면 차라리 그레타에게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었으리라.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 같다는 옛말도 있으니. 하지만 진정으로 그레타는 크라이어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레타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 자체를 증오했으니까. 그리고 자유로워질 수만 있다면, 마법사나 그레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리라. 물론 빌어먹을 고대신에게서 벗어나려면 올리비아의 말대로 마법사와 그레타를 이용해야 할 테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잖아.’
그는 본능적으로 올리비아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올리비아가 원했던 대로 마법사의 정보를 캐내려면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나으리라. 그 교활한 마법사 놈은 직접 움직이지 않을 테지만, 그레타라면 제국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방법은 확실히 있지. 크라이어는 남자, 그러니까 그레타가 최대한 잘 볼 수 있는 각도를 순식간에 계산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올리비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올리비아 역시 망설이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았다. 크라이어는 눈가를 길게 접어 웃으며 깊숙이, 아주 깊숙이 올리비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는 그리하면서 더할 나위 없이 포악하고 사나운 제 이빨을 감췄다.
“나의 황녀.”
아무런 맥락 없는 갑작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올리비아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크라이어와 손발을 맞췄다. 그녀는 만개하는 장미처럼 미소하며 답했다.
“나의 기사.”
*** 크라이어가 올리비아의 손등 위로 깊숙이 입술을 내리는 순간. 노르덴 국의 왕궁 심처. -까드드득. 사파이어 반지가 다이아몬드에 갈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레타는 눈을 깊숙이 감고 진정하려 애를 썼지만,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속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나의 황녀.’
그가 그리 말했다. 나의……. -까가각. 사파이어가 거칠게 갈려 푸른 가루가 흩어졌다. 그는 분명히 그녀를 알아보았는데, 어째서? 어째서 제게 그런 모습을 보인 걸까. 크라이어에게 어떤 계획이 있으리라 믿고 있다. 그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크라이어.’
“감히.”
그레타는 아랫입술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짓씹었다.
“감히, 황녀 따위가.”
물론 제국의 황녀가 노르덴 국의 일개 기사인 그의 이름을 부르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으리라. 고작 왕국의 기사, 지금은 이름도 없는 기사인 그에게 경칭을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하지만 다른 이는 몰라도 그레타는 느낄 수 있었다. 이름을 부르는 황녀의 목소리에 담긴 일종의 ‘사적인’ 감정을. 도구를 통해 들었기에 정확히 판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황녀는 크라이어에게 어떤 종류인지 몰라도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그래. 황녀가 그에게 첫눈에 반해 곁에 두고 있다고 했으니 예상치 못한 것도 아니지 않나. -까득, 까드득. 신경을 긁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가락에서 거칠게 갈린 사파이어 가루가 후두둑 떨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레타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제국에 갇혀 있어.”
그건 참으로 이상한 결론이었다. 크라이어는 그 누구보다도 정결하고, 그 누구보다도 강한 자다. 그렇기에 고대신의 강림에 필요한 피를 받을 최적의 노예가 아니었던가. 적어도 그를 부활시킨 마법사와, 낙인을 찍은 그레타에게는 그랬다. 한데, 그레타는 그 크라이어가 그의 의지에 반해 제국에 갇혀 있다고 했다.
“내가 그의 손을 잡아줘야만 해.”
아주 기괴한 결론이라도, 그편이 그녀에게 좋을 테니까. 크라이어가 그녀를 필요로 한다. 그것만으로도 그레타는 벅차올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아, 아아아. 아아!”
그레타는 불타는 듯 아픈 심장을 문지르며 크라이어를 그렸다. 보고 싶다. 보고 싶어. 그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고대신의 선택을 받은 첫 번째 노예. 정결한 기사. 그리고 고대신이 정화할 이 세계에 그녀와 함께 남을 단 한 사람. 가슴을 긁어내리며 신음하는 그레타와 그녀와 두어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 왕세자. 지나치게 기괴한 광경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누구도 볼 수 없는 광경이기도 했다. 한참이나 그렇게 몸부림치던 그레타가 우뚝 멈췄다.
“후.”
방금 전의 그 괴로움에 몸서리친 것들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그레타의 얼굴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그야말로 한편의 싸이코 드라마 같은 장면이었지만, 이번에도 관객은 없었다. 그레타는 전면에 걸린 대륙 지도에서 제국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혀를 찼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크라이어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으니까. 고대신께서 강림하실 제단의 준비가 끝나지 않았지 않나.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는 놈도 아직 잡지 못했고.”
그레타의 눈에서 초점이 옅어지면서 그녀의 시선은 제국의 외곽, 아주 외진 공터에 박혔다.
“자리를 옮겼군.”
지난밤, 남자가 어미와 아이를 제물로 바친 그 공터를 훑은 그레타의 눈알이 한 바퀴 휙 돌았다. 이윽고 그녀의 시야 끝에 남자의 뒷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구나.”
붉은 입술이 뒤틀리는 순간, 남자가 휙 뒤로 돌아봤지만, 그레타는 이미 초점이 제대로 돌아온 상태. 그녀는 윗입술을 핥으며 제멋대로 갈려 엉망진창이 된 사파이어를 쓰다듬었다. 거친 단면이 스친 손끝에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레타는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배어 나온 핏방울에 푸른 사파이어가 붉은 얼룩으로 뒤덮였을 때. 그레타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는 놈은 그녀가 아니라, 크라이어가 해결하리라. 그렇다면 남은 것은 제단뿐. 그녀의 손끝이 움찔거릴 때마다 줄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져 있던 왕세자의 몸도 움찔거렸다. 그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손을 뻗어 설렁줄을 당겼다.
“부르셨사옵니까. 전하.”
왕세자의 입에서 그레타의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별궁의 일은 어떻게 되고 있지?”
“국장 문제로 잠시 멈춘…….”
“당장 재개하도록.”
궁내장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허리를 숙이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차기 왕위에 오를 왕세자가 저토록 강경히 말하는데 어찌 다른 말을 얹을 수 있을까. 심지어 궁내장은 별궁에서 하는 일이 대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니, 더더욱 섣불리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궁내장은 왕세자 뒤쪽에서 웃고 있는 그레타에게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선왕 폐하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그분, 그러니까 마법사가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말 몇 마디가 흘러나온 직후, 궁의 복도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던가. 꽤 오랜 세월 궁내장을 지냈지만, 소소한 국경분쟁 외에는 ‘전쟁’이라는 단어가 낯선 시대. 복도의 카펫이 물들어 질척거릴 만큼 많은 양의 피를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궁내장으로서는 그날의 기억은 공포 그 자체였으리라. 허옇게 질린 궁내장의 귓가로 왕세자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