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평화의 비둘기요!2021.09.09.
차마 그가 자신의 목을 몇 번이고 쳤다는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으니까. 크라이어는 딱히 그녀를 채근하지 않았다. 단지 바라볼 뿐. 달이 뜨지 않은 칠흑의 밤을 베어낸 그 눈동자는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지난 회귀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도움이 필요하신 거 같은데요.”
“내 정신은 멀쩡해! 그리고 왜 또 존댓말을……. 안 돼! 가지 마!”
필사의 만류에도 크라이어는 멈추지 않았다. 올리비아의 본능이 속삭였다. 여기서 그를 놓치면 이번 생도 그의 손에 명을 달리할 거라고. 그녀는 살고 싶었다. 그렇기에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게 될 줄은 몰랐건만.
“얼마면 돼!”
올리비아는 그녀를 외면하며 밀실을 나서려는 대륙 전쟁의 원인인 크라이어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하지만 크라이어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기에 올리비아는 그대로 질질 끌려갔다.
“놔라.”
“안 돼!”
한 다리에 그녀를 매단 채 거침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크라이어는 죽어도 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는 올리비아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놓으라고.”
“안 된다고! 얼마면 돼! 아니, 뭐가 필요해! 뭘 해 주면 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건데!”
옅은 한숨을 내쉬며 올리비아를 향해 손을 뻗던 크라이어가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멈칫했다.
“노예라며! 무슨 계약인지 몰라도 내가 그 계약 끝내줄…… 으헉!”
올리비아는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한 채 심연이 된 크라이어의 눈과 마주했다. 그는 올리비아의 코앞까지 고개를 숙이며 으르렁거렸다.
“내가 노예라는 것을 누구에게 들었지?”
“따…… 딸꾹. 딸꾹. 딸꾹.”
갑작스럽게 그와의 거리가 거의 영에 가까워지자, 눈치 없이 튀어나온 딸꾹질에 올리비아는 양손으로 제 입을 막고 어깨만 들썩였다. 크라이어는 그녀를 헤집듯 깊숙이 들여다보며 광폭한 이를 드러냈다.
“누구냐. 너.”
“평화의 비둘기요!”
……둘기…… 비둘기……. 밀실 안에서 메아리가 치듯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크라이어는 한동안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올리비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내 올리비아의 팔을 잡아 그대로 들어 올렸다.
“방금 뭐라고 했지.”
“펴…… 평화의 비둘……기. 평화를 상징하는…….”
크라이어가 그녀를 번쩍든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후 소파에 내려두었다. 도망가지 못하게 양팔에 그녀를 가둔 크라이어가 속삭였다.
“좋아. 평화의 비둘기. 다시 한번 묻지. 너에게 정보를 준 자가 누구지?”
“너…… 너요! 너! 너라고!”
올리비아는 열과 성을 다해 그를 삿대질했다. 한동안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녀를 지긋이 내려다보던 크라이어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거짓말은 아닌데.”
“그야 거짓말일 리가 있나! 내가 직접 너한테 들었다고!”
“내가 내 입으로 말했다고.”
“그래! 나는 노예라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했어. 네가! 네 입으로!”
한꺼번에 말을 뱉어낸 올리비아는 숨을 학학 내쉬다 덧붙였다.
“지난 생에서 말이야.”
그의 미간에 이전보다 더 깊은 금이 가자 올리비아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설명! 설명할게.”
올리비아는 자신의 회귀와 전생에서 겪었던 모든 일을 요약 정리하여 크라이어 앞에서 줄줄이 읊어주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어쨌든 일어난 일이니…….”
말끝을 흐리는 올리비아를 향해 크라이어가 손을 뻗었다. 화들짝 놀라면서도 그의 손을 피할 생각은 못 하는 체념의 빛이 짙게 묻어나는 그녀를 확인한 크라이어가 이내 손을 거두어들였다.
“확실히 죽어보긴 했군.”
“확실하다니까! 내가 무려 당신한테만 네 번을 죽었으니까 말이야.”
올리비아는 제 가슴을 쓱 내밀고 탕탕 두드리며, 이 몸 믿어 달라는 신호를 보내다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몇 번이고 자신을 죽인 남자 앞에서 네가 날 죽였다고 믿어 달라고 하는 현실이 너무나도 암담했으니까. 그러다 분연히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야! 이 남자하고 이렇게 대거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있다는 거잖아! 양 주먹을 불끈 쥐며 눈을 빛내는 올리비아를 향해 크라이어가 물었다.
“혼자 북 치고 탬버린 치고 다 했나?”
“어……. 으응.”
어정쩡하게 불끈 쥐었던 주먹을 내린 올리비아가 얌전히 손을 배꼽으로 모으자 크라이어는 피식 웃었다.
“말투나 행동이 제국의 황녀 답지 않은데. 게다가 네 번이나 죽었다 살아난 것 치고는 지나치게 가볍고.”
“죽음 앞에서는 황녀고 뭐고 전부 평등하다는 것을 당신이 가르쳐줬으니까. 전혀 깨닫고 싶지 않은 사실을 무려 네 번이나. 그리고 네 번쯤 죽고 회귀하면서 느꼈거든.”
“무엇을?”
“내가 처한 현실이 시궁창이라면, 더 깊이 빠지지 않도록 가볍고 빠르게 반응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거.”
올리비아는 딱딱하게 굳은 목을 쓸어내렸다.
“뭐, 고고하고 우아하게 목을 뻣뻣이 세우고 당신을 대한다고 해서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건 이미 온몸으로 체득하기도 했고.”
“확실히, 날 알고 있는 것 같긴 해.”
“안다니까. 설명이 모자라?”
“아니, 그 정도면 충분해. 어차피 더 들어도 믿을 수 없을 테니까.”
크라이어의 단호한 답에 올리비아가 재차 입을 열려던 순간, 그가 손을 뻗었고 올리비아는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은 죽이지 않을 테니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 없어. 죽어 봤다면 알잖아. 경계를 하건 말건 내가 널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거.”
“알지. 아주 잘 알지.”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는 올리비아의 속눈썹이 폭풍을 만난 나비의 날개처럼 정신없이 팔락거렸다.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생생하게 눈 앞에 펼쳐지는 회귀 전의 기억.
‘황녀 전하! 피하셔야 합니다!’
‘전하!’
피와 상처로 엉망진창인 기사들의 간절한 외침에도 올리비아는 그녀를 향해 느릿하게 걸어오는 크라이어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시선을 떼는 순간 온몸이 갈가리 찢길 것 같았으니까.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피를 뒤집어쓴 그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은 직후, 올리비아가 서 있는 성벽의 왼쪽이 무너지며 거대한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성벽을 무너뜨린 크라이어는 훌쩍 뛰어올라 올리비아를 향해 가까워졌다.
‘막아! 전하를 지……!’
‘전……!’
올리비아의 코앞에서 피보라가 일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제국에서 손꼽히는 기사들을 모조리 다 죽여 버린 크라이어가 올리비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굶주린 포식자가 무엇보다 탐스러운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올리비아는 어깨를 부르르 떨어 과거의 기억을 떨치며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지금은 죽이지 않는다고 하더니, 바로 그다음에 언제든 죽일 수 있다고? 뭐야, 죽인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혼란의 구덩이에서 허우적거리는 올리비아를 크라이어가 간단히 꺼내주었다.
“안 죽여.”
“감사합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감사 인사에 올리비아의 뺨이 금방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크라이어는 그런 그녀의 수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죽고 돌아오기를 몇 번 반복했고, 그 과정에서 대륙 전쟁을 겪으며 내가 노예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고.”
“그……렇지.”
올리비아는 자신의 인생 역경이 제 인생을 끝장낸 남자의 입에서 저렇게 몇 마디로 정리되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일단은 믿어주지. 별 되먹지 못한 계약도 있는 마당에 죽었다가 돌아오는 일도 있…… 엇차.”
크라이어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온몸에 힘이 풀려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올리비아를 몸으로 받아냈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이 눌린 탓에 기이한 모양새였지만, 올리비아는 배슬배슬 웃기만 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겨우 일 단계를 통과한 느낌? 끝도 없는 망망대해를 헤매다 간신히 잡은 지푸라기가 알고 보니 튼튼한 구명줄이었다는 그런 기분?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너 아까 나를 계약에서 해방시켜 주겠다느니 그런 말을 했었지.”
기실 누가 들어도 미친 소린가? 하는 올리비아의 이야기를 크라이어가 꽤 순순히 받아들인 이유는 그녀가 말했던 ‘해방’이라는 것에 제국의 황녀인 올리비아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이 빌어먹을 노예 계약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많을수록 좋을 테니까. 그의 물음에 올리비아는 토끼 눈을 떴지만,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헛숨만 샜다. 그때는 그냥 가버리려는 그를 잡으려 필사적이었을 뿐. 실제로 그가 어떤 노예 계약을 맺었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해방은 무슨 개가 풀 뜯는 소리인가.
“눈 굴러가는 소리 여기까지 들린다.”
“아니, 그게 말이야…….”
“지금 당장 해방시켜 달라고 안 했다.”
“그거참 다행……이 아니라. 크흠. 일단 무슨 계약인지부터 알려주면 내가 백방으로 알아볼게. 황녀 좋다는 게 뭐야. 이럴 때 휘두를 권력이 있는 거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경청할 준비가 되었다는 듯 귀를 쫑긋거리는 올리비아를 향해 크라이어는 모호한 답을 내어놓았다.
“글쎄.”
“글쎄라니?”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지.”
“그야 당연히 어렵겠지만…….”
“일단 그 황녀의 권력인가 뭔가로 지금은 거의 실전되다시피 한 마법 관련 정보를 전부 알아볼 수 있나?”
“그야 사람을 끌어모으면 할 수야 있겠지만, 마법 관련이라니? 설마.”
“그 설마다.”
“그…… 노예 계약이라는 게 마법…… 쪽이었어?”
회귀하기 전, 크라이어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당시 대단히 나쁜 꿈이나 마법 같은 것이라 했더니…… 말이 씨가 된다고. 진짜 마법과 관련되어 있었다니.
“그래.”
“무…… 무척 힘들겠네.”
무리다! 라는 말이 목 끝까지 나왔지만, 간신히 다른 말로 돌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어리숙한 반응을 크라이어는 놓치지 않았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크라이어는 올리비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속삭였다.
“한 번 뱉은 말에는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지. 황녀.”
*** 올리비아와 크라이어가 밀실에서 회동이라고 쓰고 필사의 애원과 조금의 흥미, 그리고 터무니없는 현실을 모조리 다 터뜨리고 있을 무렵. 회의장은 두 개의 주제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세계 평화라니. 허어.”
“설마.”
“어허, 설마라는 말도 꺼내지 마십시오.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모르십니까.”
“커흠. 그거야 그렇지만.”
말끝을 흐리는 이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짙게 끼었다.
“전쟁이라니.”
“그런 말조차 꺼내지 말자 하지 않았소!”
“지금 말이든 씨든 그게 문제요. 몇 개월이나 앞당겨 연 대륙 회의의 주제가 세계 평화인 마당에.”
“세계 평화는 언제든 지켜야 하는 기치가 아닙니까. 너무 비약하지 마시…….”
“비약이 아니라 대책 마련을 하자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 대책 마련이라는 것조차 괜한 긁어 부스럼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 그냥 멍청히 손 놓고 있다가 기습을 당하는 것보다는…….”
“기습이라니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구먼. 세계 평화일세. 세계 평화!”
각 국가의 정상들은 각기 다른 말을 하며 서로의 의사를 굽히려 들지 않았지만, 우려하는 바는 모두 같았다. 제국의 정복 전쟁. 대륙 유일의 제국이기에 이름조차 붙지 않는 거대한 나라는 대륙의 노른자 위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호시탐탐 더 많은 곳을 지배할 야욕을 드러내고는 했다. 다행히 그간 대륙 회의라는 일종의 중간 다리가 제 역할을 해 준 덕분에 대대적인 전쟁이 일어난 적은 없지만, 국소 분쟁은 지금도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만약 제국이 전쟁을 시작하면, 그 제국에 맞서 다른 모든 나라가 힘을 합쳐야 한다. 연합국을 형성하여 잘만 대응한다면 어떻게든 제국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 아니, 막아내다 못해 제국을 밀어낼 가능성도 조금쯤은 있다. 하지만 그리할 수 없는 건……. 각국의 정상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들과 손잡고 제국을 칠 수 있느냐 하는 신뢰를 가늠해 본다면, 단연코 없다고 할 수 있겠지. 모두가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어느 누군가는 분명 제국의 옆에 붙어 떨어지는 콩고물, 아니 거대한 고깃덩어리를 받아먹으려 아가리를 벌릴 것이다.
“우리끼리 왈가왈부해 봐야 제국에서 이렇다저렇다 할 입장을 내놓지 않는 이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소이다.”
“일단 이번 회의에서 최선을 다해 상태 유지를 해 봐야겠지요.”
그렇게 각자의 속셈과 속내를 적당히 감춘 이들의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 때. 다른 한곳에 모인 이들은 또 다른 주제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아니, 토론이라기보다 올리비아의 옆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대한 눈치싸움에 가까웠다.
“단둘이서 볼일이라면, 역시.”
“그렇지요. 황녀님께서 한눈에 그 기사를 눈에 담으신 거 아니겠습니까.”
“설마요. 기사의 모양새가 그럴듯하긴 했지만, 고작 외모 가지고 황녀님께서…….”
“사랑이란 원래 이유가 없는 법입니다.”
“말조심하시죠. 사랑이라니. 커흠.”
“제국의 부마가 되려면 적어도…….”
“아니지요. 무엇보다 황녀님께서 마음에 드셔야…….”
“제국과 함께하는 미래에 걸맞은…….”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면서도 어떻게든 대화 비스름한 것이 진행되는 가운데, 휴식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송구합니다만!”
거의 구르듯 회의장 안으로 들어온 사용인이 목청껏 외쳤다.
“노…… 노르덴 국왕께서!”
사색이 된 사용인의 외침에도 정상들은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았다. 고작 사용인 하나가 고함치고 발을 동동 구른다고 해서 동요의 기색을 보일 정도라면 한 나라의 꼭대기에 앉아 있지도 못할 터. 하지만 이어지는 사용인의 비명 같은 외침에는 그리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서거하셨습니다!”
“뭣이?”
“뭐?”
“뭐라고 했나!”
“노르덴 국왕께서 방금 서거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