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도 몰라, 그냥 손이 나갔어.2021.09.13.
회의장에 노르덴 국왕의 죽음이 알려지기 몇 분 전. 올리비아는 숨을 꼴깍거리고 있었다. 크라이어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나도 부담스러워서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으니까. 폭풍우에 휘청거리는 갈대처럼 사정없이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이 계약은…….”
그가 자신의 노예 계약에 대해 말을 꺼내려는 찰나. -똑똑. -똑똑똑똑똑.
“전하, 전하!”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 단단히 일렀건만, 명이 무색하게도 밀실 안으로 다급한 노크 소리와 그보다 더 다급한 사용인의 목소리가 함께 울렸다.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는 동시에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이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전하! 전하, 너무나도 송구하오나 크……큰일이 났습니다!”
“아무래도.”
“일어나야겠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을 주고받은 둘이었지만, 행동은 그렇지 못했다. 일어나려던 올리비아는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낑낑거렸고, 크라이어는 그런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똑똑똑똑똑똑. 노크 소리가 이전보다 거칠고 급박해졌기에 올리비아는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크라이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좀 도와줘.”
“나를 도와주겠다더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일단 좀 일으켜 줘.”
제가 조금만 크게 움직이거나 낮게 그르렁거려도 바들바들 떨어놓곤 뻔뻔스럽게 결국에는 제 할 말 다 하는 올리비아를 향해 크라이어는 웃어 버렸다.
“그 말도 맞군.”
그는 올리비아를 단숨에 일으켰고, 그녀는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부들거리는 다리를 바닥에 몇 번 내려쳤다.
“걸을 수 있나?”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전하!”
더 지체하면 밖에서 사용인이 저를 부르다 죽을 판이었기에 올리비아는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문으로 향했다. -달칵. 열린 문 사이로 사용인의 무표정하지만 당혹에 가득 찬 기묘한 표정이 보였다.
“전하?”
“그래.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스럽게 구는 거지?”
완벽한 제국 황녀의 얼굴을 한 올리비아의 차분한 목소리에 사용인도 조금 진정이 된 것인지 이전보다 확연히 작아진 목소리로 답했다.
“노르덴 국왕께서 운명하셨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이는 사용인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는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노르덴 국왕이 죽어? 그가 죽……? 뭐? 이번 다섯 번째 회귀 전, 네 번의 생에 걸쳐 전쟁 선포를 했던 그가? 회귀 때마다 소소한 것들이 바뀌긴 했지만, 노르덴 국왕의 죽음이 사소한 일……이었나? 혼란에 빠졌던 그녀는 제 등 뒤에서 가까워지는 크라이어의 인기척에 긴장으로 어깨가 바짝 굳어졌다.
“그 말이 사실인가.”
올리비아와 마찬가지로 기사의 가면을 쓴 크라이어의 낮은 목소리에 사용인은 단답을 내어놓았다.
“그렇습니다.”
이어 나온 크라이어의 답에 올리비아가 그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렇군.”
“그게 끝…… 아니, 일단 가자.”
반응이 그게 끝이냐는 말을 꾹 눌러 삼킨 올리비아가 사용인을 향해 눈짓했다.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기면서 올리비아는 크라이어를 흘긋 바라보았다. 노르덴 국왕이 죽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진짜 기사라면 당장이라도 폭발하여 뛰쳐나가야 할 일이지만 크라이어는 아닐 테지. 하지만 저렇게? 저렇게까지 반응이 없을 일인가? 그와 노르덴 국왕은 어쨌든 한 배를 탄 동지쯤 되는 사이가 아니었……. 올리비아는 입 안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니구나. 노르덴 국왕은 이 전쟁과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어. 결론에 이르자 올리비아는 맥이 탁 풀려버렸다. 사람 하나둘 죽어 나가는 거 정도야 전쟁 사상자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게다가 큰 줄기와는 관련도 없는 사람이니.
“이곳에서 그만.”
올리비아가 맥이 빠지든 말든 사용인은 착실히 목적지로 안내했고, 둘은 곧 처참한 시체가 된 노르덴 국왕을 볼 수 있었다. 장식의 뾰족한 부분에 뒷목이 꽂힌 왕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한 듯 미처 눈도 감지 못했고, 아직도 피가 질질 흐르는 그의 발밑에는 피로 만들어진 웅덩이가 시뻘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올리비아는 예상 이상으로 너무 처참한 광경에 놀랐던 기색을 금세 지우고 노르덴 국왕의 시체를 면밀히 살폈다. 그리고 크라이어 역시 시체는 물론이고 주변을 전부 훑고 있었다. 시체의 눈을 뒤집어 보고 맥까지 짚어본 올리비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누가 와도 못 살리겠는걸.”
그녀는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을 향해 손짓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신 후 사고를 당하신 듯합니다.”
“사고를 당한 듯하다고?”
“네.”
올리비아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수행하던 사용인은 뭐라고 했지?”
“잠시 혼자 계시고 싶다고 하셔서 전부 물러가 있었습니다.”
“결국 정확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네.”
“송구합니다.”
“수습해.”
“네.”
사용인들이 시신을 정리하는 사이, 올리비아는 어느새 계단 위쪽에서 바닥을 살피고 있는 크라이어를 향해 다가섰다.
“사고라는데.”
“글쎄.”
“또 글쎄야?”
“이런 일이 전에도 있었나.”
그가 묻는 ‘전’은 아마도 이전 생의 일일 테지.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만 말했잖아. 큰 줄기를 빼고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이건 큰 줄기가 아니었나 보군.”
“아마……도? 정말로 의외지만 노르덴 국왕은 전쟁과 관련이 없었나 봐? 이상도 하지. 전쟁 자체는 항상 당신이 시작했지만, 어쨌든 선포는 매번 노르덴 국왕이 했었거든.”
“국왕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역시 그럴 거 같…… 잠깐만, 지금 말투로 봐서는 당신 꼭두각시는 아닌 거 같은데?”
올리비아의 말에 크라이어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꼭두각시가 꼭두각시를 부리다니 그리 유쾌한 광경은 아니겠군. 하지만 내가 아니다.”
“그러면?”
“그보다 이곳 말인데, 회의 때문에 바닥재나 계단 소재를 바꿨나?”
갑작스러운 동문서답에 올리비아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촉박했나.”
“그럴 리가. 이곳 전체 벽이며 바닥을 다 뜯어내고 새로 한다고 해도 하루 이틀이면 충분해. 단지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하지 않은 것뿐.”
이곳은 제국의 황가가 소유한 별궁이다. 황제의 명령 한마디에 산도 순식간에 옮겨지는 마당에, 별궁 공사 정도가 대수랴. 시간이 모자란다면 인력과 재원을 더 투입하면 될 일. 그리고 제국은 그 정도의 사람과 재화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대륙 유일의 국가이리라.
“왜? 설마 바닥이 미끄러워서 허우대 멀쩡하고 심신 건강하던 노르덴 국왕이 발을 헛디딘 거야?”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을 유심히 살피는 크라이어 옆에 쪼그려 앉은 올리비아도 열심히 바닥을 살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전혀 특별할 것 없는 그저 평범한 바닥이었다. 덮인 타일이 그다지 제 취향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으니 그거 하나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
“아니, 계단 꼭대기라 일부러 미끄럼 방지를 위한 장치도 해두었다. 설사 여기에서 발을 헛디뎠다고 해도 팔다리가 멀쩡한 사람이라면 난간을 잡았겠지.”
크라이어의 시선에 올리비아의 눈이 따라붙었다. 과연 그의 말대로 난간은 정확히 있어야 하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
“사고라기보다는 사고를 가장한 암살에 가깝겠군.”
올리비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었다.
“노르덴 국왕을 굳이 암살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번에도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것이 돌아왔다.
“그자가 한 짓이군.”
“그자?”
-으득. 올리비아는 바로 옆에서 들리는 이를 가는 소리에 작살에 맞은 참치처럼 어깨를 튕겼다. 그녀는 차마 크라이어를 볼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묻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자, 아니. 놈이 누구기에?”
“마법사다.”
“마법이라고? 그러면 설마 그 노예…… 아니, 그러니까 계약은.”
“그래. 그자가 한 짓이지.”
크라이어는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일 리 없는 계약의 낙인, 노예의 인장이 찍힌 쇄골을 문질렀다.
‘……하게 될…… 너는 그분의 노…… 곧 세계는…….’
조각나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이 텅 비어버린 속에 스산한 바람을 불러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뭐 하는 거지.”
크라이어는 제 손등을 엉거주춤 덮고 있는, 한참이나 작고 보드라운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음…….”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서도 올리비아는 그의 손등 위를 어정쩡하게 계속 토닥거렸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자, 올리비아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나도 몰라, 그냥 손이 나갔어.”
제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었는지 올리비아는 몇 번 입술을 달싹였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할 말을 찾을 수 없었으니까. 크라이어를 만난 후 단 한 번의 거짓말도 하지 않은 그녀는 이번에도 오로지 진실만을 말했다. 정말로 어떤 생각이나 고민을 할 틈도 없이, 정신 차리고 보니 저도 모르게 그의 손등을 아기 등 두드리는 것처럼 토닥이고 있었을 뿐. 아무런 답도 되지 않는 대답이었지만, 크라이어는 되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의 손을 쳐내어 뒤로 꺾거나 잘라버리지도 않았다. 그저 바라볼 뿐. 비둘기……라고 했던가. 평화의 비둘기. 전쟁을 막기 위해, 아니 살아남기 위해 전쟁을 막으려는 여자.
“너 설마 진짜 비둘기는 아니겠지.”
“사람! 사람입니다만!”
사람인데 어째서……. 죽음에서 돌아와 전혀 원하지 않았던 계약에 묶여 이리저리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움직이는 삶을 살게 된 이후. 크라이어는 사람과의 접촉이 불쾌해졌다. 진저리치며 피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타인의 미지근한 온기는 그의 신경을 긁어 놓곤 했다. 죽어 나자빠져 이미 식어 버린 지 오래였던 그의 몸에 도로 산 자처럼 온기를 불어넣은, 머리가 돌아버린 마법사가 찍은 노예의 인장 때문이리라. 하지만 기묘하게도. 어쩐지 나쁘지 않았다. 불쾌하지도, 손을 잘라버리고 싶다는 살의도 치밀어 오르지 않았다.
“네가 사람이라고?”
“사람이라고! 좀 믿어 줘. 비둘기가 되고 싶다는 건 어디까지나 평화를 상징하니까 세계 평화를 지키겠다는 비유적 의미!”
앞에서 쫑쫑거리는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크라이어의 입가에 희미하지만 묘하게 일그러진 미소가 번졌다.
“사람이라.”
“몇 번이나 말했지만, 사람이야. 대체 어딜 봐서 비둘기라는 건지, 내가 아무리 회귀를 여러 번 했다지만 동물로 변한 적은 없…….”
그는 열과 성의를 다해 결코 비둘기가 아님을 토로하는 올리비아의 말갛게 갠 푸른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나……쁘지 않아.”
작게 흩어지는 크라이어의 목소리는 올리비아에게 닿지 않았지만, 그 스스로의 귀에는 똑똑히 들리고 있었다. 그래. 맞닿은 올리비아의 온기는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 *** 올리비아가 크라이어와 함께 노르덴 국왕의 시신을 향해 가고 있던 시각. 노르덴 왕궁은 조금 이른, 아니 지나치게 빠른 혼돈에 빠져 있었다.
“전하께서 서거하셨다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시오!”
“이럴 때가 아니라 후계자이신 왕세자께서!”
너 나 할 것 없이 아우성을 치는 이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