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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군생활 중에도 열심히 내년에 투자할 영화를 골랐고, 드디어 마지막 한 영화만 남겨 두고 있었다.
“미국에 있었으면 주연 배우를 만나 볼 수 있었을 텐데 이번이 아니면 다시 보기 힘든 사람이라 많이 아쉽네.”
이번 영화에는 특이하게 영화배우가 아닌 유명 운동선수가 출연했다.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은 마이크 조던이 워너브러더의 인기 TV쇼 루나 툰에 들어가 실사와 2D 애니메이션을 혼합 형식으로 만드는 작품이었다.
흥행은 마이크 조던의 인기와 루나 툰의 이름값으로 준수한 성적을 거두긴 하지만, 영화 비평가와 관객들이 하나같이 박한 평가를 내리게 된다.
한국의 유명 평론가도 스페이스 노잼이라는 짧은 감상평을 남기는데 평가야 어찌 되었든 8천만 달러의 제작비로 2억 3천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리니 투자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일단 농구를 소재로 한 영화 중에서는 가장 성공한 작품이기도 하다.
“농구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으니 일본에서 연재하고 있는 만화책 생각이 나네. 덩크슬램이야말로 명작이지.”
지금 한창 전국 대회에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덩크슬램은 1990년에 연재를 시작해 1996년에 대서사시의 종지부를 찍게 되는데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군인들도 휴가 기간에는 필수로 만화방에서 최신화를 읽고 왔고, 서로 스포하며 부대 안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덩크슬램 생각을 하다 보니 내년 초에 드디어 세상에 공개되는 포키몬스터도 떠올랐고, 그동안 야금야금 지분을 늘려와 흐뭇해지는 동민이었다.
“드디어 끝났네요. 빠르게 정리해서 다음 주에는 한국에 가도록 할게요.”
“늦게 줘서 미안해요. 그래도 전부 투자 가능한 거죠?”
“이제 능력 발휘해 봐야죠. 다니엘이 빨리 제대를 하는 것이 가장 좋긴 한데 내년에도 한 번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피곤하네요.”
닐에게 투자 관련 리스트와 금액을 이메일로 보내 주었고, 전화를 걸자 투덜거리면서도 수고했다며 다음 주에 한국에 들르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올해도 벌써 끝이 보이네요. 군 생활은 적응한 것 같던데 별일 없죠?”
“후임들이 계속 들어와서 점점 더 편해지고 있어요. 이러다 나가기 싫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절대 말뚝 박으면 안 돼요. 제시카 데리고 가서 농성할 테니 꿈도 꾸지 말아요.”
동민은 농담 삼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군 생활이 편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우정의 부대 촬영 팀을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역 맛집을 투어했고, 방송국에서도 동민의 편의를 봐주는 데다가 후임들은 동민을 신처럼 모시고 있었기에 꽤나 만족스럽게 지내고 있었다.
부대 특성상 외부 출입도 비교적 자유로웠고, 동민을 터치하는 선임이 없어서인지 잘 풀린 군번을 만끽하며 부대 소개 영상을 찍다 보니 벌써 연말이 다가왔다.
“으… 한국은 왜 이렇게 추운 거죠?”
“이상하게 군부대가 바깥보다 더 추운 것 같더라고요.”
따뜻한 로스앤젤레스에서 주로 살아온 닐은 겨울의 군부대 날씨에 힘들어했다.
“여기 제시카가 부탁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겨울 방학에 오려고 했는데 부모님께 허락을 못 받아서 기운이 없어 보이더라고요.”
“그럴 것 같았어요. 내년에 휴가 받으면 내가 간다고 전해줘요. 나도 선물을 주고 싶은데 군대에서는 딱히 줄 만한 게 없네요.”
제시카는 직접 만든 삐뚤빼뚤한 벙어리장갑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동민에게 보내 주었고, 보고 싶다는 장문의 위문편지도 함께 들어 있었다.
볼일은 마친 닐은 준비해온 서류에 동민의 사인만 받고 너무 춥다며 바로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닐이 돌아가고 동민은 부대 행사가 많은 연말을 정신없이 보냈다.
다사다난했던 95년도가 끝나고, 국방부의 시계가 흘러 1996년의 새해가 밝아왔다.
“새해에 첫 방문객으로는 상상도 못 한 사람이 왔네요. 여긴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
“내가 자금이 급해서 지분을 조금 정리하다 보니 자네가 최대 주주더라고. 지금까지 준비해 온 프로젝트가 대성공을 거두었고, 기업공개를 했는데 자세한 내용을 직접 말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찾아왔다네.”
“고맙긴 한데 보내 주신 메일로 다 확인한 걸요. IPO 하기 전에 전화도 주셨잖아요. 그나저나 사람들이 알아보지는 않던가요?”
“한국에서는 날 알아보는 사람이 없던데? 그래서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어 좋은 것 같아.”
연초부터 동민을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은 작년 말 장난감 이야기로 대박을 터트리고, 완벽한 타이밍에 기업공개를 하면서 회사를 급성장시킨 스티븐 잡서였다.
장난감 이야기는 흥행 가뭄이던 95년에도 3천만 달러의 제작비로 4억 달러에 가까운 흥행을 기록하며 박스오피스 흥행 1위를 기록했고, 애니메이션이 성공하자 연이어 감행한 기업공개는 넷스케이프를 누르고 95년 최대 규모의 IPO로 기록되었다.
덕분에 최대 지분을 가지고 있는 동민의 재산 규모가 수십 배 늘어났고, 정신없는 회계 서류가 쏟아져 나왔지만, 군대에 있다는 핑계로 대부분의 업무를 스티븐 잡서가 처리해 주었다.
그도 퓍사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했고, 성격이 많이 바뀌어 동민의 지분을 가지고 장난치지 않고 정직하게 정리해 주었다.
‘10년 뒤에 잡서가 한국에 왔으면 난리가 났을 건데 아직은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재미있네.”
동민이 스티븐 잡서와 대화하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는데 아무도 스티븐 잡서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냥 외국인이라 신기하게 살짝 보고는 지나쳤다.
애풀에서 쫓겨나 야생과도 같은 퓍사에서 구르며 경험치를 축적한 잡서는 내년인 97년에 망해가는 애풀로 복귀하게 된다.
이후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애풀을 부활시키고, 세계적인 CEO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데 지금은 동네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동민을 보기 위해 한국까지 찾아와 있었다.
“그런데 옷은 언제부터 이렇게 입은 거예요?”
“일본 서니 공장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긴 모든 직원이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더라고. 나도 유니폼 같은 걸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 가지 시도를 하다가 이것으로 정착했지. 이렇게 입은 지는 얼마 안 됐어.”
동민을 만나러 온 스티븐 잡서는 그 유명한 잡서 룩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 세인트크로이 터틀넥과 리바이스 501 청바지를 입고 뉴발란스 901 운동화를 신은 채 무테 안경을 쓰고 있었고, 아직 젊어서 그런지 사진보다 더 잘 어울렸다.
“매일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고민 안 해도 되고, 이게 꽤 편해. 너도 한번 해 봐.”
“저는 그런 거 안 해도, 국가에서 정해 준 옷만 입어야 해요. 반대로 다양한 옷을 입어 보고 싶은 군인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죠.”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옷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건 이류나 하는 것이니 언젠가는 자네도 내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스티븐 잡서가 조금은 뜬금없는 이야기를 했고, 돌아가기 전에 진관사에서 밥을 먹어보고 싶다며 예약을 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군대에서 2년간 복무를 해야 한다고 했지? 이제 일년이 다 되어 가니 내년에는 미국에서 볼 수 있겠군.”
“요즘 애풀은 어때요? 아저씨가 나오고 난 이후로 많이 안 좋은 것 같던데 괜찮은 거예요?”
“쓸데없이 사업을 너무 확장해서 손해가 큰 것 같은데 이미 내 손을 떠났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내가 만든 회사인데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요즘 주가가 많이 내려가는 것 같던데 퓍사를 성장시켜서 다시 인수해 버려요.”
“인수를 한다고 해도 적자가 너무 심각한 상황이라 회생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아직 스티븐 잡서는 내년에 자신이 애풀로 복귀한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동민이 만약 복귀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았고, 그는 일단 퓍사에 집중하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감옥에 가는구나.”
“내가 살면서 이런 장면을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세상이 많이 변하는 것 같아.”
잡서가 돌아가고 내무실에서 뉴스를 보고 있던 동민은 전직 대통령 두 명이 비자금 문제로 구속되는 장면을 보았고, 다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며 수군거렸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현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키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고, 작년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하나회를 없애 버리더니 금융 실명제까지 진행하면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뜯어고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1996 대한민국은 여러 의미로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고, 어떤 미래가 다가올 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내년 말에 외환위기가 터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동민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경제나 경영 쪽에는 지식이 전무하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지금 고민해 봤자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내년에 제대하고 생각해 봐야겠다.”
일단은 생각을 미루고, 다음 우정의 부대 소개 영상 촬영을 준비했다.
토니 스캇 감독과 마이크 베이 감독이 다녀간 이후로 방송국에서 동민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국방홍보원지원대에서도 후임을 많이 보내주면서 더욱 뛰어난 영상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당연히 토니 스캇 감독처럼 본격적인 홍보 영상까지는 만들지 못했지만, 그에게 배운 것들을 응용해 부대 영상을 다양한 스타일로 만들었고, 그 덕인지 우정의 부대 시청률이 나날이 높아져 갔다.
방송국과 영화판에서도 우정의 부대 소개 영상의 훌륭함을 눈치채고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MBS에 많은 문의가 들어갔고, 특히 토니 스캇 감독과 마이크 베이 감독이 만들었던 육군 홍보 영상은 보는 이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그로 인해 대한민국 군대 홍보 영상을 수집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났고, 군대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좋아지면서 대한민국 군대의 위상이 많이 올라갔다.
“롹 아미 티셔츠가 인기리에 판매된다는 걸 지금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
미래에는 지금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한국 남자의 인기가 올라가게 되고, 군대에 다녀온 든든하며 강인한 이미지가 외국 여성에게 이상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ROK ARMY라고 적혀 있는 군용 티셔츠가 매번 완판될 정도로 인기를 끌게 된다.
한국 여성들은 군대 이야기를 하면 기겁을 하지만, 외국 여성들은 군대 이야기를 하면 눈을 반짝이며 들어주는 미래가 펼쳐지기에 동민은 그때를 위해 최대한 멋있는 군대 영상을 많이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국방의 의무를 수행했다.
그렇게 동민이 국위선양을 위해 진심으로 영상을 만들다 보니 의도치 않게 동민의 이름이 동종 업계에 퍼져나가게 되었고, 예상외의 인물이 동민을 찾아왔다.
“당신이 우정의 부대 소개 영상을 만들었다는 분이군요.”
“네. 제가 담당하고 있기는 한데 누구시죠?”
서른쯤으로 보이는 좋은 인상의 남자가 찾아왔고, 처음 만났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외모에 동민이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저는 얼마 전에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이제 막 충무로에서 조연출과 각본 활동을 시작한 영화인입니다. 우정의 부대 오프닝 영상과 얼마 전에 공개되었던 공군, 해군, 육군 홍보 영상을 보고 현장 경험을 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직접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얼굴과 목소리, 말투를 듣자 동민의 기억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고, 설마 하는 마음에 말을 더듬으며 이름을 물어보았다.
< 153 > 끝
ⓒ 돈많을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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