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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 직원의 안내를 받아 국장실에 들어가자 아주 익숙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직접 보기는 처음이군. SBC 국장 김명중이라고 하네.”
“반갑습니다. 김동민입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가 왜 여기 계시는 건가요?”
“내 후배인데 정작 방송국 있을 때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가 서대진과 아이들이 활동하면서 자주 만나게 되었지. 오늘도 찾아와 자네가 우리 방송국 기획 드라마인 샌드 시계에 출연한다며 투자를 하고 싶다고 하더군.”
한국에서는 닐이 도와줄 수 없기에 아직 어린 동민이 투자를 할 수 있을까 걱정하긴 했는데 아빠가 미리 수를 써 놓은 것 같았다.
“무려 10억이나 투자를 하겠다고 하더군. 거절하기엔 아주 유용하게 쓰일 금액이라 자네를 직접 보고 이야기하려고 불렀네. 방송국에서 직접 제작을 하는 만큼 방송 수익을 배분하는 건 어렵지만, 방영이 끝나고 2차 시장에서 유통되는 판권을 넘겨주도록 하겠네. 어떻게 생각하나?”
“방영 수익이 총 제작비의 2배를 넘기면 투자금 10억의 절반인 5억을 주시고, 2차 유통 판권 지분도 50%만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만약 2배를 넘기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그때는 투자를 잘 못한 제 탓이니 투자금을 회수하지는 않겠지만, 유통 판권 100%를 받아 가겠습니다.”
김명중 국장이 잠시 재정 이사를 부르더니 잠시 대화를 나누고는 답변을 해 주었다.
“자네 아주 훌륭한 아들을 두었군. 아직 어려 보이는데 참 대단해.”
“하하. 너무 잘나서 조금 섭섭하긴 하지만, 그래도 든든하긴 합니다.”
국장은 동민이 원하는 조건대로 계약서를 써 주었고, 잘 부탁한다며 악수를 했다.
“이번 드라마는 방송국에서 아주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거라 1/3은 이미 촬영을 마쳤다네. PD와 작가가 자네의 비중이 크지 않기에 중간에 합류하는 건 문제가 없다고 하더군.”
“저도 24부작을 찍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드라마 역사에 남을 작품이 될 것 같은데 합류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명중 방송 국장은 똑똑하고 예의 바른 동민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고, 마지막으로 사인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뱀파이어랑 인터뷰에 출연하면서 사인을 요청하는 사람이 조금 생겼기에 미리 만들어 둔 멋있는 사인을 해 주고 국장실에서 나왔다.
“아빠는 국장님이랑 조금 더 이야기하다 갈 테니 집에서 보자구나.”
“네. 저는 드라마 촬영장으로 가 볼게요. 집에서 봬요.”
드라마 현장으로 가자 김 PD와 송 작가가 있었고, 동민에게 어떤 캐릭터를 맡게 되는지 설명해 주었다.
“암시장에서 장사꾼으로 시작해 카지노 회장으로 성장한 윤재용 회장의 수하로 들어갈 걸세. 전권과 결탁해 정치 자금을 상납하는 대신 카지노 업계를 주도하는 회장인데 그의 오른팔인 이종도의 히트맨이라고 생각하면 되네.”
“암살자지만 조금 차갑고 비열한 캐릭터인데 소화할 수 있겠어요?”
“뱀파이어와 비슷한 느낌이라서 어렵지는 않겠네요.”
윤회장 밑에서 윤혜린의 보디가드로 일하는 백재희와는 은근 신경전을 벌이는 라이벌 관계로 이종도가 윤혜린을 납치할 때 구하러 오는 백재희를 죽이는 역할이었다.
최만수 배우가 맡은 박대수와도 사이가 좋지 않게 나오는데 그와 신경전을 벌이다 괴롭히고 보복을 당하는 장면도 있었다.
“역할이 역할이다 보니 액션 장면이 많은데 괜찮겠어요?”
“몸 쓰는 건 자신 있어요. 액션 감독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대본을 받은 동민은 금방 대사를 숙지했고, 한쪽에서 액션 연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황정리 무술 감독님. 이번에 새로 합류하게 된 김동민이라고 합니다.”
“자네가 이염걸에게 사사받았다는 그 친구인가? 바로 시험을 해 봐도 괜찮겠는가? 수준을 알아야 장면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홍콩에서 나름 인지도가 있는 황정리 무술 감독은 이미 동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홍콩에서 활동할 당시 성용과 이염걸이 한국인이 자신에게 동민에 관해 물어보았던 것이다.
잠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푼 동민은 준비가 끝났다며 황 감독에게 사인을 보냈고, 두 사람은 대련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살살 하도록 하지. 괜찮다 싶으면 단계를 높이도록 하겠네.”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다른 자세를 취하며 서로를 견제하며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황 감독이 먼저 달려들어 화려한 발차기를 보여 주었다.
동민은 몸을 비틀며 발차기를 피하고 주먹을 내질렀고, 허점으로 빠르게 뻗어오는 주먹을 황 감독이 손바닥으로 밀며 거리를 벌렸다.
“반사 신경이 괜찮고, 자세가 아주 안정적이군. 조금 화려한 동작을 할 수도 있나?”
서로의 실력을 확인한 두 사람은 난이도를 올리기로 했고, 동민이 손발을 화려하게 뻗으며 빠르게 공격하자 황 감독도 큰 동작으로 합을 맞춰 주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군. 이번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 중 자네가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네.”
“감사합니다.”
“와~~~~! 멋있다!”
두 사람의 화려한 대련을 구경한 배우와 스태프들이 환호했고, 동민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동민을 칭찬하던 황정리 무술 감독이 구석에서 검도 연습을 하고 있는 이종재를 불렀다.
“종재 군. 이쪽으로 와 보게나. 여기 이 친구는 드라마에서 자네와 가장 많이 합을 맞출 동민이라고 하네.”
“반갑습니다. 이종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동민은 깍듯하게 인사하는 20대 초중반의 이종재를 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기억 속에 이종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여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대배우였는데 지금은 데뷔를 준비 중인 신인이었다.
거기다 아직 인기를 얻지 못해 무명에 가까운 상태였다.
“이 친구는 설정상 죽도를 휘두르는 거로 나오는데 자네는 어떤 무기를 쓰고 싶나? 선호하는 거라도 있는가?”
“드라마 특성상 사시미가 가장 좋겠지만, 심의에 걸릴 수 있으니 각목이나 야구 방망이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화려하고 폭력적인 효과를 보여 주기에는 먼지가 날리고 부러지는 각목이 가장 좋긴 하지. 일단 주먹을 쓰지만, 종종 각목을 사용하는 것으로 하겠네.”
동민은 이종재와 합을 맞추어 보았고, 그의 자세와 동작을 조금씩 수정해 주었다.
동민의 실력이 훨씬 더 뛰어났기에 이종재에게 맞추어 주었고, 이전과 비교해 확실히 멋있는 동작으로 바뀌었다.
샌드 시계는 젊은 남자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만큼 격투 장면이 많이 들어갔는데 단 한 가지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 드라마로 인해 학생들의 장래희망에 조직 폭력배가 상위에 등장하게 되고, 폭력 미화라는 지적을 받지만, 폭력적인 장면에는 남자들의 피를 끓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샌드 시계가 몽골에서도 큰 인기를 끌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조직 폭력배 시스템도 함께 넘어가게 된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다들 컨디션 관리 잘하고 내일 보도록 하지.”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동민과 이종재가 출연하는 장면이 없어 무술 연습만 했고, 내일은 커다란 집단 격투 장면을 촬영한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스튜디오에 도착하자 카지노에서 조직 폭력배들끼리 집단 전투 장면을 찍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 동민 군 자네의 비중이 꽤 있다네.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최대한 멋있는 장면을 만들어 주게나.”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다 함께 리허설을 했는데 동민이 합류하면서 화려함이 한껏 살아났다.
“잠시만요. 너무 잘생겨서 이질감이 드는데 얼굴에 커다란 흉터를 그리는 건 어떨까요?”
송작가가 동민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더니 너무 눈에 들어온다며 잘생겨서 위화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녀의 지시대로 뺨에 기다란 흉터를 그리자 비열함이 더해졌고, 조금 더 역에 어울리는 얼굴이 되었다.
“마스크가 너무 튀어서 이상했는데 이제 훨씬 괜찮군. 그럼 녹화를 시작하도록 하지.”
스턴트 배우들이 대거 참여한 집단 격투신은 화려하면서도 비장하게 촬영되었고, 모두들 크게 만족했다.
스타 배우이자 주인공인 최만수가 계단에서 직접 구르며 몸을 아끼지 않는 연기를 선보였고, 다들 자칫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장면을 진심으로 연기하며 촬영 했다.
“컷! 아주 좋아. 다들 고생했습니다.”
난이도가 높은 장면을 성공적으로 촬영했고, 배우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자네 몸이 정말 가볍군. 정말로 뛰어난 주먹꾼 같았어.”
“감사합니다. 그쪽도 액션 장면이 잘 어울리시던데요? 카메라에 많이 잡히실 것 같아요.”
보호대를 풀며 정비하고 있는 동민에게 익숙한 얼굴의 배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는 김보승이라고 하네. 만나서 반가워.”
“저는 김동민입니다.”
남성적인 캐릭터로 유명해지는 의리파 김보승도 샌드 시계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고 있었다.
이 드라마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성장하는 이들이 아주 많이 출연하고 있었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었다.
동민과 스턴트 배우들이 정비를 하는 동안 주인공 최만수와 고연정은 바로 다음 장면을 촬영했고, 딱히 무리를 하지 않은 동민은 구석에서 그 장면을 구경했다.
“필요 없어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아버지인 윤 회장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윤 회장이 남긴 카지노가 몰락할 상황에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다시 재기한 태수는 혜린을 도와주기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해 카지노에 투자를 하는데, 혜린은 지금 상황이 자신과 윤 회장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태수가 만든 상황이라 믿고는 그를 쏘아붙였다.
긴장감이 넘치는 연기를 펼치는 가운데 최만수는 이 드라마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 중 하나가 되는 말을 했다.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복잡한 이해관계와 오해로 꼬여있는 상황에서 최만수가 내뱉은 말은 시청자의 가슴을 울리게 되는데 동민도 현장에서 직접 보니 살짝 소름이 돋았다.
“크~! 현장에서 직접 보면 배우가 뿜어내는 기운이 더해져 티비로 보는 거랑은 맛이 다르다니까. 배우랑 배역이랑 너무 잘 어울리네.”
최만수는 샌드 시계에 출연하면서 상남자 이미지가 너무 굳어져버려 배역을 받는데 고생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그와 잘 어울리는 캐릭터였다.
특유의 허스키하면서 거친 말투와 대사, 표정이 어우러져 태수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탄생하였고,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시청자들은 그에게 빠져들게 된다.
“컷! 아주 좋아! 수고하셨습니다.”
역에 몰입되어 있는 배우들은 NG 없이 능숙하게 연기를 펼쳤고, 시간이 촉박한 만큼 하루에 아주 많은 장면을 정신없이 촬영해야 했다.
이번에는 이종재가 묵묵히 고연정을 뒤에서 바라보며 지켜주는 장면을 촬영했고, 아직 그의 연기가 살짝 어색하긴 했지만, 오히려 재희라는 역에 더 맞아 떨어지면서 매력적인 캐릭터가 완성되었다.
그런 그를 죽이는 동민은 드라마가 나가면 국민 악당이 될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차피 제대하면 바로 미국으로 돌아갈 거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 134 > 끝
ⓒ 돈많을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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