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
샌드 시계는 SBC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로 박정희 유신정권 말기부터 제6공화국 출범까지를 배경으로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묘사한 첫 드라마였다.
조금은 자극적인 폭력 장면이 공중파 드라마에 나오긴 하지만, 실제 사건과 가공의 인물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대한민국 현대사를 극적으로 그린다.
“SBC방송국이 개국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독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제작하고 있다고 하더구나. MBS에서 일하던 김중학 PD가 내 선배였는데 네가 뱀파이어랑 인터뷰에 나오는 걸 보고 꼭 출연을 해 달라고 계속 연락이 오더구나.”
가장 좋아했던 한국 고전 드라마 두 편이 여명의 눈망울과 샌드 시계였는데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할 생각이 없었던 동민의 마음이 흔들렸다.
“어떤 역으로 캐스팅하신데요?”
“여주인공이 고연정 배우인데 그녀의 보디가드 역할이라고 하더구나. 지금 캐스팅해 둔 배우가 있긴 한데 아직 어리고 신인이라 연기력이 너무 부족해 대사를 넣을 수가 없다고 하네. 그래서 일단은 송지아 작가가 대부분 침묵하는 역할로 대본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중학이 형이 불만인가 봐.”
고연정의 보디가드 역이라면 재희라는 캐릭터로 동민도 잘 알고 있었다.
미래에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으로 성장해 오징어 놀이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되는 이중재가 샌드 시계에서 이 역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연기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고연정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같은 역할로 묵묵히 그녀의 뒤에서 지켜주다 마지막에 목숨을 잃게 되는데 대한민국 모든 여성의 가슴에 불을 지르게 된다.
그의 인기로 인해 대한민국 검도 도장에는 등록생이 넘쳐나게 되고 미팅을 가면 남학생들이 모두 벙어리가 되어버릴 정도로 주인공을 넘어서는 인기를 얻게 되는 역할이었다.
“너무 비중이 큰 것 같네요. 엑스트라나 정말 단역 정도면 출연할 생각이 있다고 전해 주세요.”
이중재가 맡게 되는 재희의 역이 욕심나긴 했지만, 괜히 출연했다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젊은이가 될 수도 있고, 대배우가 되는 이중재의 미래가 바뀔 수도 있기에 거절했다.
“액션이 많이 들어가는 드라마라서 너를 원하는 것 같더라. 네가 뱀파이어랑 인터뷰에서 격투 장면을 멋있게 소화하지 않았니. 계속 물어보기에 황비옹에게 직접 사사받은 직계 제자라고 자랑했더니 출연해 달라고 끈질기게 연락을 하더구나.”
샌드 시계는 조직 폭력배들이 집단으로 사나이의 친목을 다지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꽤나 화려한 장면을 연출한다.
무술감독을 홍콩에서 직접 모셔오는데 화려한 발차기와 홍콩 느와르 액션의 노하우를 가진 취권의 악역스타 황정리를 모셔온다.
그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인 출신 홍콩 액션배우였는데, 그의 지도하에 주연 배우와 출연진의 호쾌한 액션으로 시청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된다.
“그런데 왜 주 4회나 방영하는 거예요? 24부 시리즈인데 6주 만에 끝나겠네요.”
“주연 배우들이 비싸기도 하고 장기 계약을 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하더구나. 특히 고연정 배우는 이번 작품을 마지막으로 재벌가에 시집을 가고 은퇴한다고 하던데, 결혼식 날이 잡혀 있어서 서둘러야 한다더라.”
배우들의 사정도 있었지만, 방송국에서는 동시간에 방영하는 타 방송사들의 드라마를 완전히 누르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방송국의 의도대로 샌드 시계 때문에 타 방송사의 드라마는 굴욕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게 된다.
반면 샌드 시계는 평균 시청률 46%라는 기록을 세우고, 가장 높은 최종회는 64.5%를 기록하는데 유명한 대사로 길이 남게 되는 “나, 지금 떨고 있냐?” 대사를 하는 순간 시청률은 74.4%까지 올라간다.
아직 SBC가 지방 송출을 하지 않는 시점이라 과대평가되기도 하고, 서울 지역 300 가구에서만 시청률을 집계했기에 정확도 면에서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매우 높은 시청률이긴 하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20~30대 남성들도 드라마를 보기 위해 회식이나 야근을 삼가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통에 귀가 시계라는 별명이 붙기도 한다.
샌드 시계는 월화수목 주 4회 방영을 하는데 드라마가 나오는 시간에는 서울 밤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확 줄어들게 된다.
가장 재미있는 일화는 수도권에서 복무하던 군인이 제대하고 고향인 지방에 SBC 방송이 안 나온다는 이유로 집에 가기 싫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여보세요?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잠깐만. 동민아. PD 선배랑 담당 작가가 집으로 찾아와서 직접 이야기하겠다는데 괜찮니? 군대 가려고 한국에 온 아들에게 미안하지만, 이 사람들이 너무 막무가내라서.”
“네. 괜찮아요. 제가 직접 이야기해야 조율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잠시 후 김중학 PD와 송지아 작가가 집으로 찾아왔고, 동민을 보고 얼굴에 화색을 띄며 좋아하다가 거실에 편하게 앉아 있는 리버 피닉서를 보고 기겁했다.
“반갑네 동민 군. 자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좋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군대를 가야 해서 스케줄이 맞을지 모르겠네요.”
“짧고 굵게 촬영할 거라 최대한 스케줄에 맞출 수 있을 걸세.”
“그런데 저분은 왜 여기 계시는 거예요?”
송지아 작가가 리버 피닉서를 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한국 음식에 관심이 생겨서 저희 집에 지내면서 요리를 배우고 있어요. 조만간 돌아갈 거니까 드라마 출연은 불가능해요.”
“외국인이 출연하는 장면은 없으니 그럴 일은 없을 걸세.”
송지아 작가는 리버 피닉서가 출연한다면 대본을 수정할 수도 있다며 아쉬워했지만, 만약 가능하다 하더라도 방송국에서 출연료를 감당하기 힘들 것이었다.
동민이야 워낙 부자라 딱히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아빠를 위해 잠시 출연해 줄 수 있었다.
“비중이 꽤 있는 보디가드 역을 원하신다고 들었는데 시나리오를 읽어 볼 수 있을까요?”
“송작가. 대본 가지고 왔지?”
송지아 작가가 초반부 대본을 건네주었고, 동민이 빠르게 읽고는 맡고 싶은 역을 말했다.
“백재희 역할은 너무 주목을 받을 것 같네요. 저는 비중이 더 적은 빌런, 그러니까 악당 역을 맡고 싶어요. 백재희가 윤혜린을 지키느라 싸우는 장면이 많이 나올 것 같은데 그와 라이벌 관계로 백재희를 괴롭히다가 죽이는 역할을 만들어 주세요.”
“시나리오 초반부에는 백재희가 죽는다는 내용이 안 들어 있는데 어떻게 알고 있니?”
송작가와 김PD가 대본은 대충 본 것 같은 동민이 전체적인 전개와 백재희의 죽음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라했다.
“우리 아들이 USC 영화 학과를 다니고 있고, 할리우드 유명 감독들이랑 친하게 지내서 시나리오에 관해서는 엄청 똑똑하다고. 이번에 개봉한 폴프 픽션 알지? 거기에도 조감독으로 참여 했는데 엔딩 크레딧에 보면 다니엘 킴이라고 나오는데 그게 동민이야.”
아빠의 아들 자랑 겸 설명을 들은 두 사람은 백재희의 라이벌이 되는 빌런이 있으면 이야기가 더 입체적으로 살아나면서, 중심 스토리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걸 이해했다.
“그 정도라면 금방 대본을 수정할 수 있겠네요.”
“악역으로 나올 수도 있는데 괜찮겠니?”
“최대한 드라마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캐릭터로 만들어 주세요. 엑션에도 자신 있으니 격투 장면에 마음껏 쓰셔도 돼요.”
백재희 역할을 시키려고 했던 원래 목적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지만, 동민의 의견을 따르는 것도 좋아 보였고, 김PD와 송작가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없는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늦어도 내일모레면 수정된 대본이 나올 거다. 방송국 드라마 제작국에는 등록해 둘 테니 내일 SBC 본사에 들러 기본 설명을 들으렴.”
“마지막으로 한 가지 요청을 해도 되나요?”
“출연료라면 배역이 작긴 하지만, 중견 배우급으로 나갈 거다.”
“출연료는 안 주셔도 괜찮아요.”
동민의 요청 겸 제안을 들은 김 PD와 송 작가가 너무 놀라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
“입대할 녀석이 원래 습관을 못 버리고 또 투자를 하려고 하는구나.”
“입대하는 아들을 드라마에 출연시키는 건 아빠잖아요. 시나리오를 보니 드라마가 성공할 것 같아서 미리 투자를 좀 해 두려고요.”
샌드 시계의 대박 행진을 잘 알고 있는 동민이기에 제작비 투자가 가능한지 물어보았고, 항상 예산이 부족한 PD와 작가는 귀가 솔깃했지만, 방송국에서 직접 제작하는 드라마이기에 외부 투자가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제품 홍보를 할 수 있는 PPL이라면 어떻게든 만들어 보겠지만, 동민이 홍보할 거라고는 미국에서 만들고 있는 김치밖에 없는데 한국에서 김치 PPL을 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건 제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군요. 국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알려 드리겠습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군요.”
동민은 거절하기에 너무나도 큰돈을 제시했고, 갑자기 존댓말을 했다.
드라마의 퀄리티를 높이고 싶은 PD와 작가의 귀에는 달콤한 유혹으로 들렸다.
큰돈이라고 했지만, 미국에서 투자하던 금액에 비하면 1/10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두 사람이 돌아가자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리버 피닉서가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다.
그도 영화계에 오래 있었던 만큼 집으로 찾아온 두 사람이 방송에 관련된 사람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너 두 달 뒤면 군대 가는 거 아니야? 그런데 드라마에 출연한다고? 한 회만 잠깐 나오는 거야?”
“아마 초반부에 등장해서 후반까지 계속 나올걸?”
“미니 시리즈 드라마를 만든대?”
“24부작으로 만든다고 했어.”
리버 피닉서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24부작 드라마를 만들려면 1년이 걸리는데 동민이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에 24부작을 만든다고 하자 황당하게 생각 했다.
“한국 사람들 성격이 조금 급해서 가능할 거야. 무조건 빨리빨리 해야 하는 민족이거든.”
“하긴 여기서 지내다 보니 다들 바쁘게 사는 것 같더라.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몇 달 동안 한국에 지내면서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에 적응한 리버 피닉서는 24부작 드라마를 한 달 만에 만드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드라마 같은데 안 나가도 괜찮은데 괜히 아빠 때문에 우리 아들이 고생하는 구나.”
“괜찮아요. 조금만 출연 할 거고, 촬영도 빨리 끝난다고 하니까 군대 가기 전에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거기다 드라마 시나리오가 좋아 보이는 게 욕심이 나더라고요.”
엄마가 동민을 하면서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하며 아빠를 노려보았고, 무안해진 아빠는 전화 통화를 해야겠다며 방으로 도망갔다.
다음 날 아침 동민이 SBC 방송국에 찾아가자 방송국에서 사활을 걸고 준비 중인 드라마라서 그런지 전담 스태프가 빠르게 설명을 해 주었다.
“우와! 최만수랑 박승원이다. 고연정도 있네.”
할리우드 배우만 보다가 한국 배우를 보니 이상하게 연예인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대본을 맞춰보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 그들도 뱀파이어랑 인터뷰에 출연한 동민을 알아보고는 다가왔다.
“혹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배우 아닌가요?”
“네. 김동민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동방예의지국인 한국에서도 특히 선후배 관계가 중요한 배우들에게 큰 목소리로 깍듯이 인사를 하자, 그들이 웃으면서 동민을 챙겨 주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 한국에는 무슨 일로 왔나요?”
“군대에 가려고 귀국했는데 김 PD님이 출연해 달라고 연락하셔서 단역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보니 정말 잘생겼네. 뭔가 외국물 먹은 느낌이 나.”
그들과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스태프가 달려와 동민을 찾았다.
“국장님께서 찾으십니다. 국장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133 > 끝
ⓒ 돈많을한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