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거로 해요. 제시카를 만나러 가야겠어요.”
“쇼우걸 시나리오를 보다가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다니 엉큼하네요.”
“우리는 순수한 사이라고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요.”
투자할 영화를 고르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나기도 했고, 제시카가 보고 싶어져 학교가 끝난 그녀를 데리러 가기로 했다.
사실 쇼우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제시카도 댄스 영화에 출연했던 것이 떠올랐고, 그녀가 춤추는 모습을 상상하자 보고 싶어진 이유도 있었다.
예쁘고 동민을 아주 좋아해 주는 제시카가 좋기는 했지만, 아직 중3이라 살짝 죄책감 비슷한 게 들기도 해서 정말 순수하게 데이트만 하고 일찍 집으로 보내주었다.
“오빠가 데리러 오니까 너무 좋다. 친구들도 잘생긴 남자 친구가 직접 데리러 와줘서 많이 부러워해.”
“바빠서 자주 못 오는 게 미안하네. 오랜만에 떡볶이 먹으러 갈까?”
이제는 순대까지 적응한 제시카와 떡튀순을 먹고, 둘만의 드라이브를 즐기다 그녀의 집 앞으로 갔다.
“여름에 한국 갔을 때 재미있었는데. 다음에 또 가자.”
“그래. 내년에도 같이 가자.”
“동대문에서 쇼핑했던 것도 너무 좋았어. 지금도 그때 어머니가 사 주신 옷 입고 있는데 친구들이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더라구.”
헤어지기 아쉬워 제시카와 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묘한 분위기가 흐르더니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지다가 동민은 갑자기 오한이 들어 집을 바라보니 창가에서 제시카의 두 사람을 아버지가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께서 기다리시네 어서 들어가자.”
동민은 재빨리 제시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그녀가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돌아갔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영화 전공 수업을 듣고 세탁소로 가자 누군가 동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니엘 여자 친구 생겼다면서? 나는 언제 소개시켜 줄 거야?”
“소개시켜 줄 생각 없는데? 리오가 너무 잘생겨서 싫어. 네 취향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싫어.”
오랜만에 리오나르도 디케프리오가 세탁소로 놀러 와 동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드디어 주인공으로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어.”
“알고 있어 연기가 어렵겠던데 괜찮겠어?”
“이래 봬도 연기는 자신 있다고. 작년에 더 힘든 연기도 했었잖아.”
작년 조니 데브와 함께 출연한 길버트 그래이프에서 연기하기 어려운 지적 장애인 역을 아주 잘 펼치면서 남우조연상 후보에까지 올랐고, 리오는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연기에는 훨씬 더 진심인 남자였다.
“그런데 키가 더 자랐네?”
“작년부터 키가 자라더라고, 180 중반까지 자라더니 이제는 멈춘 것 같아. 너도 나랑 비슷한데?”
리오는 빠르게 노화가 오는 백인과는 다르게 아주 천천히 성장했고, 20살인 지금도 팔다리가 가늘고 얼굴에는 어린 티가 많이 남아 있었다.
올해와 내년이 그의 리즈 시절이라는 평가가 있는데 동민이 보아도 왕자님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내가 출연하는 영화에는 투자할 거야?”
“리오가 나오긴 하지만, 사실 인기가 있을 주제는 아니잖아. 그래도 연기력을 알리기에는 좋은 기회니까 열심히 해 봐.”
리오나르도 디케프리오가 출연하는 영화는 다이어리 바스켓볼이라는 제목으로 방황하는 청소년 드라마였다.
농구부에서 활약하는 리오가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약물에 중독되어 인생을 말아먹는 내용이라 주제가 어둡고, 연기하기 아주 어려운 배역이었다.
친한 리오가 출연하니 투자를 할까 생각도 했지만, 미국 매출 230만 달러, 해외 매출 240만 달러라는 아주 적은 수익을 거두어들인다.
그나마 제작비가 초 저예산인 200만 달러라 손해는 보지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남는 것도 없는 영화였다.
“그래도 리오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인데 투자하는 쪽으로 해 볼게.”
“정말? 네가 투자하면 이 영화도 대박 나려나? 사실 사람들이 좋아할 내용은 아니라서 흥행은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첫 주연이니 열심히 해 보려구.”
동민이 투자를 하겠다고 하자 리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렇다고 많이는 하지 않고 딱 10만 달러만 투자할 생각이었다.
“다이어리 바스켓볼이야 어떻게든 잘하겠지만, 진짜 걱정은 이클립스 토탈인데 정말 괜찮겠어?”
“당연하지. 이 역을 받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 줄 알아? 원래는 리버 피닉서가 나오기로 했는데 개인 사정으로 못 나와서 심사숙고 끝에 나 한 테 넘어온 거라고.”
전생에는 리버 피닉서가 랭보 역을 맡기로 했다가 사망하는 바람에 리오나르도 디케프리오가 대신 캐스팅되는데, 이번에는 자선사업으로 바빠서 촬영을 못 하게 되었다.
이클립스 토탈은 영국과 프랑스가 합작으로 만든 영화로 10대의 나이에 천재적인 재능으로 프랑스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써 내려간 시인 랭보와 그의 연인이자 시인 폴 베를렌의 사랑을 그려낸 작품이었다.
리오나르도 디케프리오가 아르튀르 랭보 역을 맡았는데 문제는 이 영화가 지금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동성애를 다룬 작품이었다는 데 있었다.
리오가 20살인 지금 아주 진한 동성애 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동민은 아무리 좋은 기회가 오더라도 동성애 연기는 할 자신이 없었다.
“이번에 연기력을 보여주면 다음에는 확실히 좋은 배역이 들어올 거야. 열심히 해봐.”
내년에 두 편의 영화로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는 디케프리오는 그다음 해 전 세계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영화를 찍으면서 세기의 꽃미남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런 그가 지금은 세탁소 휴게실에 편하게 앉아 돼지 두루치기를 먹으며 바보 같은 표정으로 농담을 하고 있었다.
“우히히. 역시 여기 음식이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맛있는 것 같아. 한국 재미있었는데 또 가고 싶다. 올여름에 디주니 꼬마애들 데리고 다녀왔다면서?”
“여자친구 데리고 가려면 어쩔 수 없이 다 함께 가야했어.”
“4살이나 어린 여자 친구를 사귀다니 변태 같군. 하하.”
마흔이 넘는 나이에도 20대 초반의 금발 모델만 골라 가며 사귀는 리오나르도 디케프리오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괜히 열받았다.
그렇게 동민이 리오와 티격태격하며 놀고 있는데 닐이 세탁소로 찾아왔다.
“어? 리오도 있었네. 오랜만이야. 작년에 길버트 그레이트는 잘 봤어. 연기 정말 잘하더라.”
“닐도 오랜만이에요. 다니엘이랑 일하려고 온 거예요?”
“내년 제작될 영화 투자 결정을 해야 하는데… 다니엘, 다음에 다시 올까요?”
동민은 잠시 리오를 바라보다 괜찮으니 지금 하자고 했다.
리오나르도 역시 동민이 투자 결정을 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좋아하며 빠르게 돼지 두루치기를 먹으며 밥을 한 그릇 더 퍼왔다.
“어제까지는 라스베이거스 배경의 화끈한 영화였는데 이번에는 어떤 영화인가요?”
“이번에는 반대로 한적한 시골 마을 배경의 조용한 영화예요.”
동민이 닐에게 시나리오를 건네자 리오도 관심을 보였다가 두 사람은 모두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로맨스 영화이긴 한데 중년의 미적지근한 불륜이라니 너무 지루하지 않아?”
“클린트 웨스트우드가 나오긴 하는데 이런 미적지근한 로맨스가 성공할까요?”
“누가 남자 아니라고 할까 봐 여자의 마음을 너무 모르는 거 아니에요? 이 책이 재작년에 얼마나 팔렸는 줄 알아요? 미국에서만 850만 부나 팔렸다고요. 이건 무조건 대박 날 거예요. 특히 중년의 여성들 사이에서는 엄청나게 인기가 있을 거예요.”
“그래서 외모가 평범한 메릴 스트립이 여주인공으로 나오는 거군요. 일반 여성들이 감정 이입을 더 하기 쉽겠네요.”
“닐은 이제 조금 감이 잡히나 보네요.”
아직 어리고 잘생긴 리오는 미묘한 중년의 불륜에 대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 동민이 선택한 영화는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불륜 영화로 뽑히고, 내가 하면 로맨스 니가 하면 불륜이 되는 메디슨 컨트리의 다리였다.
클린트 웨스트우드가 감독과 주연을 맡았고, 여주인공은 메릴 스트립이 연기하는데 제작비 2,400만 달러로 만들어져 미국에서 7,150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해외에서도 1억 1천만 달러가 넘는 흥행을 기록하면서 총 1억 9천만 달러라는 대박을 터트린다.
제작사는 웨스트우드가 공동으로 설립한 말파소 프로덕션과 스티브 스필버그 소유의 엠블린 엔터테인먼트에서 만든다.
클린트 웨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의 섬세한 연기와 잔잔한 음악, 감각적인 연출로 찬사를 받게 되고, 특히 프란체스카의 두 자녀인 마이크와 캐롤라인이 어머니의 비밀을 알게 된 후 반응들이 변해가는 모습과, 빗속에서 로버트가 남편과 차 안에 타고 있던 프란체스카를 애절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그녀가 차 문 손잡이를 잡고 갈등하다가 끝내 현실을 선택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하긴 로맨스 소설의 중년 여성 팬은 구매력이 엄청나긴 하죠. 클린트 웨스트우드가 영화만 잘 만든다면 분명 인기를 끌긴 하겠네요.”
“제작비는 아마도 웨스트우드 감독님이랑 스필버그 감독님이 많이 부담했을 거예요. 그래도 가능한 최대로 지분을 확보해 주세요.”
메디슨 컨트리의 다리에 투자를 결정하고 다음으로 선택한 영화는 올해 스피디가 대박 나면서 할리우드 스타로 성장한 카이누 리부스가 출연하는 영화였다.
“이번에도 잔잔한 멜로 영화네요?”
“두 남녀의 인연과, 가족애가 아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더라고요. 멕시코 시골 와이너리의 풍경이 합쳐지면 분명 아름다운 영화로 완성될 거예요.”
동민의 이야기를 듣고 리오가 영화 시나리오의 축약본인 시놉시스를 읽고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너무 잔잔한 이야기 같은데? 다니엘이 영화에 투자를 한다기에 재미있는 영화일 줄 알았는데 전부 로맨스 영화만 투자를 하네?”
“매번 로맨스에만 투자를 하는 건 아닌데 오늘은 이상하게 로맨스만 나오네.”
이번에 선택한 영화는 구름 위의 산책이라는 멜로 드라마로 퇴역 군인인 카이누 리부스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 혼전 임신을 하고는 보수적인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여자를 만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였다.
여러 애틋한 장면이 있지만, 수확을 앞둔 시기에 갑자기 포도밭에 서리가 내리게 되고 불을 피워 부채질을 하는 장면이 너무 아름답게 나오고, 발로 포도를 밟으면 으깨는 장면도 로맨틱하게 나와 유명해진다.
제작비 2천만 달러로 만들어져 최종 9천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나쁘지 않은 흥행을 기록하지만, 카이누 리부스에게는 대표 로맨스 작이 되는 영화다.
“여기에도 500만에서 1천만 달러를 투자하는 거로 하죠.”
“우와! 다니엘 부자라더니 정말 돈이 많구나.”
“하하. 이 정도로 놀라면 안 되는데. 다니엘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얼마인지 파악하기도 힘들 정도란다.”
닐이 쓸데없는 말을 하려고 해서 한번 노려봐 주고는 입을 다물게 할 생각으로 다음 영화 시나리오를 건네주었다.
“설마 이번에도 로맨스 영화는 아니겠지?”
“빙고~ 이번에는 스피디로 유명해진 카이누 리부스 말고, 산드라 블락이 나오는 로맨스 영화야.”
< 123 > 끝
ⓒ 돈많을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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