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5 >
항상 한국에 갈 때는 비지니스석을 타고 다녔지만, 이번에는 닐의 강요로 퍼스트 클래스를 탔다.
동민이 학생이라 평소 사업비 지출이 거의 없다 보니 꼭 일등석을 타라고 했고, 처음 타보는 일등석은 편하면서 어색했다.
“한국에 도착했는데도 피곤하지 않은 걸 보니 일등석이 좋긴 하네.”
이제 동민도 고등학생인데다 아빠가 너무 바빠 동민은 택시를 타고 집이 있는 압구정으로 이동했다.
일 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단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었다.
“서대진과 아이들.”
어딜 가나 서대진과 아이들 음악이 흘러나왔고, 모든 티비 프로그램에서는 작년 9월에 데뷔한 신인 그룹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 왔어요.”
“잘 왔니? 비행은 괜찮았고?”
“퍼스트 클래스는 확실히 다르네요. 아빠는요?”
“오늘도 늦게 들어올 것 같더구나. 요즘 많이 바쁘단다.”
엄마는 김치 공장 세팅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 있었고, 아빠는 서대진과 아이들이 열풍을 일으키면서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영화 쪽 일은 미팅하고 계약만 맺으면 되어 시간적 여유가 꽤 있는 편이였는데 음악은 가수를 직접 관리해야하기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서대진과 아이들은 3월 14일 즐거운 토요일은 토요일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데뷔했는데 신드룸을 일으키게 되는 건 4월 11일에 있었던 특종 연예TV라는 방송이었다.
임벽천이 사회를 보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신인가수 앨범을 소개하고 가수가 나와 노래를 부르면 평론가들이 현장에서 바로 피드백을 주는 구조였다.
해외에서는 록과 힙합 음악이 유행하고 있다고 해도 한국의 대중가요계는 성인가요와 발라드 위주의 시장이었고, 서대진과 아이들이 데뷔하기 전에는 대진아의 ‘거울을 안 보는 여자’가 1위를 하고 있었다.
중년층이 독식하고 있던 가요계를 서대진이 나타나면서 10대와 20대의 취향을 저격했고, 대한민국의 문화 대통령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현철이 엄청 유명해졌더라. 요즘 젊은 애들이 춤추고 노래 따라 하고 난리도 아니야.”
아직은 기성세대와 약간의 마찰을 빚고 있었지만, 대중가수는 인기로 가치가 빛나는 법이고, 90년대는 10대와 20대의 인구가 넘쳐나는 시기였다.
트로트와 발라드에 지쳐 있던 10대들은 어렵게 해외 음악을 구해 듣고 있는데 그러던 중 빠른 템포와 현란한 댄스로 무장한 서대진과 아이들의 등장은 가뭄 끝의 단비와 같았다.
“아이고 우리 아들 왔구나. 아빠가 요즘 아들 덕분에 아주 잘 지내고 있단다.”
“살이 빠지셨네요. 그래도 잘 되니까 좋으시죠?”
“가수를 키우는 게 이런 재미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네. 일 때문에 정신없긴 해도 살맛이 나는구나.”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소속사 대표인 아빠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고, 서대진만큼 관계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아진 아빠였다.
“처음에는 방송국 인맥으로 겨우 방송에 내보냈는데 10대들 반응이 폭발하는 바람에 이제는 서로 나와 달라고 난리구나.”
을의 위치에서 갑으로 변해가는 아빠는 요즘 일할 맛이 난다며 좋아하셨고,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셨다.
다음 날 아빠를 따라 회사로 가자 서대진과 아이들이 안무 연습을 하고 있었다.
“형. 데뷔 축하드려요. 성공할 줄 알았어요?”
“동민이 한국 왔구나. 벌써 일 년이나 지났네. 그동안 워낙 많은 일이 있어서 엄청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동민이 성공적으로 데뷔한 서대진과 아이들을 축하하며 선물로 미국에서 구입해 온 음악 앨범을 수십 장 건네주었다.
현철은 처음 보는 힙합 가수와 댄스가수 음반에 관심을 보였고, 다른 멤버들은 마이클 잭선과 앰씨 햄버의 친필 사인이 들어있는 앨범을 보고 욕심을 부렸다.
“아. 여긴 준호 형이랑, 형섭이 형이야. 형, 애는 동민이라고 사장님 아들이에요.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방학마다 한국 오고 있어요.”
다른 두 사람의 인사를 받았지만, 사장님의 아들이라는 소리에 서먹해했고, 동민도 딱히 두 사람과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현철과 일부러 음악 이야기만 나누었고, 그는 벌써 2집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데뷔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다음 앨범 준비하는 거예요?”
“이런 건 빨리빨리 해 줘야지. 느낌이 왔을 때 해야 하는 거라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네. 미국 음악 베꼈다고 평론 쪽에서도 뭐라고 하고 말이야.”
“성인가요도 전부 미국음악에서 넘어 온 건데 무슨 상관이에요. 그러면 미국 음악에 한국 전통악기를 넣으면 뭐라고 못 하겠네요.”
동민의 말에 잠시 현철이 고민하더니 좋은 생각 같다며 비트를 북이나 장구로 쳐야겠다고 말했다.
“베이스보다는 멜로디에 한국 악기를 넣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꽹과리나 태평소 같은 거로요.”
그가 잠시 고민에 빠지자 다른 멤버 두 명이 다가와 올 초에 있었던 콘서트 질문을 했다.
“사장님이 뉴키즈 온더 타운 내한공연 네가 연결시켜 줬다던데 정말이야? 그리고 마이클 잭선이랑도 친하다면서?”
“콘서트 갔다가 알게 되었는데 그쪽 회사에서 이미 내한을 몇 번 했더라고요. 뉴키즈 온더 타운은 규모가 커질 것 같아서 아빠한테 신경 써 달라고 했던 거예요. 직접 만나 봤죠?”
“응. 사장님이 리허설이랑 연습실에도 갈 수 있게 해 주셔서 많이 배울 수 있었어. 멋있더라.”
서대진과 아이들 컨셉이 외국의 힙합과 보이밴드, 거기다 서대진의 록 베이스까지 섞은 거라 뉴키즈 온더 타운이 도움 될 것 같아 연결시켜 주었었다.
뉴키즈의 공연은 다행히도 전생과 다르게 안전하게 마무리되었다.
혹시나 사고가 날까 봐 아빠에게 여러 번 확인 전화를 했고, 아무 사고 없이 잘 진행되어 오지랖을 부린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공연을 많이 해서 무대 매너나 공연 장악력이 다르죠?”
“규모도 엄청 크던데?”
“거긴 전문 안무가가 붙어서 트레이닝을 해 줘서 그래요. 한국은 아직 그러기는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안무의 중요성을 깨달고 비보이랑, 안무가 발전할 거예요.”
아직 한국은 비보잉의 걸음마 단계였지만, 흥의 민국이라 그런지 금방 세계적인 그룹이 탄생하게 된다.
서대진과 아이들과 오래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는데 그들의 바쁜 스케줄 때문에 헤어져야 했다.
“이번에도 홍콩 다녀 올 거야?”
“아니요. 이번 여름에는 홍콩 말고 일본에 갔다 올 거예요.”
“일본? 거기도 아는 감독이랑 배우가 있는 거야?”
“일본은 영화 말고, 노란색 몬스터 잡으러 가야 해서요. 오래 안 있을 거니 또 봐요.”
현철과 인사를 나누고, 한국에서 부모님과 함께 일상을 보낸 동민은 혼자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일본어야 전생에 영상자료로 마스터 했기에 기본적인 독해와 대화가 가능해 혼자 가도 무리가 없었다.
동민이 일본에 도착해 내린 공한은 도쿄 나리타 공항이 아닌 오사카에 있는 간사이 공항이었다.
공항에서 바로 JR 열차를 타고 교토역으로 이동한 다음 미나미구에 있는 닌덴토 본사로 향했다.
“사람 보내 준다니까 혼자서 잘 찾아왔네요?”
“일본어 할 줄 알아서 어렵지 않았어. 잘 지냈지?”
“형을 일본에서 만나니까 조금 이상하긴 하네요.”
닌덴토 본사에서 슈스케가 맞이해 주었고, 동민의 부탁대로 닌덴토 본사 투어를 시켜 주었다.
닌덴토는 1889년 화투를 제조하는 개인 상정으로 창업했는데 이후 3대에 이르기까지 사업을 확장해 가며 명맥을 이어 갔다.
1950년대에는 세계에서 최초로 플라스틱 트럼프 카드를 생산해 히트를 치고, 1959년에 디주니 캐릭터를 인쇄한 트럼프 카드를 발매해 또다시 세계적인 히트를 치게 된다.
닌덴토는 일본 최대의 카드생산회사가 되었고, 세계 최대 카드생산회사를 목표로 사업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회장이었던 야마우치가 세계 최대 카드 제조회사인 미국의 USPC에 견학을 갔다가 생각보다 초라하고 조그마한 회사라는 것에 충격을 받고 사업의 다각화를 꾀하게 된다.
택시, 러브호텔, 유모차, 디즈니 캐릭터 사업도 하게 되고 인스턴트 라이스도 발명하지만, 모든 사업이 실패하면서 닌덴토는 도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야마우치 사장은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느낌으로 아이들의 놀이기구를 만들기로 하고 울트라 시리즈 장난감을 개발하고, 히트를 치면서 다시 회사를 살려냈다.
하지만, 아날로그 장난감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고 전자 게임기 사업으로 방향을 틀게 되고 1980년에 미국에 닌덴토 오브 아메리카를 설립해 레이더 스코프 게임기를 수출하게 된다.
게임이 인기를 끌지 못하면서 악성 재고가 쌓이게 되었고, 회사가 다시 파산 위기에 놓이자 개발은 끝났지만 라이센스 문제로 출시하지 못하고 있던 빠뽀이 게임기를 급하게 수정해 미국에 테스트 삼아 수출했다.
이때 만든 게임이 당키콩이라는 게임인데 이 게임이 히트를 치면서 위기의 닌덴토를 다시 구원해 주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 있는 닌덴토 본사는 월세를 계속해서 미납하고 있었는데 이에 분노한 건물주 마리아 시갈리가 자주 찾아와 강력하게 항의를 했다.
매번 찾아와 꼬장을 부리는 건물주를 보고 직원들은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이때 만들어진 게임이 닌덴토의 간판이 되는 마리아 시리즈였다.
당키콩에서 등장하는 악당 노동자의 외모를 마리아 시갈리와 최대한 비슷하게 바꿔버리고 이름도 아예 마리아라고 지어버렸다.
이후 닌덴토에서는 이 마리아라는 캐릭터를 여러 게임 여기저기 투입시켜 버렸고, 처음에는 건물주를 흉보는 마음에 만들었다가 점점 정이 들어 마리아 시리즈를 만들게 되었다.
마리아가 성공하기 전에 당키콩이 엄청난 흥행을 일으키면서 월세도 못 내던 닌덴토는 연 1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달성하며 수백 평의 회사 건물을 보유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때 즘 북미에는 아타리 쇼크가 터지면서 게임산업계 전체가 증발해 버렸고, 이 타이밍을 노려 닌덴토에서는 가정용 게임기를 만들어 낸다.
아타리 쇼크로 폐허가 된 북미 게임계를 닌덴토에서 만들 NES가 접수하게 되고 무너졌던 게임업계를 다시 회복시킨다.
게임계의 절대 강자로 1차 전성기를 누리던 닌덴토는 90년 슈퍼 페밀리컴을 내놓으면서 계속 압도적인 비디오 게임 시장의 점유율을 유지하지만, 이때부터 닌덴토의 갑질이 시작되었다.
닌덴토의 갑질에 뒤통수를 맞은 서니가 독자적인 게임기를 개발하게 되는데 아직은 닌덴토에 붙어서 갑질을 당하고 있는 시기였다.
“이런거 말고 새로 개발하거나, 만들고 있는 캐릭터 같은 건 없어?”
슈스케를 따라 닌덴토 역사관을 돌고, 본사 구경을 하던 동민은 찾고 있는 캐릭터를 보기 위해 직접 물어보았다.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개발 부서는 둘러보셨잖아요.”
닌덴토 회사의 조직도를 살펴본 동민이 한 부서를 찾아냈고, 여기 가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게임 후리크? 사무실 위치가 도쿄라고 적혀 있는데요?”
교토로 헛걸음을 한 동민은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이동했다.
< 085 > 끝
ⓒ 아마기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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