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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용의 화려하고 몸을 불사르는 그만의 코믹 액션과 주연발의 의협 같은 매력을 앞세운 느와르가 주도하는 홍콩영화계에 B급 분위기를 풍기는 루저의 미학이 담긴 언더독 같은 영화가 등장한다.
주성취가 나오는 작품의 스토리는 대부분 비슷한데 밑바닥 서민으로 시작해 온갖 개고생 후에 인생이 풀리거나, 성질 더러운 재벌이나 상류층이 몰락한 다음 개과천선하는 내용이다.
거기다 주성취 사단이라고 불리는 조연 배우도 대부분 함께 출연하는데 영원한 콤비 오맹달과 중년 황일비, 안경 전계문 등 같은 배우가 그의 영화에 항상 함께 나온다.
올해 도신을 비롯해 도박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주성치는 내년에 처음으로 영화 주연으로 출연하게 되는데 그 작품이 홍콩 도박 영화를 패러디 한 도성이다.
도성에서 슬로우 모션을 흉내 낸 등장신은 동민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장면 중 하나일 정도로 아이디어가 기발했다.
도성으로 스타덤에 오른 주성취는 91년과 92년 단 2년 동안 12편의 영화에 출연하게 되고 그가 나오는 영화가 역대 홍콩 박스오피스 기록을 갱신하게 된다.
“홍콩의 중국 반환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홍콩 영화계는 어떻게 될까요?”
“중국의 지원으로 영화 산업이 더욱 성장하거나 반대로 정부의 간섭으로 몰락하겠지. 며칠 전 있었던 천안문 사태를 보면 두 번째가 가능성이 높아 보이네.”
“그런 것 치고는 홍콩에서 영화를 너무 많이 찍는 것 같은데요?”
“지금까지 해 온 것이 있으니 마지막 불꽃같은 거야.”
주성취는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홍콩 영화계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맞아 영화로 홍콩 시민들에게 희망과 즐거움을 줘야해. 원래 영화란 그런 것이야.”
실제로 주성취의 영화는 홍콩 반환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홍콩사람이 겪는 정체성 불안을 그나마 웃음으로 잊게 해 준다.
동민은 주성취와 영화 이야기를 계속 했고, 그가 얼마나 영화에 진심인지를 확인 할 수 있었다.
특히 이소룡 영화 이야기를 할 때는 그의 모든 작품과 자세한 뒷이야기까지 알고 있었고, 자신이 홍콩 소룡회라는 이소룡 팬클럽의 회장이라는 것 까지 알려 주었다.
“혹시 미국에 올 일이 있으면 연락 주세요.”
“아직 홍콩에서도 자리 잡지 못했는데 내가 미국까지 갈 일이 있을까?”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잖아요. 분명 내년에는 성공 하실 거예요. 유명해지면 삼합회가 괴롭힐 거니 조심하시고요.”
주성취가 빠르게 유명해 지면서 돈줄인 그에 대한 삼합회의 간섭과 협박이 너무 심해져 94년 캐나다 이민을 추진하게 되지만, 삼합회의 회방인지 몰라도 캐나다 이민국에서 불법 조직과 연류 되어 있다는 이유로 그의 이민을 받아주지 않는다.
동민이 이민을 시켜줄 정도로 힘이 있지는 않지만, 돈은 충분히 있기에 이민 실패 후 그가 직접 영화사를 차릴 때 도와줄 생각이었다.
다행히 그가 극적인 성공을 하기 바로 전에 만날 수 있었고,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고 해어졌다.
홍콩에서 만나야 할 사람은 대부분 만났고, 해야 할 일도 했지만, 아직 중학생인 동민은 행동이 자유롭지 않기에 홍콩까지 찾아온 이번 기회에 최대한 많은 일을 해야만 했다.
동민이 홍콩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89년 지금 홍콩에서 가장 많은 부수를 발행하는 명보라는 신문사 였다.
“안녕하세요. 사장님을 뵈러 왔는데요?”
“선약이 있으신가요?”
“다니엘로 되어 있을 거예요.”
신문사 로비의 여직원이 어린 동민이 신문사 사장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이상하게 생각 했지만, 이번에도 스필버그 찬스를 이용해 사장과 약속을 잡은 동민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동민의 이름을 확인한 여직원이 사장실까지 직접 안내해 주었다.
“어서오시오. 내가 독대한 손님 중 가장 어린분이로군.”
“안녕하십니까. 선생님을 만나뵙게되어 영광입니다.”
동민이 찾아간 신문사 명보의 창립자인 사량용 사장은 1924년 중국 저장성 하이닝현에서 명문거족인 사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청나라 강희제 때 문신으로 지낸 사신행의 직계 후손이며 웅정제 때 문자옥으로 처형당한 유명한 문인 사사정의 자손이기도 했다.
대대손손 수많은 진사를 배출하고, 현대에는 중국과 홍콩, 대만에서 고위 관료와 대학교수를 키워낸 명문 학자 가문에서 자란 그는 유년 시절부터 수준 높은 학문을 익혀 뛰어난 인문학적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내가 유명했던가?”
“미국에도 중국인과 동양인이 많이 살고 있으니까요. 선생님을 모르는 글쟁이들은 없죠.”
“하하. 고맙긴 한데 내 글을 읽기에 자네는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닌가? 거기다 영어로 된 작품은 원작의 느낌이 없을 건데.”
“제가 한국인이라서 다행히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을 읽을 수 있었네요.”
그의 첫 작품은 1955년에 쓰인 서검은구록이라는 책인데 청나라 건륭제가 사실은 웅정제의 친아들이 아니며, 건륭제에게는 만주족이 아닌 한족의 피가 흐른다는 야사였다.
예전부터 대체역사 소설은 사람들에게 묘한 재미를 주었고, 한족과 이민족의 갈등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데뷔부터 독자 사이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된다.
두 번째 소설인 백혈검은 이자성의 난을 배경으로 명나라 마지막 천자 숭정제에게 살해당한 명장 원숭황의 아들 원승지가 무림에서 무공을 갈고닦아 아버지의 복수를 꾀한다는 줄거리로 이 역시 대성공을 거뒀다.
매년 한 편씩 집필한 사량용은 57년 실제 역사, 지리, 인물을 바탕으로 대하역사소설을 쓰면서 큰 인기를 모으고, 영화와 TV드라마, 게임으로 까지 만들어 지고, 중국과 해외에서 대학 교재로 까지 쓰이게 된다.
북송이 여진족 금나라와 벌인 전쟁에서 패한 뒤 남송을 건국하고, 주전파와 주화파의 갈등, 칭기즈칸의 몽골 통일과 송 멸망까지를 쓴 소설의 제목은 사조영웅전이었다.
“선생님은 하이닌현 위안화진의 명문 사씨 가문 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상업 소설을 쓰면 가문에서 싫어하지 않으셨나요?”
“그래서 내가 가명을 썼지. 나중에 나라는 걸 밝혔을 때는 집안 어른신도 이미 내 소설을 재미있게 읽으셔서 다행히 별 탈 없이 넘어갔단다.”
자신의 본명 중 마지막 자인 룡을 파자해 금용이라는 필명은 만든 그는 자신의 작품을 더 널리 알리는 새로운 방법으로 1959년 홍콩에서 명보를 창간했다.
낮에는 신문사 경영자 겸 편집자로, 밤에는 무협소설 작가로 이중생활을 시작한 그는 신작 신조협료를 명보에 독점 연재한다.
그의 소설이 유명해 지는 만큼 신문의 판매량도 늘어나고, 신생 매체인 명보는 치열한 홍콩 언론계에서 빠르게 입지를 다진다.
의천도룡가를 연재하면서 사조영웅전, 신조협료와 함께 한국에서는 영웅무로 불리는 사조감부곡 시리즈를 완성하게 된다.
“그래서 자네는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는가?”
“허무적이고 비극적인 색채가 강한 소요강호도 매력적이지만, 화려한 무공 묘사가 압권인 천룡팔부가 읽는 맛은 나는 것 같아요.”
정과 사의 대립은 모호하다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 소요강호는 영화 동방불패의 원작이기도 하고, 김용의 소설 중 드물게 허무하고 비극적이었다.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장을 소재로 한 천용팔부는 거란인 이면서 한인으로 자란 비극적 영웅 소붕, 무예를 싫어하면서도 수많은 절기를 몸에 익히는 단예, 파계한 소림사 승려 허죽, 멸망한 ‘대연국’의 후예로 왕조 부흥을 꿈꾸는 모용복이 주인공인 소설로 북송과 거란족 사이 요 분쟁기를 시대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었다.
“나이가 어리지만, 내 작품을 자세히 알고 있구나.”
영화 영상을 만들면서 금용 특집도 여러 편 편집한 만큼 그에 대한 조사를 많이 하기도 했고, 어려서 부터 금용의 소설을 좋아했기에 동민은 그와 즐거운 대화를 이어갔다.
“왜 1972년 완결한 녹적기 이후로는 집필을 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녹적기가 청나라 최전성기를 배경으로 실존 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상상력과 절묘하게 엮은 신필의 경지를 보여주긴 했지만, 더 이상 새로운 작품이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쉬워요.”
“하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한데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건 생명을 단축시키는 힘든 작업이란다. 나도 이제 늙었고, 신문사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니.”
언론사 사주로서 회사 경영에 힘쓴 그는 선간지와 월간지, 주간지까지 창간하고, 출판사도 설립한 후 언론사 최초로 홍콩증권거래소에 상장까지 하게 된다.
무협지로 상업적인 성공에 문학적 성취를 달성하고 언론사업 성공이라는 힘든 성취를 이룬 그는 무협작가 보다는 언론가, 평론가로 불리길 원했다.
작품의 영상화에 관심을 많이 보이는 걸 보면 자신의 소설을 부끄러워했던 것은 아니고, 계속 다음 것에 도전하는 스타일이였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2005년 81세의 나이로 석사를 취득하고 86세에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정도로 학구열도 높았다.
“선생님의 상황은 이해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작가의 글을 더 이상 못 읽는 다는 건 너무 아쉬워요.”
“가끔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싶기는 하지만, 너무 유명해진 만큼 두려움도 크더구나. 대중의 기대치가 너무 높아 졌어.”
완성도가 높은 녹적기를 마지막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지 않은 만큼 다음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요구가 빗발쳤지만, 여러 이유로 김용은 차기작을 발표하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그는 다음 작품을 만드는 일 없이 94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마블 코믹스의 아버지인 스탠 리도 2주 뒤 세상을 떠난다.
“만약 내가 새로운 작품을 만들게 되면 넌 무엇을 해 줄 수 있니?”
“정말요?”
“만약에 말이다. 그냥 가정을 한다면 말이지.”
“그럼 제가 선생님 작품으로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 게요.”
“스필버그 감독이 너를 극찬 한 걸 보면 거짓을 아닐 것 같구나.”
동민은 왠만 해서는 하지 않는 자기 자랑을 했고, 금용도 동민의 할리우드 생활을 재미있게 들었다.
“그 귀여운 꼬마 드류 배리무어와 친구라니 신기하구나. 나도 어드리 햅번은 만나보고 싶었는데 그건 부럽군.”
“할리우드에 놀러 오시면 제 친구들을 소개시켜 드릴게요.”
동민과 즐겁게 대화를 나눈 동민을 금용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자신의 책상으로 가 서랍에서 서류 뭉치를 가지고 나왔다.
“그래. 어떻게 생각하면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 수도 있구나. 이건 선물로 줄 테니 네 마음대로 하거라.”
금용에게 두툼한 원고지를 받은 동민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게 무엇인지 물어 보았다.
“10년 전 쯤에 쓴 작품인데 장백산을 배경으로 여진과 고려 이야기를 엮은 거란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썼는데 중국 본토에서는 싫어 할 것 같아 패기 했단다.”
“이걸 저한테 주셔도 괜찮은 거예요?”
“한국인이라니 선물로 주마. 수정해서 영상화 하는 건 괜찮은데 내 이름으로 출간 하는 건 안 된다.”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 한 대작이 우연히 동민의 손에 들어왔다.
< 049 > 끝
ⓒ 돈많을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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