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9 >
큰 눈에 두툼한 입술, 긴 팔다리를 가진 앤젤리나는 어린 나이에도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잠시 고민하는 동민에게 앤젤리나가 말했다.
“우리 같은 학교 다니는데 너 본 적 있어.”
“그래? 난 너 본 기억이 없는데?”
“난 항상 혼자 조용히 있거든. 학교에 안 가는 날도 많고.”
예쁜 외모의 앤젤리나였지만,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그늘이 자리해 있었다.
“난 아놀드 아저씨랑 친해서 초대받았는데 넌 여기 어떻게 왔어?”
“엄마가 아놀드 배우랑 아는 사이라 같이 왔어. 그런데 구리스에서 촬영은 어땠어? 나도 영화를 찍어보긴 했는데 아이들이 없어서 재미없었는데 구리스는 친구들이 같이 나와서 부럽더라.”
앤젤리나는 82년도에 라스베이거스의 도박사라는 영화에 토시라는 역으로 출연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내성적으로 보이던 앤젤리나는 학교에서 유명한 동민을 만나서 그런지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호응을 해 주다가 결혼식이 시작되어 입을 닫았다.
“난 결혼식이 싫어.”
“남의 결혼식에 와서 그런 말 하면 안 돼. 축하해 줘야지.”
“아빠가 엄마랑 날 버리고 가서 결혼식이 싫어.”
앤젤리나는 그렇게 말하더니 식장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녀의 엄마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기에 동민이 앤젤리나를 찾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있으라고 말하고는 그녀를 찾으러 갔다.
“앤젤리나, 초콜릿 딸기를 가지고 왔어. 이거 먹고 기운 내.”
앤젤리나는 피로연장 구석에 앉아 무릎을 껴안고 있었다.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초콜릿이 코팅된 딸기를 건네주자 아무 말 없이 받아먹더니 밝은 표정이 돌아왔다.
딸기를 맛있게 먹고 있는 앤젤리나를 보자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동민은 앤젤리나가 했던 말을 유추해 그녀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넌 미래에 한국인 며느리를 맞이할 사람이야. 내가 잘 보살펴 줄게.’
도톰한 입술을 가진 깡마른 소녀는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으로 성장하는 앤젤리나 졸리였다.
각진 턱과 튀어나온 광대뼈, 두툼한 입술을 가진 그녀는 엄청 예쁜 외모는 아니었지만, 남들과 확연히 다른 독보적인 비주얼과 매력으로 오랜 기간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 자리를 유지하게 된다.
“아빠랑 사이가 안 좋나 봐.”
“아빠는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인데 나쁜 사람이야. 나랑 엄마를 버리고, 괴롭히기까지 했어.”
졸리의 아버지는 유명 배우인 존 보이트였는데 두 사람의 관계는 할리우드에서 아주 잘 알려져 있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졸리는 우울한 성장기를 보내게 되고, 결국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관심병이 있는 존 보이트가 그녀의 사생활을 폭로하고 뒷담을 여러 번 까는 바람에 관계가 최악으로 발전한다.
‘도굴꾼 영화에서 두 사람이 사이좋은 부녀 관계로 출연해서 더 재미있긴 했지.’
동민은 그녀를 만나기 바로 전까지 여자친구를 만드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앤젤리나를 꼬셔 볼까 하고 잠시 생각했지만, 레즈비언에 남자와 결혼을 3번 하는 그녀의 연애사가 떠올라 금방 포기했다.
‘내가 감당하기엔 힘든 여자야.’
비록 미래의 신부 후보에서는 탈락했지만, 그렇다고 친해지는 걸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래에 아들의 진학을 위해 한국 방문도 여러 번 하는데 지금부터 한국 문화를 조기 교육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빠르게 계획을 세운 동민이 엘젤리나를 잘 다독여 결혼식장으로 다시 데리고 갔고, 그녀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앤젤리나가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제가 학교에서도 봤는데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더라고요.”
“걱정해 주어 고맙구나. 나도 오늘 앤젤리나가 처음으로 다른 아이에게 먼저 말을 걸어 놀랐단다.”
“제가 잘 아는 태권도장이 있는데 거기에 가면 인성 교육도 받을 수 있고, 체력 단련도 되어서 앤젤리나에게 아주 좋을 거예요. 졸리는 어머니를 닮아서 예쁘니까 호신술을 익혀야 할 텐데 거기 보내시면 친구도 만들 수 있어요.”
어차피 액션 배우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 그녀이니 지금 부터 태권도를 배워두면 평생 도움이 될 것이었다.
삼촌의 세탁소 가까이 있는 할리우드 태권도장을 추천했고, 동민의 기가 막힌 영업에 졸리의 어머니는 결혼식이 끝나고 바로 그녀와 함께 태권도장에 등록하러 갔다.
“도장 바로 옆에 우리 삼촌 세탁소가 있으니 태권도 끝나면 놀러 와.”
“정말 놀러 가도 괜찮아?”
“응. 불편하면 내가 도장으로 갈게.”
태권도장에 다니면 동민을 자주 볼 수 있다고 하자 앤젤리나도 태권도를 배우겠다고 했다.
며칠 뒤 앤젤리나는 할리우드 태권도장에서 한국 예절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앤젤리나 왔구나. 이제 한국말로 인사 잘하네. 다니엘은 스튜디오에 배달 갔는데 금방 돌아올 거다. 거기 앉아서 기다리거라.”
동민이 자전거를 타고 세탁소로 돌아왔고, 앤젤리나와 함께 숙모가 차려준 밥을 먹었다.
“이제 김치 잘 먹네?”
“처음에는 이상했는데 먹다 보니 계속 생각이나.”
“도장은 다닐만해?”
“발차기하다 보니 아무 생각도 안 나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
발차기가 스트레스 해소에 좋은지 몰랐는데 재미있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앤젤리나와 학교 이야기를 하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속보가 뜨면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이야기가 나왔다.
“어? 체르노빌이 이때 폭발했나?”
아직 구소련 연방이 남아 있었고, 독일도 서독과 동독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건물이 무너진 거야? 그런데 사람들이 왜 저런 옷을 입고 있어?”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했는데 방사능이 유출돼서 보호복을 입고 있는 거야.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이니 여긴 안전하니까 걱정 안 해도 괜찮아.”
“다니엘은 똑똑하구나.”
앤젤리나는 동민과 대화하면 할수록 보통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동민도 성인 앤젤리나의 이미지가 워낙 강했고, 세탁소에서 어른들과의 대화에 익숙해 별생각 없이 편하게 말한 건데 10살짜리가 보여줄 수 없는 통찰력을 종종 보여 버렸다.
“주말에는 태권도장 안가지?”
“응. 주말에는 엄마랑 집에 있을 거야. 넌 세탁소 계속 나오는 거야?”
“아니. 난 이번 주말에 전투기 타러 갈 거야. 후훗.”
동민은 어린 졸리에게 영화 촬영장 현장 답사를 간다며 자랑했다.
항공모함을 탑승하지는 못하지만, 촬영이 이루어지고 있는 해군 비행장에 출입을 허가 받았다.
“내일 가지고 가려고 숙모한테 김밥 싸달라고 했는데 몇 줄 챙겨줄 게 집에 가지고 가서 먹어.”
“고마워. 다니엘은 상냥하구나.”
“저번에 준 라면이랑 같이 먹으면 더 맛있을 거야. 그리고 라면은 뭐랑 같이 먹어야 한다?”
“라면은 김치랑 같이 먹어야 한다.”
앤젤리나에게 한식 교육을 마치고, 다음날 김밥 수십 줄을 싸 들고 톱건 촬영장으로 갔다.
“다니엘! 오랜만이다. 그사이 또 자란 것 같은데?”
“탐 아저씨도 더 멋있어졌네요.”
“아저씨라니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20대 중반의 탐 크루스가 동민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아저씨라고 하기에도 형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나이라서 그냥 삼촌이라고 불렀다.
“숙모가 드시라고 김밥 싸주셨어요. 이건 일본 롤초밥이 아니고 한국 스타일 김밥이에요.”
“킴팝. 알겠어. 미세스 킴이 만들어 주셨으면 당연히 맛있겠네. 잘 먹었다고 안부 전해드리렴.”
“저분들도 같이 출연하시는 분들인가요?”
동양인 꼬마가 탐과 친하게 있는 모습을 다른 배우들이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동민은 젊은 발 킬머와 아직은 무명의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 맥 라이언도 발견했다.
“함께 촬영하는 친구들이지. 소개해 줄게. 이쪽은 할리우드 세탁소의 다니엘이야. 감독들이랑 친하니까 잘 보이는 게 좋을 거야.”
“안녕하세요. 다니엘이라고 해요. 우리 숙모가 간식을 싸주셨는데 하나씩 드릴게요.”
배우와 스테프에게 김밥을 나눠 주다가 맥 라이언 차례가 되자 살짝 고민되었다.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CF도 찍게 되는 그녀인데 미국 인터뷰에서 한국에 대한 망언으로 단번에 이미지가 추락하면서 안티가 급증하게 된다.
‘아직 10년 넘게 시간이 남았으니 그 전에 할리우드에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야겠다.’
“이상하게 생기긴 했는데 정말 맛있구나. 촬영하면서 먹기도 편한 것이 앞으로 더 부탁할 수도 있겠군.”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숙모가 감독님한테도 안부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미국 사람 입맛에 맞도록 숙모가 햄치즈 김밥을 싸주셨고, 호불호 없이 모든 사람이 맛있다고 했다.
특히 촬영 스테프들이 바쁘게 일하면서 하나씩 꺼내 먹기 좋다며 만족했다.
“촬영장 분위기가 밝네요. 영화는 잘 만들고 계신 거죠?”
“투자자님께서 이야기한 데로 영상미랑 음악에 특별히 더 신경 쓰고 있지. 미해군에서 지원해 주니 촬영이 편하긴 하구나. 그래도 안전사고를 가장 조심하며 찍고 있단다.”
없이 실재 전투기와 항공모함으로 촬영하기에 긴밀한 협력이 가장 중요했고, 시나리오를 함께 검토한 미해군은 토니 스콧 감독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었다.
“전투기에 앉아 보고 싶니?”
“정말요? 제가 전투기를 타 보아도 괜찮은가요?”
“네가 어려서 하늘을 날지는 못하겠지만, 앉아 보는 건 괜찮을 거다.”
토니 감독은 동민이 도착하기 전 미군에게 미리 허가받아 두었다.
동민이 기특하게 김밥을 나눠주자 F-14 톰캣 전투기에 바로 탑승시켜 주었다.
“전원을 꺼두기는 했는데 버튼을 만지면 안 된다.”
에 올라탄 동민은 전투기 콕핏에 앉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그냥 앉기만 한 게 아니라 톱건 배우들과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전투기를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었다
여주인공인 샬럿은 실재로도 매력적이었고, 아이스맨 발 킬머는 의외로 상냥했다.
맥 라이언의 남편이자 영화에서 사망하는 콧수염 구스가 동민에게 가장 친절했다.
36년 뒤에 후속편이 만들어지지만, 전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이상했고 늙지 않는 탐 크루스가 신기해 보였다.
‘하긴 지금 모습이랑 비교하니 늙긴 했네.’
20대 초중반의 탐 크루스는 젊다 못해 어려 보였다.
촬영이 시작되자 동민은 조용히 토니 스콧 감독 옆에서 현장을 구경했고 전투기가 이륙하는 모습까지 보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기념사진을 여러 장 찍어 온 것도 좋았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지켜본 것이 더 즐거웠던 동민이었다.
금방 시간이 흘러 86년 5월 16일 톱건 영화가 개봉했고, 예상대로 엄청난 흥행을 일으켰다.
영화에 나온 가와사키 오토바이 판매량이 급증했고, 남자들은 여름이 다가오는데도 항공 점퍼를 입고 다녔다.
“후훗, 난 탐 크루스가 직접 입었던 항공 점퍼를 받아왔지. 배우들 사인까지 받았고.”
촬영장에 갔다가 엄청난 선물을 받아왔지만, 아직은 너무 어려 입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세탁소 데스크 옆에 장식해 두었고, 들어오는 손님마다 사고 싶어 했다.
“이야. 엄청난 걸 가지고 계셨군요. 제가 가지고 온 서류 보다 이 점퍼가 더 좋아 보이는걸요?”
“그래도 저는 닐 씨가 가지고 온 수표가 더 좋을 것 같은데요?”
< 019 > 끝
ⓒ 돈많을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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