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2화. 그때와는 달라. (2)
“뭐, 뭣!”
콰아아아아앙!
날아든 백색의 검기가 일거에 터져 나갔다.
상상도 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공격에 수로채의 수적들이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육편이 되어 비산한다.
가공할 검기.
창천(蒼天)의 남궁(南宮). 그 이름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가공할 검기가 이름 그대로의 푸른 하늘 아래에 펼쳐졌다.
파아앗!
선두의 수적들을 단숨에 조각내 버린 남궁도위가 단숨에 앞으로 내달린다. 그런 그의 뒤를 비장한 얼굴을 한 백색의 검수들이 채워 냈다.
“적이다!”
앞쪽에서 터져 나온 폭음. 그리고 뒤이어 달려드는 검수들을 본 수적들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이 채 대응에 나서기도 전에 또 한 번 백색의 검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다.
콰아아아아앙!
“소가주님! 힘을 아끼셔야 합니다!”
등 뒤에서 들려온 찢어지는 비명.
하지만 남궁도위는 대답하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안다. 알고 있다.
흑룡왕이 있는 곳까지는 한참 남았다는 것을. 흩어져 움직이고 있는 수적 놈들에게 일일이 검을 들이대다가는 흑룡왕을 마주하기도 전에 지치고 말 것이라는 사실도.
그래. 충분할 정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라는 말인가? 당장 검을 떨치지 않고서는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은데.
‘수로채!’
잊지 못했다. 아니, 잊을 수 없다.
그 작은 섬에 그들을 몰아넣고 사냥하듯 달려들던 수로채의 수적들을. 그 차디찬 섬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던 가족들을. 흑룡왕의 도기에 베여 천천히 저 깊은 장강 아래로 가라앉던 아버지의 마지막 얼굴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설령 이곳에 있는 모두를 잘근잘근 씹어 삼킨다고 해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건 남궁도위가 살아가는 내내 그 가슴에 박아 넣고 고통받아야 할 화인(火印)이니까.
하지만 잊지 못한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은 아니다. 죽어 간 이들을 되살릴 수는 없어도, 그 끔찍한 기억을 도려낼 수는 없어도, 죽어 간 이들의 영혼을 달랠 수는 있다.
바로 이들과 흑룡왕의 피로 말이다.
‘어리석은가?’
우우웅!
남궁도위의 검이 화답하듯 울어 댔다.
남궁도위 역시 지금 그의 선택이 그리 현명한 게 아니라는 건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이도 분명 어리석고 멍청하다 하겠지.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도장?’
사람이란 때때로 멍청할 줄도 알아야 한다. 똑똑한 것보다 중요한 건 제 가슴의 외침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그걸 알려 준 건 다름 아닌 도장 아닙니까?’
남궁도위의 입가에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래. 그걸 가르쳐 준 이는 바로 청명이다. 그러니 화내고 욕하더라도 조금쯤은 이해해 주지 않을까?
“오오오오!”
남궁도위가 커다란 사자후를 터뜨리며 앞으로 내달렸다.
“소가주님!”
“소가주! 진정하시오!”
“나를 막으려 하지 마라!”
남궁도위가 쩌렁쩌렁한 고함을 터뜨린다.
“나를 막고 싶다면, 말리려 들지 말고 내 앞에 서라! 내 검을 지키고 싶다면 너희의 검으로 길을 열어라! 그게 남궁의 방식이다!”
그 말을 들은 검수들의 눈빛이 일변한다.
말은 필요 없다.
남궁의 검수들이 서로를 밀치며 앞으로 나선다. 남궁도위의 말이 맞다. 앞에 적이 있으니 그의 검이 자꾸 적을 베는 것이다. 그의 앞에 적이 없다면 그 검을 휘두를 일이 뭐가 있겠는가?
매화도를 잊지 못하는 것은 남궁도위만이 아니다.
모두가 그곳에 자신을 두고 왔다. 모두가 그곳에 창천이라는 이름을 묻었다. 지금 그들은 그 창천이라는 이름을 되찾으러 가는 길. 누가 누구에게 양보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다.
단숨에 앞으로 달려나간 남궁길(南宮吉)이 사색이 되어 물러나는 수적의 아랫배에 검을 쑤셔 박는다.
“끄륵…….”
덜덜 떠는 그를 본 남궁길이 원한과 울분에 찬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왜 그러지? 그 잘난 화포라도 다시 쏴 보시지 그래?”
되살아난다. 그때의 기억이.
검을 들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이. 저 먼 바다 위에서 쏘아 대는 화포에 동료가 곤죽이 되는 모습을 보고 그저 울부짖어야 했던 고통이.
‘고작 이런 놈들에게!’
다시 떠오른 기억은 원한에 불을 질렀고, 그 원한은 그들의 검에 살기를 불어넣었다.
파아앗!
틀어박힌 검을 뽑아내며 적을 일도양단해 버린 남궁길이 허공에 흩뿌려지는 피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건 더러운 피가 아니다. 영광스러운 피다.
남궁세가 검수들의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그들은 지독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수련을 해 왔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그 검을 펼쳐 내지 못한다면 그 모든 수련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오오오!”
검수들이 서로 경쟁하듯 앞으로 치고 나간다.
철검십이식(鐵劍十二式).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실전적인 검술. 남궁이라는 토대 위에서 청명이라는 장인의 손길로 새로이 벼려진 검술이 수적이라는 상대를 맞아 그 진가를 드러낸다.
카가각!
섬전처럼 뻗어 나간 검이 뾰족한 아미자(峨嵋刺: 작살)를 갈대처럼 갈라 버리며 수적의 가슴에 박혀 든다.
화려한 변초(變招)를 제거한 단순하기 짝이 없는 기본 검식. 그 극한의 단순함을 추구한 검에 남궁세가 특유의 패도적인 내력이 실리는 순간, 그 단순한 검은 ‘남궁’이라는 두 글자에 어울리는 검으로 다시 탄생한다.
파아아앗!
물러나는 수적의 허리를 단숨에 끊어 낸 남궁세가의 검수가 울분에 찬 고함을 내지르려 할 때였다.
“노기를 가라앉혀라!”
남궁명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들의 귀를 파고든다.
“원한을 잊으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 원한을 풀 대상을 착각하지 마라! 아직 우리는 적에게 닿지조차 못했다!”
검수들이 서슬 퍼런 살기를 피워 낸다.
흑룡왕 적세광.
그들의 진짜 적이자, 그들의 검이 노려야 할 목표. 남궁명의 말이 맞다. 이딴 조무래기들을 죽이고 환호하기엔 그들의 원한은 너무도 깊고 무겁다.
“길을 열어라! 흑룡왕의 목을 벨 것이다!”
“예!”
남궁의 검수들이 하나가 되어 달리기 시작했다.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상황이 최선으로 풀린다고 해도 이중 절반 이상은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흑룡왕의 목을 베는 대가로 모두가 이곳에서 죽어야 한다 해도 그 누구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가주를 죽인 원수의 목을 다른 이에게 뺏기는 것이나, 그가 살아 숨을 쉬는 두려움에 비한다면 죽음 따위를 공포라 할 수 있겠는가?
각오가 육신을 철갑처럼 휘감고, 등 뒤에서 쏟아지는 기세가 그들의 정신을 타오르게 만든다.
“마, 막아라!”
“남궁세가다!”
사방에서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울려 퍼진다.
남궁세가의 출현을 감지한 수로채가 긴장된 기파를 사방으로 뿌려 댔다.
눈앞에 보이는 숲 전체가 요동치는 듯한 감각. 마치 웅크리고 있던 거대하고 흉포한 짐승이 몸을 일으키는 것 같은 압박감.
하나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추호의 머뭇거림도 없이 수로채라는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괴물을 움직이는 심장을 그들의 손으로 베어 내기 위해서.
“비켜라!”
파아아앗!
뻗어 나간 검이 수적의 목을 단숨에 날려 버린다.
검이 휘둘러지는 족족 수적들의 목이 잘려 나가고, 끊어진 팔다리가 비산한다. 남궁은 비탈을 내달리는 수레처럼 인의 장막을 뚫고 나갔다.
하지만 장강수로십팔채라는 이름 역시 그저 장강 위에서만 울려 퍼지는 허명은 아닐 터.
“놈들이 모여듭니다!”
“더 빨리 달려라!”
모두의 눈에 보였다.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수적들이 점점 그들의 앞으로 집결하는 광경이.
마치 아직 살아 발버둥 치는 사냥감의 숨통을 끊어 내기 위해 모여드는 개미 떼처럼 말이다.
그 광경이 남궁세가 검수들을 찔러 댄다.
이미 보았던 광경. 그리고 이미 통렬하게 겪어 보았던 일이다. 하나하나는 딱히 대단할 것 없는 이들이 뭉쳤을 때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그들은 이미 뼛속 깊이 체감하지 않았던가?
내달리던 검수들의 발끝이 절로 더뎌진다.
생각하고 늦춘 것이 아니다. 그들 가슴 속 깊이 잠들어 있다 깨어난 공포감이 그들의 발목을 움켜잡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우우우우우웅!
“소, 소가주!”
남궁도위의 검이 하늘을 찌를 듯 치켜 올려진다. 그리고 그 검이 백색의 광휘(光輝)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점점 더 응집되던 백색의 검기가 이내 커다란 바윗덩어리만큼 커진다.
“가주…….”
그리고 남궁도위를 뒤따르며 그 광경을 두 눈에 박아 넣은 검수들은 한 사람의 검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일 검으로 산을 부수고, 일 검으로 강을 가르던 이.
그 누구보다 제왕 같았고, 그 누구보다 패도적이었던 이.
바로 남궁황의 검을 말이다.
“오오오오오오오!”
한 번 더 그 크기를 부풀린 백색의 검기가 하늘을 꿰뚫을 듯 솟구치더니 이내 그들의 앞으로 몰려드는 수적들을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
백색의 검기가 터져 나간 곳에 존재했던 모든 것이 분쇄된다. 그 앞에 서는 것을 허락지 않는 제왕의 검. 본디 남궁의 것이었으되, 이제는 잃었던 검이 남궁도위의 손으로 재현되었다.
“막는 이는 모조리 분쇄해라! 우리는 창천남궁세가다!”
남궁도위가 말 그대로 포효한다.
그리고 그 포효가 남궁의 검수들에게 준 것이 무엇일지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오오오오오오!”
더뎌졌던 발끝에 이전 이상의 힘이 실린다. 두 눈을 강한 정광으로 채워 낸 남궁의 검수들이 이내 하나의 검이 되어 쏘아졌다.
달아날 수도, 물러날 수도 없었던 수적들이 그 몸에 흐르던 피로 그들이 나아가는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흑룡왕이시여!”
“흐음.”
멀리서 충천(衝天)하는 백색의 검기를 본 흑룡왕의 입가가 거칠게 뒤틀렸다.
어디선가 보았던 검기. 단 한 번이라도 본다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검기다. 하지만 그 검기의 주인은 다름 아닌 그의 칼 아래 차디찬 시신이 되었을 터.
검기가 솟구쳤던 곳을 빤히 바라보던 흑룡왕의 시선이 펄럭이는 제 오른 소매로 향했다.
“감히…….”
흑룡왕이 상처 입은 맹수처럼 으르렁댔다.
아무리 그가 한쪽 팔을 잃었다 한들, 고작 남궁세가 따위가 그를 노릴 줄이야. 과거의 남궁세가라면 몰라도 지금의 남궁세가가 그를 노린다는 건 치욕이나 다름없었다.
“남궁황의 아들이 남궁세가를 이끈다 했나?”
“예. 남궁도위라 합니다.”
“남궁도위라…….”
흑룡왕이 노기를 억누르고 비웃음을 흘려 낸다.
“제 주제도 모르고 짖어 대는 꼴이 꼭 하룻강아지 같구나. 설마 남궁황 같은 범 아래에서 저런 하룻강아지가 튀어나올 줄이야.”
흑룡왕이 쿡쿡 웃으며 하나 남은 팔로 제 애병을 움켜쥐었다. 그의 눈빛이 살기로 번들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들어 줘야겠지. 오늘 이곳에서 남궁의 씨를 말릴 것이다!”
흑룡왕의 두 눈에서 지독한 광기가 흘러나왔다.
파란 하늘을 모조리 검게 물들이고도 남을 짙은 광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