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6화. 괜찮을 거야. (1)
윤종은 상상도 해 본 적 없다. 설마 청명이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말이다.
대뜸 멱살을 잡혔음에도 청명은 분노하기는커녕 조금의 열기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습에 윤종은 더 거칠게 떨었다.
“어떻게 네가 그러냐? 사숙이 왜 그래야 했는지 뻔히 아는 놈이!”
그 순간 청명이 멱살을 움켜잡은 윤종의 손목을 잡아챘다.
“놔.”
“너…….”
“놓으라고.”
청명을 노려보던 윤종이 그제야 손아귀 힘을 풀었다.
“……미안하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흥분하는 바람에 해선 안 될 짓을 했다는 걸 뒤늦게 자각한 것이다.
물론 여전히 납득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머리에 피가 오른 채 청명과 드잡이질한다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것만이 분명한 사실이다.
윤종이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나는 그냥…….”
“뻔히 안다고.”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웃음 섞인 청명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 알지. 왜 그랬는지.”
“…….”
“그래서? 뻔히 아는 놈이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윤종의 눈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감사하다고 평생 땅에 머리라도 박고 살까? 아니면, 그 옆에 내내 붙어서 대신 싸워 주기라도 할까?”
“이……!”
잠시 고요해졌던 노기가 다시 끓어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청명의 눈을 본 순간 가슴속이 싸늘하게 식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눈빛을 마주하니 절로 맥이 풀려 버렸다.
그래. 청명의 말이 맞다.
청명은 백천에게 자신을 구해 달라 하지 않았다. 청명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걸었던 건 그저 백천의 선택이었다.
이 모든 걸 알면서도 윤종이 청명에게 부채감을 심어 주고 해결책을 요구하는 건 정당하지 않다.
게다가 심지어 그건 백천마저 무시하는 행위다. 백천은 보상 따위는 바라지도 않을 것이고, 청명이 부채감을 느끼는 건 더더욱 원치 않을 테니까.
이러고 있는 걸 백천이 안다면 다시는 윤종을 보지 않으려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순 없다.
“사숙을 고칠 수 없다는 건…… 알겠다.”
윤종의 입에서 무감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답지 않은, 딱딱하고 건조한 어투였다.
사과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게 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치기라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사숙을 말리기라도 해야 한다.”
“어떻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냐?”
윤종의 얼굴이 조금 더 서늘해졌다.
“어떻게든 설득해서 전장에 나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저 사람 성격에 전장에 서면 죽는다. 너도 알 것 아니냐!”
청명은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말릴 거냐고?”
윤종은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방법이 있을 리 없다.
죽을 거란 말을 했음에도 백천은 뜻을 꺾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사람이었다면 화산의 장문대리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며, 모두가 이토록 그를 따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은 방법이 뭐가 있을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 볼까?
그런 말을 들은 백천이 마주 보며 역정을 내면 차라리 다행이다. 그러나 백천은 그럼 후방에서 짐이라도 옮기겠다고 할 사람이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위험에 처하면 슬며시 끼어들려 하겠지.
그나마 남은 방법이라면 하나뿐.
백천이 전장에 존재하는 것이 외려 다른 이들을 위험하게 만들 테니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나는 못 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백천은 화산의 장문인이 되기 위해 모든 걸 걸었다. 앞으로도 기꺼이 그럴 것이다. 그런 사숙에게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을 할 수 있을까?
차라리 그를 칼로 찌르고 베어 천참만륙을 내는 쪽이 자비로울 것이다. 저 말은 백천의 육신이 아니라 영혼을 찢어 버리고 말 테니까.
“……어려운 건 안다.”
그럼에도 윤종은 한 줄기 희망을 놓지 않고 청명에게 말했다.
“하지만 너라면 뭐라도 방법이 있을 것 아니냐. 우리가 도울…….”
“나라면?”
그때 청명의 냉정한 목소리가 윤종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럼, 내 입으로 해 달라는 소리야?”
“응?”
“이제 너는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으니까 괜히 쫓아가서 피해 끼치지 말고 여기서 얌전히 도경이나 외고 있으라는 말을, 사형은 차마 못 하겠으니까 나보고 하라는 소리냐고.”
윤종이 움찔했다.
“아니, 내 말은…… 다른 방법을…….”
“다른 방법 같은 건 없어. 이미 말했잖아.”
윤종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똑똑히 들어. 사숙은 단전이 깨졌고, 같잖은 말로 눌러 앉힐 수도 없는 사람이야. 선택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야. 제 목숨을 버릴 각오로 전장에 나가도록 내버려 두든지, 아니면 칼처럼 잘라 버려 전장에 나오지 못하게 만들든지.”
“…….”
“그런데 사형이 원하는 건 후자라는 거잖아.”
“나는…….”
“내가 그렇게 말해 주길 사형이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게. 마냥 좋은 얼굴로 뒤에 선 사형을 대신해서 사람을 난도질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면. 그래, 그렇게 해 줘야지.”
“야!”
윤종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격하게 외쳤다. 청명은 옅게 비웃음만 흘렸다.
“아니야? 그게 아니면, 뭐 뻔한 말이네. 어떻게든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적당한 방법을 찾아내라는 거지? 사형은 할 수 없지만, 나는 할 수 있을 무언가를?”
“……청명아.”
“똑똑히 들어.”
청명이 씹어뱉듯 말했다.
“나는 신이 아니야.”
청명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사형이 못하는 건 나도 못 해. 그러니까 정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직접 해. 그게 말이든, 싸움이든.”
윤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짧은 순간에도 몇 번이나 안색이 바뀌었다.
그러는 사이 청명은 침묵만을 지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윤종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는 사숙이 전장에 나가도록 내버려 두겠다는 거지?”
“내 생각을 묻는 거야?”
“그래.”
“맞아.”
청명은 망설임 없이 선선하게 답했다.
“왜?”
“그게 나을 테니까.”
“네가 지킬 생각이라면…….”
“안 지켜.”
“…….”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사숙을 지키면 다른 이들이 죽어.”
윤종의 얼굴에서 점점 감정이 사라졌다. 싸늘한 달빛만이 얼굴에 내려앉았다.
“그럼, 사숙이 죽도록 그냥 내버려 두겠다고?”
“…….”
“아니, 죽을 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전장에 내보내겠다는 거냐? 어찌 되든 알 바 없이?”
“그래.”
다시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윤종의 입술 새로 흘러나온 건, 짧고도 굵은 물음이었다.
“왜?”
“……대답했잖아. 그게 나을 테니까.”
청명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잡아 둘 수 있겠지. 다리를 부러뜨리든, 잘라 버리든, 정 안 되면 꽁꽁 묶어 동굴 안에 처박아 버리기라도 하면 그만이겠지.”
“…….”
“하지만 그건 진짜 사숙을 죽이는 거야. 내가 아는 백천이라는 인간은 그걸 못 버텨. 전장에 나간 우리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사숙은 그 일로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아니, 어쩌면 앞을 막아섰던 우리도 용서하지 않겠지.”
“…….”
“그러니까,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원하는 거라도 하게 해 주는 게 나아. 내 생각은 그래.”
그 모든 말을 다 듣고도 윤종은 또 한 번 물었다.
“왜?”
청명은 답하지 않았다.
이미 대답은 했으니까.
그러나 윤종은 여전히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듯 청명을 노려보았다.
청명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형이 생각하는 옳은 선택을 관철해. 그러면 되잖아.”
이 말이 마지막이었다.
마침내 윤종의 얼굴에 가면처럼 덧씌워져 있던 무표정함이 사라졌다. 단 한 번도 윤종에게선 볼 수 없었던 냉소가 그 자리에 드리웠다.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쪼르르 달려와서 징징대지 말고 말이냐?”
“…….”
“알겠다.”
윤종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청명도 그런 그를 구태여 잡지 않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멀어진다.
“안다.”
걸음을 옮기던 윤종이 잠시 멈춰 서서 입을 열었다. 시선이 먼 곳으로 향했다.
“네 말이 다 옳겠지.”
긍정의 말임에도,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부드러움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나는 네게 방법만을 물었던 건 아니다. 옳은 선택이 뭔지 명쾌한 해답을 구했던 것도 아니야.”
“…….”
“내가 말을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저 네게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너와 같이 사숙을 걱정하고 싶었을 뿐이야. 설령 방법이 없다고 해도.”
청명이 미동 없이 윤종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게 네게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해도 말이다.”
윤종이 점차 멀어졌다.
키이…….
바위 뒤에서 연신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백아가 꼬리를 늘어뜨린 채 힘없이 윤종을 따라갔다.
청명은 윤종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서야 고개를 돌려 제 손에 들린 것을 내려다보았다.
이슬 맺힌 술병.
그걸 습관적으로 입가로 가져가던 청명이 멈칫했다.
창백하리만치 흰 병을 물끄러미 보던 청명의 입에서 나직하고도 긴 한숨이 몰래 흘러나왔다.
눈이 천천히 감긴다.
깊은 어둠을 찾아 들어가는 것처럼 굳게 닫힌 눈. 그 위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 사형!”
화음의 거리에서 윤종을 발견한 당소소가 반색하며 달려왔다.
“사형! 혹시 청명 사형 못 봤어요? 뒤져 봤는데 아무 데도…….”
“모른다.”
윤종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짧게 답하며 당소소를 획 지나쳐갔다.
“어……?”
당소소는 멍하니 서서 빠르게 멀어지는 윤종을 보았다.
‘무슨 일이 있나…….’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에 잠겼다. 그도 그럴 게, 평소의 윤종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차가운 대응이었다.
불러서 물어보려고 손을 들었다.
“아니, 사형……!”
키이…….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다리를 타고 무언가가 기어 올랐다.
“응? 백아야? 으응?”
단번에 몸을 타고 오른 백아가 당소소의 어깨에 제 몸을 걸치더니 힘없이 축 늘어졌다. 늘어진 백아를 살짝 놀라 바라보던 당소소가 고개를 갸웃했다.
“별일이네…….”
평소 사람 손 타는 걸 그리 좋아하진 않는 녀석이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영문은 알 수 없지만, 당소소는 일단 기운 없어 보이는 백아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었다. 하얗고 조그만 머리통을 통해 희미한 떨림이 전해져 왔다.
“왜 떨어…….”
그 움직임에, 어쩐지 서글픔을 느낀 당소소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으로 반쯤 가려진 달이 오늘따라 괜히 시리게 느껴진다.
“……괜찮을 거야.”
따뜻한 백아의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괜찮을 거야, 다들……. 그래. 다 괜찮을 거야.”
끝내 내리누르지 못한 불안함. 마저 다 감추지 못한 두려움.
어둠이 내린 화음의 길을 걷는 이도, 깊은 화산의 계곡 속에서 자기 자신을 다잡는 이도, 그런 그를 지켜보는 이도.
차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창가를 서성이는 이도, 그리고 모두에게서 떨어진 먼 곳에 외로이 홀로 선 이도.
다들 그렇게 말없이 시린 달을 보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기원하듯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정적에 싸인 화음을 물들이듯 고요히 번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