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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413화 (1,414/1,567)

1413화. 정말 원했다면 쟁취했어야지. (2)

그 상징과도 같은 푸르른 신록 덕에 ‘청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산. 그 산은 지금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푸른 초목과 고풍스러운 전각들은 붉은 화마에 휩싸였고, 화마가 범접하지 못한 바닥은 화염보다 더 검붉은 피로 뒤덮였다.

흡사 세상이 시뻘건 악의(惡意)를 온통 뒤집어쓴 것만 같았다.

그 가운데, 청성 장문인 벽현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흐⋯⋯.”

청성은 평생을 몸담아 온 고향이자, 그의 모든 것이었다. 한데 지금 그 청성이 적당의 습격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쿨럭!”

기침과 함께 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미 몇 개의 구멍이 뚫린 배와 온몸에 새겨진 깊은 자상들만 봐도 그의 운명이 어떠할지는 쉽사리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벽현자는 티끌만큼의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삶보다 더 중요했던 청성이 불타는 고통에 비한다면, 이깟 몸뚱이에서 느껴지는 고통 따위야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쿨럭! 쿨럭!”

다시 한번 검붉은 피를 토해 낸 그는 자꾸만 무겁게 수그러드는 고개를 애써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이벽⋯⋯.’

평생을 그와 함께해 온 사제는 이미 차디찬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다. 처참하기 짝이 없게 난도질 된 시신을 바라보는 벽현자의 가슴속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애와 분노로 뒤흔들렸다.

“아아아아아아악!”

“아악! 사, 살려⋯⋯. 아아아아아악!”

멀리서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귀에 닿다 못해 귓전을 때리는 듯한 비명이 가슴을 할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의 제자들이 적도의 싸늘한 칼날 아래 그 명을 달리하고 있다.

하지만 벽현자에게는 더 이상 제자들을 구하러 달려갈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구도 이 참변을 피하지 못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든 탈출시킨 어린 제자들을 능하운이 이끌며 필사의 도주를 감행하고 있겠지만, 그들 역시 저 악도들의 마수를 피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끝이다.

그래, 모두 끝이다.

길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사천의 명문 청성은 오늘로 종언을 고하는 것이다. 마교나 황궁도 아닌, 저 저열한 사파 놈들의 손에.

‘어쩌다⋯⋯.’

대체 어쩌다 이리 되어 버렸단 말인가?

어째서 이 청성이 불타는가?

어째서 저들이 이곳에 나타났는가?

장강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불구경하듯 지켜보면 된다 여겼거늘, 어째서 사파의 칼날이 이곳에 떨어졌는가?

“흐⋯⋯. 흐흐⋯⋯.”

벽현자는 웃는 듯 우는 듯 신음하며 망연히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청성을 상징하는 상청궁의 대문이 화마에 불타고 있었다. 청정한 도관으로 향하는 문이 아니라, 마치 지옥을 향해 열린 지옥문처럼.

그리고 그 불타는 문을 통해 한 사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청성을 온통 적신 피처럼 붉고, 청성을 뒤덮은 화마처럼 맹렬한 기세로 휘날리는 장포를 걸친 사내.

이 지독한 광경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장신구로 전신을 치렁치렁 꾸민 사내.

저벅.

그 사내의 입가에는 비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광대처럼 요란하게 자신을 치장한 이가 불타오르는 문을 통해 들어서는 광경은 비애와 분노로 정신이 거의 아득해진 벽현자의 시선마저도 사로잡을 만큼 압도적이었다.

“장⋯⋯.”

문득 벽현자는 이 모든 게 하나의 극과 같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광경, 그 속에서 거니는 이,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조차도 현실이 아닌 경극의 한 장면 같기만 했다. 무척 비장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장면이리라.

“장⋯⋯일소⋯⋯.”

어쩌면 정말로 경극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장일소의 발길이 닿는 곳에는 이런 일만 일어나니까. 평범한 이들이 생각하던 현실을 부수고, 마치 극의 한 장면 같은 일들만 벌어지니까.

“장일소오오오오오오오!”

벽현자의 입에서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죽어 간 이들을 향한 슬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절망,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꾸민 이에 대한 증오를 모조리 담아.

하지만 온 내장을 찢어발기는 듯한 절규를 듣고도 장일소는 딱히 이렇다 할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미소를 조금 더 짙게 흘릴 뿐.

“자, 장일⋯⋯.”

벽현자의 손이 덜덜 떨렸다.

눈앞에 선 재앙이 그의 시야에 넘실거렸다.

등 뒤에서 모든 것을 사르고 있는 불꽃, 재앙의 핏빛 장포, 화려한 장신구, 그리고 붉디붉은 입술까지.

벽현자는 재앙, 장일소의 눈을 보았다.

정작 장일소의 눈동자는 평온하고 고요하기만 했다. 범인들이 살인을 저지르며 흔히 보이곤 하는 광기나 희열 등은 없이 오히려 음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지독한 살육을 주도한 남자의 눈빛이 가장 고요한 것을 대체 어찌 이해해야 하는가?

“흐으으으⋯⋯. 흐으⋯⋯.”

분노와 슬픔, 두려움, 고통이 뒤섞이며 흐느낌과 같은 신음이 연신 새어 나왔다.

장일소가 상처투성이가 된 채 주저앉아 버린 벽현자를 내려다보았다.

신랄한 비웃음이나 조롱이 쏟아질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는 나눌 게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장일소에게선 벽현자의 예상과 다른 반응이 나왔다.

그는⋯⋯ 환하게 웃었다.

악의라고는 없다. 아니, 어쩌면 격의가 없다고 설명해야 할지 모른다. 단 한 점의 조롱조차 실리지 않은 해사한 미소와 함께 장일소가 친근히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구면이지요, 장문인? 그간 격조했습니다. 그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상냥하고 부드러운 인사에 벽현자가 손끝이 땅을 빠드득 긁었다.

세상 그 어떤 조롱이나 힐난도 사람을 이토록 고통스럽게 하진 못할 것이다. 아니, 심지어 독이 묻은 비수가 폐에 파고든다 해도 이렇게 아프진 않으리라. 그 비수는 적어도 영혼을 파훼하진 못할 테니.

“왜⋯⋯.”

벽현자가 꽉 짓깨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놓으며 입을 뗐다. 찢긴 입술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왜⋯⋯. 왜 네가 여기에 있느냐? 왜?”

“흐음?”

“장강에 있어야 할 네가 왜! 왜 여기에 있느냐! 왜 하필 청성이더냐! 왜! 어째서! 왜 우리냐! 왜! 왜에에에에에에에! 왜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짐승의 우짖음 같은 절규가 청성에 울려 퍼졌다. 장일소는 그런 벽현자를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물끄러미 보았다.

“왜라⋯⋯.”

잠깐 중얼거리던 그가 쿡쿡 웃었다.

“글쎄요. 왜일까요?”

“⋯⋯.”

“대답하기가 조금 곤란하게 됐습니다. 딱히 이유랄 게 없으니.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걸로 대답이 되겠습니까?”

“끄으윽⋯⋯.”

벽현자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이토록 정중하고 다정한 조롱이 있을까. 저 마귀는 숨이 끊겨 가는 이에게조차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철저하게 비웃을 뿐이다.

“자, 장일소⋯⋯. 장일소오오오오오오오오오!”

“이런, 이런. 아무래도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네. 하지만 정말 딱히 이유랄 게 없는데.”

장일소는 벽현자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하지만 꼭 이유를 대라면 하나 정도는 있겠지요.”

“⋯⋯뭐냐, 그것이.”

장일소의 목소리가 속살속살 벽현자의 귀를 파고들었다.

“약하니까.”

“⋯⋯.”

“너희가 가장 약하니까. 굳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짓밟을 수 있으니까. 어린 양의 연한 목덜미처럼, 물어뜯는 것만으로 가볍게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으니까.”

“네, 네놈⋯⋯.”

“그거 외에 다른 이유가 필요할까?”

벽현자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쏟아졌다. 불길이 넘실거리며 그 그림자까지 어른거리니 그의 얼굴은 흡사 마귀와도 같아 보였다.

벽현자가 평생 지켜 온 도가의 가르침은 이 순간 그저 무의미할 뿐이다.

남은 건 그저 사무치는 증오와 분노뿐.

“으아아아아아아아!”

벽현자가 쥐고 있던 검을 전력으로 휘둘렀다. 저 마귀의 새하얀 목을 향해.

콰득!

하지만 그보다 먼저 장일소의 손이 벽현자의 가슴을 꿰뚫었다.

두 눈을 부릅뜬 벽현자가 느리게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을 뚫고 틀어박힌 흰 손목을 타고 붉은 핏물이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장일소가 말했다.

“알았어야지.”

“⋯⋯.”

“이제 이 강호에 안전한 곳 따위는 없다는 걸.”

벽현자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물론 나는 좋아한단다. 너처럼 비겁한 놈들을 말이야. 다른 이들이 피 흘리며 싸울 때, 느긋하게 뒤에서 그 피를 즐기는 놈들. 그리고 뒤늦게 나타나 누군가의 피로 이루어 낸 것을 비통한 척 챙겨 가는, 그런 놈들이야말로 진짜 인간이잖니.”

부서진다.

육체뿐만이 아니다. 그의 정신마저도 이 순간 철저히 부서지고 있다.

“다만 역겹지.”

“⋯⋯.”

“세상이 불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불길이 나만은 피해 갈 거라 믿는 그 안일함이 나를 역겹게 한단다. 그런 이들을 보면 손수 불태워 주고 싶어져.”

장일소가 화사하게 웃었다.

“이유는 그것뿐이야. 어때? 그래도 들어 보니 충분하지 않니?”

벽현자는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을 애써 들어 제 가슴에 틀어박힌 장일소의 손을 움켜잡았다.

“워, 원귀⋯⋯.”

“흐음?”

“워, 원귀가⋯⋯ 되어서라도⋯⋯ 네놈만⋯은⋯⋯ 저주⋯⋯. 저⋯주할⋯⋯. 청성의⋯⋯ 원한⋯⋯.”

사력을 다해 띄엄띄엄 흘린 그 피 맺힌 말에, 장일소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하⋯⋯. 하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그리고 이내 미친 듯한 광소를 터트렸다.

“스스로 이루지도 못하는 것들이 지껄여 대는 말은 왜 항상 비슷할까! 뒈져 버리면 다 끝인데 말이지.”

우득!

장일소의 남은 손이 벽현자의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원귀가 되어 저주할 힘이 있으면 살아생전에 물어뜯었어야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기다릴 게 아니라 싸웠어야지! 정말 원했다면 쟁취했어야지!”

빛이 꺼져 가는 벽현자의 눈을 보며 장일소가 기괴하게 얼굴을 뒤틀며 웃었다.

“하지만 이제 네게 그럴 기회는 없단다.”

우드득!

장일소의 손이 단번에 그의 가슴에서 뽑혀 나왔다. 그 손을 따라 끌려 나온 피가 세상을 화폭 삼아 거친 선을 그려 냈다.

벽현자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털썩.

숨이 끊기고도 차마 눈을 감지 못했다.

구파일방 중 하나이자 사천의 명문인 청성. 그 청성의 장문인답지 않은, 지극히 초라한 죽음이었다.

콰득!

벽현자의 머리를 아예 짓밟아 반쯤 으깨 버린 장일소는 제 손에 묻은 피를 가볍게 털었다.

“흐음.”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타오른다.

산도, 전각도, 사람도.

그가 오를 때만 해도 푸르렀던 산은 이제 없다. 전각은 과거의 영화를 잃고 무너졌으며, 잿더미가 되어 버린 산은 제 모습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

장일소의 입가에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밤하늘에 그의 미소와도 같은 그믐달이 걸려 있었다.

“이 정도면 꽤 화려하지 않니? 응?”

붉은 장포 자락이 미친 듯이 펄럭였다. 흡사 요동치는 불길과도 같아 보였다.

“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세상을 태울 불꽃이 일렁였다.

장일소라는 이름의, 피처럼 붉은 불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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