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2화. 정말 원했다면 쟁취했어야지. (1)
“⋯⋯사천?”
“예?”
부복한 이를 바라보던 호가명의 얼굴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사천으로 향하셨다고?”
“예! 련주께서 군사가 도착하는 대로 상황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호가명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고개를 드니 남경에서 발을 빼고 있는 사패련의 군세가 보였다.
그 혼란 중에도 눈길을 사로잡는 건, 부서진 마차 중앙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한 사람이었다.
장일소. 아니, 장일소와 비슷한 외형을 지닌 이.
천하에서 장일소만이 입는 의복과 장일소만이 패용하는 장신구를 찬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
호가명은 그가 누군지 잘 알았다. 잘 알 수밖에 없다. 장일소의 독특한 외형을 이용하여 그의 안전을 도모한 건 다름 아닌 호가명이었으니까.
- 그림자 무사?
- 예, 련주님. 반드시 필요합니다.
- 천면수사가 있지 않으냐?
- 그는 마음대로 써먹기 어렵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 흐음, 가명아. 넌 항상 걱정이 너무 많아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 련주님.
- 하아, 마음대로 하거라. 내가 쓸 일은 없겠지만.
“하⋯⋯. 하하⋯⋯.”
호가명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모든 상황이 한눈에 본 것처럼 머릿속에 펼쳐졌다.
“하하하하하하핫!”
억눌린 듯하던 그 웃음은 점차 커져서, 도무지 호가명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광소로 화했다.
장일소답다. 지독하게 장일소답다.
세상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비틀어 버리는 것도, 호가명이 그리 간절히 말했던 걸 하찮게 여겼으면서도 필요할 때는 당연하게 써먹어 버리는 것도.
그 모든 것이 지극히 장일소다웠다.
모두를 속인다. 세상도, 사패련도, 천우맹도, 구파일방도.
심지어 그를 가장 가까이서 따르는 호가명마저도 말이다.
“하하⋯⋯.”
웃음을 그친 호가명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대체 언제부터인가?’
아무리 련주님이라 해도 저 천우맹 놈들이 해남에 나타날 건 예상하지 못했을 터.
그럼 천우맹 놈들이 해남에 왔고, 호가명이 그 뒤를 쫓는다는 것을 안 시점부터 이 모든 것을 그려 냈다는 소리다.
장일소는 그 짧은 시간 내에 세상 모두를 제 손바닥에 올린 채 농락한 것이나 다름없다.
온몸이 오싹해지며 소름이 등을 타고 올랐다.
“련주께서⋯⋯ 내게 따로 전하신 말씀은 없었느냐?”
물음을 던진 호가명이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이 질문을 예상했던 모양으로, 부복해 있던 이가 고개를 들며 호가명을 올려다보았다.
“련주께서는⋯⋯ 군사가 이미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터이니 굳이 전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
“다만 군사가 이곳에 도착하는 대로, 이곳에 모인 모두에 대한 명령권을 군사가 가진다고 하셨습니다.”
호가명이 웃어 버렸다. 그 대답조차 장일소다웠다.
호가명은 고개를 내저으며 사패련 군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저들을 통제하는 이는?”
“임시로 군사전의 부관들이 련주께서 미리 하달하신 명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디에 있느냐?”
“좌측, 만인방의 중앙입니다.”
호가명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쪽으로 간다. 통제권을 되찾아 와야겠다.”
장일소가 사천을 짓밟고자 한다면,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 이곳에 있는 이들이 사천으로 가지 못하게 그 발을 묶어 두는 것이다.
그 후에는 그도 당연히 사천으로 가야겠지.
“움직여라, 당장!”
“예, 군사!”
빠르게 움직이는 호가명의 눈에 살짝 묘한 빛이 떠올랐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호가명 본인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련주님.’
호가명은 화산과 매화검귀에게 명확한 불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장일소가 저 매화검귀에게만은 심하게 관대하다고 여겼다. 어쩌면 그 관대함과 여유가 언젠가는 련주의 목을 찌르려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저들에게 집착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들만은 그의 손으로 죽이고자 했다.
하지만 목숨을 버릴 각오로 저들을 쫓던 그의 간절함조차도 장일소에게는 그저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하나의 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의 패. 적당히 써먹어 버릴 수 있는 장기짝.
그러니⋯⋯.
‘어찌 경탄하지 않을 수가 있지?’
그도, 저 소림도, 천하를 뒤흔드는 화산과 천우맹조차도 하나의 장기짝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에게 어찌 충성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 사람이 모래알보다 많다 해도, 천하에서 이런 광경을 만들 수 있는 이는 오직 장일소 하나뿐일 것이다.
호가명의 시선이 문득 돌아갔다. 지금껏 그가 집요하게 쫓았던 천우맹의 수뇌가 그곳에 모여 있었다.
표정을 알아보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지만,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저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말이다.
‘가련하군.’
격렬히 증오했던 적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호가명도 저들에게 연민 아닌 연민을 느꼈다.
저들이 저지른 잘못이 있다면 오직 하나다.
장일소를 적으로 돌린 것.
❀ ❀ ❀
순간적으로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천우맹의 수뇌들은 모두 말을 잃고 서 있었다. 할 말을 잃는다는 표현을 자주 쓰곤 하지만, 이 순간만큼 그 표현이 절절히 와닿은 적이 없었다.
“이⋯⋯. 이건⋯⋯.”
어렵사리 입을 열어도 말이 나오지 않는다. 머리에서 뭉개진 단어들은 어지러이 머릿속을 흐트러뜨리기만 할 뿐, 도무지 문장을 이뤄 내질 못했다. 당혹과 절망이라는 단어만이 생생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장일소가 여기에 없다뇨? 저기 있는 놈은 그럼 뭡니까? 저기 있잖아요, 장일소!”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던 조걸이 끝내 이해 못 하겠다는 듯 크게 외쳤다. 그의 손가락 끝은 가라앉아 가는 먼지구름 속에 선 붉은 장포 차림 사내를 가리켰다.
“⋯⋯장일소가 아니다.”
“이, 이 천하에 장일소 그 새끼 말고 저런 요란한 차림으로 다니는 놈이 또 어디⋯⋯!”
백천에게 반박하려던 조걸은 순간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말을 하다 말고 깨달은 것이다.
천하에 저런 꼴로 돌아다니는 이는 오직 장일소 하나밖에 없다.
그렇기에 너무도 손쉽게 위장할 수 있는 것이다.
저 붉은 장포와 장신구를 걸치고 독특한 화장만 한다면 그 누구도 그가 장일소란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가까이 다가가 면밀하게 살필 수 있다면 몰라도, 그 위압감을 느끼기 어려울 만한 거리에서는 천하의 누구라도 그가 장일소라고 철석같이 믿어 버릴 테니까.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당장 이곳에 있는 이들도 그러지 않았던가.
“⋯⋯왜 의심하지 못했지? 왜⋯⋯.”
백천이 입술을 콱 짓깨물었다.
저 거대한 마차를 본 순간부터 당연히 장일소가 이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천하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그런 순간에 정작 장일소가 발을 뺀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백천의 상식에선 그랬다.
이건 백천의 잘못이 아니다. 천하의 누구도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 순간 누군가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장일소는?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는 불안이 모두를 덮쳐 왔다.
만인방은 천우맹을 뒤쫓느라 숱한 피해를 감수했다. 문제는 저 장일소가 절대 손해를 보는 사람이 아니란 점이다. 그만한 희생을 치르며 쫓은 이들을 놓아줄 생각이라면, 당연하게 그 이상의 피해를 강요할 터.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천우맹 전체를 짓밟을 수 있는 기회보다 더 거대한 먹이가.
“마, 말도 안 돼. 현재 강호에 지금 이곳보다 더 큰 전력이 몰려 있는 곳은 없습니다!”
남궁도위의 외침에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체⋯⋯.”
그때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그게 아닙니다.”
“예?”
중인들의 고개가 모두 그쪽으로 향했다. 그 시선의 끝엔 임소병이 넋이 나간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더 큰⋯⋯ 그런 게 아닙니다. 애초에 이곳은 그놈에게 맛있는 먹잇감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게 뭔 소립니까, 녹림왕?”
“⋯⋯놈이라면 저 법정이 강을 건널 상황도 고려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사패련의 전력이 모여들었다고 해도 결과를 명쾌하게 알 순 없는 전투를 치러야 합니다. 이기면 많은 것을 손에 넣지만, 지면 모든 것이 끝나는. 아니⋯⋯. 이기더라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전투라고 봐야겠지요.”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곳에 있는 정파 전력이 적어도 그 정도는 된다. 천우맹에 소림, 팽가, 공동이 합류해 있으니 사패련이라 해도 절대 쉬이 볼 수 있을 전력이 아니다.
“그런데⋯⋯ 놈은 애초에 그런 싸움에는 흥미가 없었던 겁니다.”
“⋯⋯예?”
“그런 놈이니까! 빌어먹을, 애초에 그런 놈이니까! 손쉽게 잡을 수 있는 먹이를 두고 굳이 어려운 길로 가는 걸 가장 비웃는 놈이니까. 놈에게는 굳이 피를 흘리지 않고도 먹어 치울 만한 것들이 보였던 겁니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각개격파를 해 버릴 수 있는 여린 속살이!”
임소병의 지친 얼굴에 울분이 묻어났다.
이는 수읽기에서 호가명에게 밀린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애초에 장일소는 임소병이 보고 있던 판 위에 올라와 주지도 않은 것이다. 아니, 임소병조차도 장일소가 보는 판의 장기짝 중 하나였던 것이다.
절대적인 누군가가 자신을 가볍게 집어 어딘가로 내려놓는 절망감이 찾아왔다. 지독한 무력감이 임소병을 덮쳤다.
“그, 그게 대체 어디길래?”
“⋯⋯성.”
“예?”
“청성! 사천입니다. 놈은 지금 분명 숨겨 둔 힘과 하오문을 대동한 채 청성을 짓밟고 있을 겁니다. 이곳과는 달리 전쟁에 대한 대비를 조금도 하지 않은, 구파 중 한 문파를 말입니다!”
모두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임소병이 말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지척에 있는 아미도 불태울 겁니다. 청성을 기습해 박살 내 버리면 아미는 홀로 싸워야 할 테니까요. 만인방과 하오문의 전력이라면 청성과 아미를 각개격파 하는 건 일도 아니죠.”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한 고요함이 사위에 내려앉았다.
“철저하게⋯⋯.”
임소병의 머릿속에 수많은 것들이 그림처럼 흘러갔다.
해남에서부터 이곳까지의 고된 여정,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졌던 처절한 싸움이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저 장일소에겐 쥐 몰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 요란한 쥐 몰이에 모두의 시선이 쏠린 동안, 장일소는 유유히 흙발로 정파의 안방으로 걸어 들어가 버린 것이다.
“우린 철저하게 농락당했습니다. 철저하게⋯⋯.”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다음은?”
“⋯⋯예?”
유이설이 무표정한 얼굴로 임소병과 시선을 맞추었다.
“청성, 아미. 그다음은 어디죠?”
“다음은⋯⋯.”
임소병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를 따라 한곳으로 움직였다.
그 끝에는 얼굴이 창백해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당가.”
사천당가의 가주, 독왕 당군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