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4화. 구하러 갈 것입니다. (4)
호가명은 수척하고 초췌해진 얼굴로 앞에 선 부관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입구는?”
“아직⋯⋯.”
대답하는 부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토록 흐트러진 호가명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알 수밖에 없었다. 지금 호가명이 얼마나 큰 노기를 참아 내고 있는지 말이다.
호가명의 허리춤에 달린 검이 금방이라도 날아들어 그의 목을 쳐 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날아든 것은 검이 아니라 낮고 짧은 명이었다. 검보다 더 날카롭고, 비수보다 더 섬뜩한.
“찾아내라.”
“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관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호가명은 이미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칼처럼 첨예하게 솟아오른 십만대산의 봉우리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으득.
꽉 깨문 그의 입술이 찢기며 붉은 피가 흘렀다.
‘화산검협⋯⋯.’
화산검협의 손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놀아났다. 하지만 정말로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왜 패했는지 그 이유조차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처음으로 광동을 찾은 이들이, 그조차 발견하지 못하는 비처의 존재를 알고 활용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그런 가능성을 대체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해⋯⋯.’
누군가가 머릿속에 손을 집어넣고 마구 헤집어 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부정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불가능한 일이 이미 벌어졌으니까. 아무리 악을 쓰고 외면해 봐야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쏟아부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막대한 피해를 감수했다. 심지어 장일소의 명을 어긴다는, 있을 수 없는 일까지 저질렀다.
그렇게 말 그대로 그의 모든 것을 건 계획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스러진 것이다.
이대로 저들이 십만대산을 빠져나가기라도 한다면?
‘그것만은 안 돼.’
이 지옥 같은 산맥을 넘는 순간 펼쳐지는 것은 드넓은 강남의 대지. 아무리 사패련이 동원할 수 있는 수가 많다고 해도 그 강남땅을 모조리 틀어막는 건 불가능하다.
그가 꿰듯 알고 있는 광동에서도 잡지 못한 이들을 더 넓은 땅에서 잡아 낼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가용한 모든 병력을 안으로 밀어 넣어라.”
“⋯⋯예?”
뒤쪽에 있던 부관이 화들짝 놀라 호가명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디에 숨었건 영원히 숨어 있을 수는 없겠지. 결국은 모습을 드러내야 할 거다. 그때 잡아 죽이면 그만.”
“⋯⋯군사. 저 안으로 말입니까?”
부관이 되묻자 호가명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 부관은 순간 움찔했다.
“죄, 죄송합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예!”
부관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호가명의 시선이 떨어진 뒤에야 가까스로 고개를 든 부관은 떨리는 눈으로 앞에 펼쳐진 산세를 바라보았다.
바로 뒤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지옥 같은 산세.
‘여기에서?’
그 화산검협을 상대하라는 말인가? 그자를?
상상만으로도 헛구역질이 나고 어지러웠다. 하지만 다른 수가 없다. 지금의 호가명에게 이견 따위는 통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그 명을 따르는 입장에선 그저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화산검협, 그 마귀의 검이 제게만은 닿지 않기를.
❀ ❀ ❀
우둑. 우둑.
목을 좌우로 꺾은 청명이 가볍게 손을 쥐었다 폈다.
‘다르군.’
지금의 그는 절대 과거의 그에 미치지 못한다. 이번 전투를 겪으며 그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과거와는 다른 강점도 분명 있다.
우선은 회복력.
그가 모은 천하에서 가장 정순한 기운은 그에게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회복력을 부여했다.
과거보다 더 위중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더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게 된 것도 아마 그 때문일 터.
몸의 내부 역시 빠르게 좋아지고 있었다.
굳은 몸이 풀리고 피가 돌기 시작했는지 전신에서 땀이 흘러내린다. 전투를 겪으며 쌓였던 탁기가 땀의 형태로 배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한바탕 땀을 쏟고 나면 못해도 칠할 정도는 몸 상태가 회복될 게 분명했다.
‘그래도 헛짓한 건 아니라는 거네.’
과거 그가 올랐던 봉우리의 높이에는 아직 닿지 못했지만, 어쨌든 현재의 그가 오르기로 결정한 봉우리가 예전의 자신이 올랐던 것보다 훨씬 높다는 건 증명됐다고 봐야 한다.
투두둑.
청명은 제 가슴에 감긴 붕대를 뜯어냈다.
무슨 짓거리냐고 소리를 치려던 백천이 입을 다물었다. 가슴에 있던 청명의 상처는 이미 아물어 있었다.
“⋯⋯사람 새끼가 맞긴 하냐?”
“한 번씩 나도 의심스럽긴 해.”
청명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백천은 그 반응을 보고도 딱히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렇게 나을 수 있는 놈이⋯⋯.”
“뭘?”
“그럼 조금만 자제했으면 다리 때문에 그 지랄을 하진 않아도 됐을 것 아냐?”
“어? 그러네?”
“미친놈이 진짜⋯⋯.”
백천이 이를 갈아붙였다.
그도 알고 있다.
청명이 쉴 틈 따위는 없었다는 것을. 그가 전면에 나서서 쉴 틈 없이 싸우지 않았다면 희생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컸을 거라는 것도.
그러나 알면서도 끓는 속은 어찌할 수 없었다.
백천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청명이 태연하게 다시 물어왔다.
“조걸 사형은?”
“다른 곳에서 윤종이 놈이 돌보고 있다.”
“별로 다치지도 않았더만, 하여튼 요즘 것들은 대가 약해.”
“⋯⋯네 대가 비정상적이라는 생각은 안 해 보냐? 다른 놈들 같으면 열 번은 죽었다.”
“쯧쯧. 나약한 것들.”
입으로야 구시렁거리면서도 청명은 피식 웃었다. 백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웃음이 나오냐?”
“심각한 척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
“사숙도 얼굴 풀어.”
“너는⋯⋯.”
“남들이 본다.”
짐짓 가볍게 던져진 청명의 말에, 백천의 얼굴이 복잡한 빛으로 물들었다.
“다들 사숙 얼굴만 바라보고 있어.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 그 표정에 다 드러나니까. 사숙이 지금처럼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 더 못생기게 찡그리고 있으면 다들 더 불안해한다.”
“살면서 동경이라는 걸 본 적은 있냐?”
“이 정도면 절세 미남이지.”
“⋯⋯말을 말자.”
백천이 한숨을 푹 쉬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걸 모르는 게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줘선 안 된다는 걸 그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그가 청명을 죽일 뻔했다. 유이설을, 조걸을 죽음으로 내몰 뻔했다. 그의 판단이 정확하지 못해서. 만일 그가 좀 더⋯⋯.
턱.
그때 청명이 백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뭐냐?”
“나는 그렇게 못 했을 거다.”
“⋯⋯.”
“사숙의 판단은 정확했어. 나는 흉내도 못 낼 만큼.”
“⋯⋯쓸데없이 공치사하지 마라.”
“그래도 눈치는 좀 있네.”
“뭐, 인마?”
입으로는 헛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청명의 시선은 유이설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여기저기 상처가 깊긴 하지만, 딱히 후유증은 남지 않을 것 같았다. 도가의 신공은 이런 지점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니까.
하지만 후유증이 남지 않는다는 게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없애 주는 것은 아니다.
이번엔 청명의 시선이 지쳐 잠든 당소소에게 가 닿았다. 그녀의 손끝에 생겨난 자잘한 상처만 봐도 얼마나 악전고투를 치렀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검을 들고 싸우는 이들은 전투가 종결되는 순간 그 역할이 끝나지만, 의원의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아마 수도 없는 목숨을 살려냈고, 수도 없는 목숨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청명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저벅.
그는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너른 공동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해남 제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명문의 품위 따위는 진즉에 가져다 버린 듯 패잔병 같은 몰골로 시체처럼 잠들어 있다.
“알겠냐?”
어느새 그를 따라나선 백천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한계까지 싸웠다. 고작 이틀 쉬었다고 회복될 만한 상황이 아니야. 지금 밖으로 나가 봐야 명만 재촉하게 될 거다.”
“흠.”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도 일리는 있지. 하지만 꼭 맞는 말은 아냐. 지금쯤 눈이 뒤집힌 독심나찰 놈이 어떻게든 입구를 찾으려 발악하고 있을 테니까.”
“⋯⋯.”
“그리고 놈의 능력이면 곧 입구를 발견할 거야. 반쯤 맛이 가서 지금까지 찾지 못한 것뿐이지.”
백천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청명의 말도 맞다. 이곳도 영원히 안전할 수는 없다.
그때, 청명이 깨어난 걸 발견한 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도장!”
“좀 괜찮으십니까?”
“부상이 심한데 좀 더 쉬시지 않고!”
달려온 남궁도위와 당패, 그리고 혜연을 보며 청명은 피식 웃었다. 하나같이 얼굴에 근심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나도 다됐네.’
이런 애송이 놈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녹림왕은?”
“여기 있습니다.”
뒤쪽에서 임소병이 터덜터덜 걸어왔다.
“성격 나쁜 인간은 염왕도 잡아가길 꺼린다더니, 도장 보니 그 말이 꼭 헛소리는 아닌 모양입니다.”
삐딱한 말에 청명이 웃었다.
“호가명한테 얻어맞고 괜한 나한테 화풀이네.”
“누, 누가 얻어맞았다는 겁니까?”
“그럼 처발렸다고 해 주리?”
“으⋯⋯.”
임소병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닌 척해도 자존심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잠시 부들대던 임소병이 심호흡하고는 물었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뭘?”
“상황이 상황이잖습니까. 아시겠지만, 여기서 계속 죽치고 있을 수도 없으니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다들 상태가 이래서야⋯⋯.”
그 말에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겨우 숨을 돌리기는 했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모를 이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할 거냐고?”
“⋯⋯예.”
“그건 내가 아니라 저쪽에 물어봐야지.”
“예?”
임소병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청명을 보았다.
“입장이 바뀌었으니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청명의 눈이 그의 앞에 선 이들을 살폈다.
유이설만큼은 아니지만, 이들의 부상도 만만치 않았다. 모두의 몸에 지금까지 치른 악전고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걸 사형은?”
“이쪽에⋯⋯.”
남궁도위가 안내했다. 청명은 그를 따라가선 아직도 의식을 차리지 못한 조걸을 물끄러미 보았다. 몸에 새겨진 상처를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기라도 하는 듯 그렇게 한참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청명이 임소병을 돌아보았다.
임소병의 어깨가 절로 움찔했다.
청명의 눈빛이 너무도 차가워서였다. 지금껏 알고 있던 이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아니, 단순히 서늘함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어쩐지 위화감이 들었다. 분명 같은 사람을 보고 있는데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이상한 위화감이었다.
“검.”
“⋯⋯.”
백천이 들고 있던 청명의 검을 건넸다.
청명이 날뛰지 못하도록 그가 챙겨 두었던 검이다. 청명의 몸이 나아질 때까지 절대 넘기지 않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 청명의 말에는 이상하게 거역할 수가 없었다.
“녹림왕.”
“예, 도장.”
“잠시 시간을 벌어 줄 동안 준비를 마쳐. 단숨에 이곳을 벗어난다.”
임소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책사다. 이 십만대산만 넘을 수 있다면 장강까지 일사천리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호가명은 크게 조여들어야 했을 이들을 모조리 끌어모아 광동에 배수진을 쳤다. 이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문제는 지금 천우맹과 해남의 상태로는 십만대산의 지형을 십분 활용한다 해도 전투가 쉽지 않다는 것.
게다가 몸을 회복할 시간을 번 대신에 다시금 놈들이 주변을 포위할 시간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청명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청명의 말은, 이 상황을 본인이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일 터.
“뭘 하시려고⋯⋯.”
임소병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청명이 광기 어린 미소를 흘렸다.
“빚을 갚아야지.”
그 비틀린 입술 사이로 새하얀 이가 섬뜩하게 드러났다.
“이곳에 발을 들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게 될 거야.”
과거 그가 절절히 깨달아야 했던 것을, 이젠 저들에게 알게 해 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