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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43화 (1,344/1,567)

1343화. 구하러 갈 것입니다. (3)

눈을 뜬 청명이 제 가슴께를 바라본다.

가슴에 새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말없이 상처를 내려다보던 청명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욱신.

가슴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흉통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기껏 붙었던 상처가 움직이며 다시 벌어지기라도 했는지, 하얀 붕대 위로 붉은 피가 점점이 번져 나왔다.

가쁜 숨을 나직이 토해 내기 무섭게 벌컥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방 안으로 박차고 들어왔다.

“아니, 제기랄! 이게 대체 몇 번째야, 이 미친 인간 같으니.”

“⋯⋯.”

“눈 떴을 때 심상치 않다 싶으면 곱게 처 누워 있으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몇 번을! 형님은 붕어 새끼요? 칼을 너무 맞아서 이제 기억이 깜빡깜빡하셔?”

청명은 고개를 돌려 방 안으로 들어온 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번듯한 얼굴에 짜증이 한껏 서려 있었다. 그 모양을 빤히 보던 청명이 입을 뗐다.

“⋯⋯내가 의식을 잃고 얼마나 지났지?”

“사흘이요, 사흘! 이번에는 진짜 영영 뒈지는 줄 알았더니, 그놈의 목숨줄 질기기도 하지.”

“사흘이라⋯⋯.”

청명은 어이가 없어 그만 피식 웃었다.

보통 못해도 하루 정도면 깨어났는데, 사흘이나 잠들어 있었다니. 확실히 저승문에 반쯤 발을 걸쳤던 모양이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혼자 싸우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을 지키면서 주교를 상대하는 건 아무리 그라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목숨이라도 건져 돌아온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술.”

“⋯⋯이 인간이 진짜 정신이 나갔나? 혹시 환자가 무슨 뜻인지는 아시오? 우리 동네에선 세 살짜리도 아는데, 섬서에서는 그런 것도 안 가르쳐 줍디까?”

“잔말 말고 술.”

“먹고 죽을 것도 없소.”

“가져와.”

“에이, 썅!”

사천당가를 상징하는 녹의를 입은 사내가 씩씩대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더니 잠시 후 새하얀 병을 들고 돌아왔다. 손에 든 병을 청명에게 확 집어 던진 그는 벌컥 성을 냈다.

“먹고 뒈지시든지!”

턱.

술병을 낚아챈 청명이 술병의 마개를 열고는 병째 술을 들이켠다. 입 안으로 독한 화주가 쏟아지자 배 속에서부터 올라오던 비릿한 피 냄새가 조금 가시는 기분이었다.

물론 알고는 있었다. 아무리 술을 들이붓는다 해도 이 냄새가 사라질 리 없다는 것을.

애초에 이 피 냄새는 상처 때문에 나는 게 아니니까.

술은 그저 잠시 잊게 해 줄 뿐이다. 그의 속까지 스미다 못해 징그럽게 엉기고 들러붙은 이 피 냄새를.

입에서 술병을 뗀 청명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잠시간 말이 없던 청명이 입을 열었다.

“몇이나 돌아왔지?”

“⋯⋯마흔쯤 되오.”

“몇이나 죽었나?”

“⋯⋯.”

“몇이나 죽었냐고.”

“스물쯤.”

청명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우스운 일이다. 악을 쓰며 적과 싸우던 놈들이 막상 살 수 있는 곳까지 도착하면 픽픽 고꾸라져 죽는다. 검을 휘두를 힘이 있다면 살 힘도 있어야 할 텐데.

기껏 구해 낸 마흔 중에 스물이나 죽어 버렸다는 말을 들으니 허탈함에 웃음까지 흘러나왔다.

“남은 놈들은?”

“지금 그놈들 걱정을 할 때요? 형님이 살려 놨으니 알아서 살겠지. 팔이 잘렸건, 힘줄이 끊겼건 목숨은 건졌는데 뭐가 문제라고.”

“⋯⋯.”

“본인이나 걱정해, 본인이나. 아니, 뭔 전생에 못 싸워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내가 그깟 놈들한테 목숨 걸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습니까?”

“⋯⋯잔소리.”

“아니면 적어도 내가 있을 때 싸우라고 했잖습니까! 등 하나도 못 지켜 주는 놈들과 싸우다가 등에 칼 맞고 돌아오는 게 어디 한두 번이오? 도사 형님 목숨은 뭐 수십, 수백 개⋯⋯.”

“좀 닫아라. 시끄럽다.”

당보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청명이 다시 술을 들이켰다. 목이 타는 듯한 감각에 눈을 찌푸린 그는 이내 쓴웃음을 흘렸다.

“목숨 같은 거 건 적 없어.”

“⋯⋯.”

“그냥 싸우다 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지.”

굳은 얼굴로 청명을 보던 당보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정말 죽습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도 되나?”

청명의 시선이 문득 침상 옆에 난 창 쪽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더없이 푸르렀고, 또한 더없이 황폐했다.

“하루에 수백, 수천이 죽어 나가는데, 거기에 내 목숨 하나 추가된다고 뭐가 달라져.”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뒈져 보시려고?”

청명이 당보를 물끄러미 보았다. 하지만 당보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되레 언성을 높이며 화를 냈다.

“아니, 사이가 좋지도 않은 놈들 때문에 왜 목숨을 거시냐고! 평소에는 그 망할 새끼들 때문에 위장이 뒤틀린다고 그렇게 괴롭혀 대더니! 뭐, 이중인격자요?”

그 말에 청명이 작게 웃었다. 저 말에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서였다.

“머리에 피가 몰려서 그래.”

“⋯⋯.”

“이젠 그럴 일 없을 거야.”

“잘도 없겠다, 잘도.”

당보가 땅이 꺼져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알아 왔음에도 그는 이 도사 놈을 가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단히 협의 넘치는 인간도 아니다. 그렇다고 대단한 도를 추구하는 인간도 아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어쩌다 저런 인간이 도문에 들어갔는지 의문이 드는 말코도사 놈일 뿐이다.

그런데 왜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저런 선택을 하는 걸까?

“도사 형님.”

“왜?”

“농담이 아니라⋯⋯ 그러다 정말 죽습니다.”

“⋯⋯.”

“아시잖습니까. 도사 형님까지 나자빠지면 이 전쟁은 정말 못 이깁니다. 다른 놈들이 죽든 말든 형님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알아.”

“형님.”

“안다니까?”

무언가 망설이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당보가 청명의 눈을 가만히 보며 말했다.

“마교라고 해서 다 같은 놈들이 아닙니다.”

“뭔 소리야?”

“형님이 베어 넘기는 마교 놈들이 다 화산 도사들을 죽인 놈들은 아니라는 겁니다. 게다가 그런다고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

“아가리 닥쳐.”

그 순간 청명의 눈빛이 일변했다. 삽시간에 싸늘해진 그의 눈빛 앞에선 당보도 더 이상 청명을 몰아붙일 수가 없었다.

당보는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쉬며 한탄했다.

“말을 말아야지.”

그리고 품 안에서 금창약을 꺼내 청명에게 던졌다. 청명이 얼결에 약을 받아 들었다.

“환부에 바르십쇼. 대충 기워 놨으니 약만 잘 바르면 덧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오늘 하루는 헛짓하지 말고 얌전히 누워 계시고.”

당보가 획 돌아섰다. 그대로 방을 나서려다 불현듯 멈춘 그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 도사 형님이 구해 낸 놈들 말입니다.”

“⋯⋯걔들이 왜?”

“감사하다고 전해 달랍디다.”

“⋯⋯.”

탁.

당보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다시 침상에 드러누운 청명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몸에 천천히 감각이 돌아오며 여기저기 베이고 짓이겨졌던 상처들이 욱신거려 왔다. 그러나 이런 고통은 이제 익숙했다.

‘정신이 나갔냐고?’

청명은 소리 내어 웃었다.

너무 뻔한 소리를 해 대지 않는가.

이 미친 세상 속에서 정신이 멀쩡한 놈이 하나라도 남아 있을 리가 없다. 다들 반쯤 나가 버린 정신을 어떻게든 부여잡고 있을 뿐이지.

- 그런다고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

안다.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러는 거다.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오지 않으니까.

아무리 후회하고 발악해도 한번 죽어 버린 놈들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니까.

그게 얼마나 엿 같은 건지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 ❀ ❀

아주 깊은 곳으로 계속 침전해 들어가는 듯했다. 낯설지만 익숙한 그 감각 속에서 청명이 눈을 떴다.

어두운 천장과 피 냄새, 그리고 전신을 덮쳐 오는 통증까지. 지독한 기시감이 밀려들었다.

천근처럼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린 청명이 고개를 들어 제 몸을 바라본다.

가슴팍에 붕대가 감겨 있다.

익숙하지만 또 동시에 위화감 가득한 광경이다. 지금 붕대에 감싸인 몸이 그가 알던 제 몸보다 작고 나약하기 때문이다.

청명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낯선 토굴 벽면에 누군가가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잠든 이의 얼굴이 그가 알던 이의 얼굴에서 점점 낯선 얼굴로 변해 간다.

자면서도 반듯하게 머리를 기댄 백천의 얼굴을 멍하니 보던 청명이 다시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랬지.’

그는 이제 매화검존이 아니다.

그가 알던 화산은 더는 없다.

그는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모든 것에서 패했다.

지키고자 하던 것은 모두 잃었고, 남기고자 하던 것은 모두 사라졌다.

이곳에 있는 것은 그저⋯⋯.

쌔액. 쌔액.

멍하게 다시 침전해 들어가던 청명의 귓가에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저 옆에 유이설이 누워 있고 반대쪽엔 당소소가 잠들어 있었다.

청명의 상태를 살피다 지쳐 잠이 든 듯했다.

청명은 한참 동안 말없이 당소소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얼굴에 담겨 있는 옛 흔적을 다시금 찾아보려는 듯.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조금 전 꿈속에서 보았던 당보의 얼굴이 멀기만 하다. 언제부턴가 놈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 때가 종종 있다.

한없이 선명하다가도 어느 순간 흐려진다. 조금씩 무뎌지는 것처럼.

“일어났냐?”

대답은 딱히 필요 없을 것이다. 정말로 답이 궁금해 던진 질문은 아닐 테니까.

해야 할 말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

“⋯⋯얼마나 지났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이틀 정도는 되었을 거다.”

“이틀⋯⋯.”

사흘보단 나은가?

청명은 웃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백천이 청명의 이마를 꾹 눌렀다.

“기껏 붙은 상처 벌어지게 하지 말고 얌전히 고분고분 누워 있어라.”

“다 나았어.”

스릉.

백천이 말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청명은 결국 목에서 힘을 뺐다. 물론 저 인간이 당보보다 강하지는 않겠지만, 당보보다 대책 없다는 건 이미 증명된 사실이 아닌가.

얌전히 머리를 바닥에 붙인 청명이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입을 열었다.

“다른 놈들은?”

“걸이랑 이설이가 많이 다쳤지만⋯⋯ 그래도 너보다는 나아.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신경 써라.”

“해남은?”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 모양인데.”

“해남은 어떠냐니까.”

고집스러운 질문에 결국 백천이 한숨을 푹 쉬었다.

“반 정도.”

“⋯⋯장로들은?”

“마찬가지다.”

절반 정도는 죽었다는 말이겠지. 이곳에 도착하지 못한 이들과 도착해서 죽은 이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저 백천의 표정을 감안해 보건대 실제 죽은 이들의 수는 절반이 훨씬 넘겠지만, 그렇다 해도 마찬가지다.

만인방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광동을 뚫고 지나가는 대가로 그 정도 희생이라면 아주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선전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아무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청명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누워 있으라니까.”

“이제 정말 괜찮아.”

청명은 제 머리를 누르는 백천의 손을 밀어 내고는 상체를 세워 앉았다. 어떻게든 만류해 보려던 백천은 결국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너에게 후미를 맡긴 건 나다.”

그 뜬금없는 말에 청명이 백천을 빤히 보았다.

“그러니 내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하지만 물어야겠다. 왜 그렇게까지 무리한 거냐?”

“⋯⋯.”

“적당히 발을 빼도 됐잖아. 설령 그 선택 때문에 누군가가 더 죽는다고 해도 아무도 너를 원망하지 않았을 거야. 너도 알 텐데, 대체 왜 그렇게 무리하는 거냐? 대체 왜?”

백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태연해 보였지만 역시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청명이 문득 고개를 돌려 의식을 차리지 못한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무리한 게 아냐.”

“⋯⋯뭐?”

“믿은 것뿐이지.”

- 아니면 적어도 내가 있을 때 싸우라고 했잖습니까!

“내가 한계를 넘어서 쓰러질 때, 반드시 내 뒤에 누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은 것뿐이야.”

이제야 겨우, 등을 맡길 이들이 생긴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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