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7화. 이 땅에 쉴 곳이 있을까? (2)
"으아아아아! 이 정파 놈!"
“죽어라아아아!”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던 이의 목으로 번개 같은 검격이 날아들었다.
서걱!
강한 검격은 오히려 작은 파공음만을 남겼다. 사람의 살과 뼈가 베이고 목과 몸이 분리되는 과정조차도 별것 아닌 듯 느껴지게 하는 작은 소음이었다.
서걱 서걱!
이윽고 심장을 베어 낸 검은 물 흐르듯 상대의 팔꿈치와 팔목의 힘줄까지 잘랐다. 사람은 심장이 베여도 잠시 동안은 움직일 수 있다.
심장을 베었다고 안심하고 전진하려다 등에 칼을 맞고 죽어 간 이가 어디 한둘이던가?
머리로 생각하지 않는다.
검 끝에, 손끝에, 내재된 본능에 덧칠하듯 겹겹이 쌓아 올렸던 경험이 검을 자연스레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파아아앗!
악을 쓰며 달려드는 다른 적을 발견하자마자, 청명의 검은 머리보다 먼저 반응해 움직였다.
카가각!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단번에 베고 나아가려던 청명이 처음으로 멈칫했다. 적의 목에 틀어박힌채 멈춘 검을 물끄러미 보았다.
"크......르륵...... 크륵......"
그 위로 반쯤 꺼진, 머지않아 완전하게 꺼져 버릴 적의 눈빛이 보였다. 두려움이 넘실거리고 있다.
곧 맞이할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한 듯.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던 눈빛은 이내 원망으로 변했다. 청명은 손목에 힘을 주어 박혀 있던 검을 그대로 당겼다.
카가가각!
검이 뼈를 긁으며 뽑혀 나왔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끄으......"
경련하던 적은 힘없이 땅에 얼굴을 처박았다. 차마 감지도 못한 눈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흐리멍덩하게 빈 눈이 세상을 공허하게 반사했다.
쓰러진 이를 무심히 일별한 청명이 제 검을 내려다보았다.
암향매화검.
날이 상한 것은 아니다. 그저 적의 몸에서 묻어난 기름으로 무뎌져 있을 뿐. 베고 또 베어 내며 미세하게 누적된 기름이 층층이 쌓였다. 그에게 쌓인 원망처럼.
과거의 그였다면 검이 이렇게 상하기 전에 손을 썼을 테지만, 아직 그의 감각이 거기까지 살아나진 못한 모양이었다.
파아아앗!
암향매화검으로 밀려 들어간 내력이 검에 묻은 기름을 일거에 날려 버렸다. 이윽고 고개를 든 청명이 전방을 주시했다.
앞에 펼쳐진 숲은 평범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이 알던 숲이 아니다. 싱그러운 풀 냄새는 짙은 피비린내로 뒤덮였고, 풀벌레 소리나 간간이 들려야 했을 적막한 대지는 거친 비명으로 소란해졌다.
피부를 물어뜯는 살기와 피비린내가 자욱한 이 지독한 공간에서 청명은 어쩔 수 없는 익숙함을 느낀다.
그 사실이 문득 혐오스러웠다.
'얼마나 더 가야 하지?'
손부터 시작된 무거움이 온몸으로 번졌다. 내력이 소모되었기 때문인지 세상이 점차 뿌옇게 흐려지는 느낌이었다. 익숙하되, 영원히 친숙하게 느낄 순 없는 감각이다.
청명은 이를 악물었다.
마교는 정예 집단에 가까웠다. 하나하나의 힘이 중원의 일반 무인들을 아득히 능가했다. 그리고 그 정예 중에서도 손에 꼽혀 뽑혔던 주교들의 힘은 하늘을 놀라게 했으며 땅을 울렸다.
하지만 이번 전투는 그가 과거에 겪었던 마교와의 전투와는 또 달랐다.
베어도, 베어도 끝나지 않는다.
하나하나는 결코 강하지 않다. 아니, 청명의 입장에선 오히려 무시해도 좋을 만큼 나약하다. 해남을 이끄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천우맹만이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들은 이미 이 강남을 반 이상 돌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별것 아닌 놈들이 모기떼처럼 달려든다.
마교처럼 목숨을 돌보지 않고 달려드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신앙을 위해 순교하겠다는 광기나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겁을 있는 대로 집어먹어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결국은 악을 쓰며 달려든다. 그런 이들의 목을 쳐 날리는 건 지금까지 겪어 온 것과는 또 다른 더러운 일이었다.
"후……”
청명이 깊게 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뒤로 시선을 돌렸다.
도를 든 이들은 지금도 악착같이 해남에게 달려들고 있다. 처음과 달리 해남의 제자들도 이제는 전투가 무엇인지,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게 무엇인지 그 몸으로 이해한 모양으로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적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은 해남 제자의 얼굴에 뜨뜻한 피가 튀었다. 온통 붉게 흠뻑 젖은 얼굴에서 제대로 보이는 거라곤 일그러진 눈과 꽉 맞물린 이뿐이었다.
협의 정의, 그리고 어쩌면 웅심 (雄心).
이 땅에서 얻고자 했던 것들이 과연 저들과 함께하고 있을까. 저들은 제 모습이 어찌 보이는지 알고 있을까.
전쟁은 지독한 무저갱과 같아서 사람이 품고 있던 모든 빛나는 것들을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처넣는다. 차마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깊은 곳까지.
그리고 나면 남는 건, 가장 원초적인 생존 욕구과 증오심 같은 근원에 닿아 있는 감정들뿐이다.
"죽어어어어어어!"
이미 가슴을 꿰뚫려 숨이 끊어진 몸뚱이에 또 다른 검들이 연이어 쑤셔 박혔다.
적의 상태를 냉정히 살필 여력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설사 적의 목이 날아갔다 해도 저 검은 똑같이 날아들어 죽은 몸뚱이에 박혔을 것이다.
증오, 혹은 두려움의 표현이다.
인간이 한낱 짐승에 지나지 않도록 해 주던 것들이 점차 깊게 가라앉는다.
협의를 논하던 인간이 악에 받친 짐승이 되어 싸운다. 가여운 이에게 제 먹을 것을 기꺼이 내어주던 인간이 이미 시신이 된 몸뚱이에 칼을 박아 넣고 울부짖는다.
이게 청명이 아는 전장이란 곳이었다.
"아악!"
“사형!"
누구에게나 정의는 있고, 누구에게나 입장은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내 몸에 적의 칼이 박히고, 내 동료가 적의 칼에 피 흘리는 순간 이성은 힘을 잃고 만다.
“이 개 같은 새끼들이! 죽여 버리겠다!”
악의(惡意)만이 남아 끝 모르고 팽창한다.
상대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지 않고서는 풀리지 않는…… 아니. 검을 박아 넣고도 풀리지 않을 악의뿐이다.
"으아아아아아!”
해남의 제자 중 하나가 괴성과 함께 달려들며 상대의 목에 제 애병을 힘껏 찔러 넣었다.
목을 파고든 검은 목덜미를 뚫고 피에 젖은 채 삐죽이 튀어나왔다.
그 누구도 쉽사리 익숙해질 수 없고, 익숙해져서도 안 될 것이 살인(殺人)이다. 하지만 조금 전에 제 손으로 살인을 저지르고도 그의 눈에는 어떤 거리낌이나 죄책감도 없었다.
되레 검을 더욱더 거세게 밀어 넣으며 앞으로, 앞으로 악을 쓰며 나아갈 뿐이었다.
"소협!"
윤종이 팔을 뻗어 사내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이거 놔!"
사내가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윤종이 어깨를 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순간 밀려드는 고통에 사내가 살기 띤 눈으로 윤종을 획 돌아보았다.
윤종은 그 살기를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조금도 눌리지 않고 고함쳤다.
"진정하시오! 흥분하면 죽소!"
"으......"
사내가 입술을 짓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형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손이 벌벌 떨려 오기 시작했다.
"사, 사형! 괜찮습니까?"
"으......"
“의원님! 의원님, 여기! 여기 사람이 죽습니다! 여기!"
“진정해! 이 정도로는 안 죽어!"
“해원(海院)도 그렇게 죽었잖습니까! 안 죽는다더니!"
발작처럼 터져 나온 그 말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입을 닫았다.
“어떻게 믿어요...... 그 말을 어떻게 믿냐고 내가...…"
쓰러진 사형의 옷자락을 움켜잡고 오열하던 그는 다시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의원님! 의원......!"
“이미 왔으니까 그만찾아요!"
피에 흠뻑 젖은 채 달려온 당소소가 곧장 상황을 살피고 벌어진 상처에 지혈분을 쏟아붓듯 뿌렸다. 차분하고도 신속한 손놀림이었다.
"여기! 여기 움켜잡아요. 출혈을 막아야 해! 피 한 방울 안 통하도록 꽉 잡아!"
"예!"
당소소가 이를 악물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눈물은 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흘릴 눈물은 이미 흘렸으니까.
그녀도 죽음에 익숙한 건 아니다. 과거 당가를 찾아오는 환자들의 죽음이야 몇 번 봤다. 하지만 지금처럼 멀쩡히 살아 있던 이가 숱하게 급속도로 죽어 가고, 의원인 그녀가 손쓰지 못하는 경험을 해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익숙해질 겨를도 없이 너무나 많은 죽음이 단기간에 덮쳐 왔다. 물론 함께하던 이들의 죽음에 평온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겠냐마는, 환자는 물론이고 그 주변인들까지 모두 그녀 하나만을 간절히 바라보는 이 상황에선 부담이 더 막중할 수밖에 없었다.
오는 죽음을 막지 못하는 게 그녀의 탓은 아니다. 당소소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고 있다 해서 가슴으로 곧장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다.
당소소는…… 이 모든 죽음이 오직 제 탓인 것만 같았다.
“꽉 누르라고, 제기랄!"
"예! 예! 알겠습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상처에 아교를 발랐다. 평상시라면 꿰매어 마무리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당가에서 특수 제작 한 아교라면 한동안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건 막아 줄 것이다.
일단은 출혈만 막아 놓고, 자세한 처치는 나중으로 미뤄야 한다.
"됐어요! 안쪽으로 옮겨요!"
“예!”
주변에 있던 이들이 그제야 안도하며, 쓰러진 이를 잡아 들었다.
'안 좋아……'
당소소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목숨은 가까스로 구했지만, 이걸로 부상자가 한 명 더 늘었다. 제대로 운신할 수 없는 부상자가 늘수록 이동 속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줄고, 부상자를 옮겨야 하는 이가
늘어나니까.
한 사람의 죽음은 그저 한 명의 전력이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지만, 이런 부상자의 발생은 필연적으로 더 많은 인력을 소모한다.
악순환이다. 부상자가 발생한 만큼 돌파하는 속도가 늦어지고, 그럴수록 더 많은 이들이 앞을 막아서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이러는 동안에도 만인방의 본대는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고 있을 터.
“소소야, 괜찮……”
쫘아아아아악!
"뭐, 뭐야!"
걱정하고 있던 조걸이 순간 기겁하며 당소소를 보았다. 그녀의 터져 버린 입술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조걸이 정말로 놀란 건, 그녀의 뺨을 후려쳐 입술을 터트린 게 다름 아닌 당소소 본인이란 사실 때문이었다.
"왜, 왜 그러는 거야?"
"아뇨, 됐어요.”
"뭐가…….”
“괜찮아요. 정신이 들었으니까 잠깐 머리가 이상해졌었나 봐요. 이런 생각을 다 하고.”
조걸은 '이런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차마 묻지 못했다. 당소소의 표정을 보면 누구라도 말문이 막힐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태연하게 그런 걸 묻고 있을 때도 아니었다.
"가야죠."
"그래, 가야지."
조걸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베었을까?
얼마나 죽였을까?
그리고 이 길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쉴 틈도 없이 전투가 이어지니 극도로 날카로워진 신경이 점차 뇌까지 찌르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조걸이 크게 움찔했다. 전방에서 다가오는 무언가를 느낀 그가 별안간 크게 고함을 터트렸다.
"온다! 만만치 않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거진 수풀 속에서 붉은 무복을 입은 무리가 사슴을 향해 쇄도하는 늑대처럼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