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6화. 이 땅에 쉴 곳이 있을까? (1)
"저리 비켜!"
"으, 으아앗!”
거칠게 밀쳐진 사내가 길 밖으로 나뒹굴었다.
“뭐야! 어떤……”
화를 참지 못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던 사내가 고개를 들기 무섭게 재빠르게 머리를 아래로 내리박는다.
관도를 따라 한눈에 보기에도 섬뜩한 흉기를 든 이들이 거칠게 질주하고 있던 것이다. 괜히 잘못 보였다가는 목이 달아나기 딱 좋았다.
'이, 이게 대체 뭔 일이야.'
그냥 잠시 다른 곳을 보고 있었을 뿐인데, 저런 흉흉한 것들이 언제 여기까지 왔다는 말인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사내가 더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고서야 슬그머니 머리를 다시 들어 저 멀리 달려가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뭔 일이야……”
"형씨. 괜찮소?"
그처럼 납작 엎드려 있던 이 중 하나가 고개를 들고 물어 온다.
"...…괜찮긴 한데, 저 양반들은 대체 뭔 일이 있어서 저리 급히 가는 겁니까?"
“그걸 내가 뭘 어떻게 알겠소? 오늘 아침부터 아주 난리도 아니오."
“아침?”
“벌써 저런 것들이 몇이나 지나갔는지 모른다니까. 하나같이 다들 뭐에 쫓기는 얼굴로…… 형씨는 운 좋은 줄 아시오. 아침에 멋모르고 길 막았던 양반은 흠씬 얻어맞고 지금 정신도 못 차리고 있으니까."
“사, 사패련이겠지요?"
“저런 것들이 뭔 사패련 소리나 들을 수 있겠소? 보아하니 급도 안 되는 사파 무리들 같은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내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삼류 파락호에 불과한 사파 무리라 해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저승사자나 다름없다.
그런 이들이 병기를 빼 들고 흉흉한 기세로 도로를 오가고 있으니 얼마나 심장이 떨리겠는가?
저 사패련이 강남을 지배한 이후로 사파 놈들의 눈치를 보고 산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겠냐마는, 이런 일은 흔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무슨 일이 벌어졌답니까?"
“우리 같은 일들이 뭘 알겠소? 저놈들이 말을 해 줄 것도 아니고.”
" 하기야……”
“그래도 저들이 저리 급해 보이는 것도 처음이니 뭔 일이 벌어지긴 했다고 봐야지. 그런데 저 방향은 남쪽인데…… 북쪽도 아니고 남쪽에 대체 뭔 일이 터진 거지?"
사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정파와 대치하고 있는 북쪽에 큰일이 벌어지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남쪽에는 딱히 일이 벌어질 만한 곳이 없지 않은가? 저 강남의 남쪽은 다름 아닌 만인방이 지배하고 있는 영역인데.
“큰일이라니……”
큰일이 터질 때마다 가장 고통받는 것은 민초인 법이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라고 부패하고 돈만 밝혀 댄다 욕했던 정파가 밀려나고 나니 사파 놈들의 패악질이 그들의 삶까지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내심으로야 저 강북의 정파들이 하루빨리 남진하여 사패련을 몰아내 주기를 바라지만, 막상 그 일이 벌어지면 그들의 삶 또한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남쪽에 정파가 쳐들어온 건 아닐까요?"
"형씨. 정신 나갔소? 북쪽도 아니고 남쪽에 정파가 왜 쳐들어와?"
"그…… 별동대인가 뭔가 하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후방을 치는 것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고 있네. 그게 됐으면 벌써 했겠지."
"......"
"그리고! 정파 놈들이 언제부터 그리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그리 위험한 짓을 하겠소이까?"
하기야 맞는 말이다.
확실히 정파가 지배하는 땅이 사파가 지배하는 땅보다 살기 나은 것은 사실이지만, 젠체하는 정파 놈들이라고 해서 그들 같은 양민들에게 크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려 하는 순간, 퉁명한 얼굴을 하고 있던 이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화산이면 또 몰라도…..."
"......"
그 말에 주변의 여러 사람들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여졌다.
화산, 그러니까 천우맹이 사패련을 얼마나 갈아 마시고 싶어 하는지는 이 강남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여하튼 꿈 깨시오. 그들이 이 강남까지 올 일은 없을 테니까."
“어휴……”
모두의 얼굴에 수심이 차올랐다.
결국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파들이 나서지 않고 관이 나서지 않는 이상, 양민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한걸음에 강을 뛰어넘고 맨주먹으로 바위를 부수는 이들에게 그들이 무슨 위협이나 되겠는가?
별다른 변화가 없는 이상, 이 사패련의 치세는 무너지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지금도 살기 힘들어 죽을 판인데…...”
“그래도…… 그. 패군은 나름대로 선정을 베풀고 있지 않소. 이번에 곡식도 풀어 주셨고.”
"선정?"
누군가 슬며시 건넨 말에 중인들의 눈이 쌍심지가 켜졌다.
"그깟 곡식 몇 자루 내준 게 선정이라고?"
"아, 아니. 그거라도 없었으면......”
“애초에 그게 다 어디서 나온 건데. 그게 다 원래는 우리 것들 아니었소! 주머니에 있는 동전 한 문까지 탈탈 털어 가 놓고, 굶어 죽으려고 하니 인심 쓰듯이 몇 푼 던져 주는 게 선정이라고?"
"이 양반이 말이면 단 줄 아나."
“어디 그딴 말을 입에 올려!"
순식간에 사내가 수세에 몰렸다. 사람들의 기세는 금방이라도 사내를 잡아다 두드려 패기라도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웬만큼 담이 큰 이도 오금이 저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태연자약했다.
“그러니까 댁들은 패군께서 베푼 선정이 고맙지 않다는 말이오?"
“......그, 그건.”
"어......"
금방이라도 양팔을 걷어붙일 것 같았던 이들이 슬그머니 서로의 눈치를 본다.
여기서 말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가는 사달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만일 저자가 이들이 한 말을 사파 놈들에게 밀고라도 하는 날에는......
노기로 끓어올랐던 가슴에 찬물이 부어졌다. 사내들이 살짝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그럴 리가 있겠나? 감사할 따름이지."
"그렇지! 그렇지! 우리 집도 패군께서 주신 곡식 때문에 죽다 살아났네. 감사하지 않으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패군은 잘못이 없으시지. 선정만 베푸시지 않는가? 그 사패련에도 들지 못한 사파 놈들이 제대로 그 뜻을 받지 못해 벌어지는 일이지! 아암!"
사내들이 필사적으로 말을 바꿨다. 그 모습을 본 지켜보고 있던 이가 피식 비웃음을 흘린다.
"말조심하고 다니는 게 좋을 거요. 지켜보겠소."
"하하. 말조심이라니. 우린 그저……”
"추하기는."
사내가 몸을 돌려 멀어져 가자 사람들이 치욕스러운지 이를 갈아 댔다.
그러다 이내 시내가 멀찍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고 나서야 둑이 터진 듯 화를 풀어 낸다.
“개 같은 놈......”
“사패련보다 저런 놈들이 더 악질이지. 어디 사패련의 앞잡이질을 한다는 말인가?"
“앞잡이는 무슨. 그놈들은 저런 놈은 앞잡이 취급도 안 해 주네. 사패련의 개지, 개!"
사람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말을 하면서도 비통해진 것이다. 그들도 안다. 사때련은 밀고를 하는 이라고 해서 딱히 대단하게 취급해 주지도 않는다.
그래 봐야 적당히 곡식 한두 자루를 던져 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개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었다.
밀고를 당한 이는 며칠 내로 더 이상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될 테니까. 겨우 곡식 한두 자루의 대가로.
그 사실이 너무도 비통해 울화가 치밀었다.
“저런 놈은 천벌을 받아 죽을 거다. 천벌을!"
"그렇고말고!"
"믿을 놈이 없어. 믿을 놈이!"
한참 노기를 쏟아내던 이들이 슬그머니 서로의 눈치를 살핀다.
밀고자가 저놈만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곳에 있는 사람 중 어떤 이가 은밀히 밀고라도 한다면, 누군가 또 횡액을 당할 수도 있다.
“크흠.”
눈치를 보던 이들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고는 슬금슬금 자리를 파한다.
이미 세상은 마음속에 있는 말을 있는 그대로 꺼낼 수도 없도록 변해 있었다.
"허......"
남겨진 사내 하나가 고개를 내젓는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세상. 사패련의 지배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먹고 살기는 힘들었어도 이토록 각박하지는 않았었는데.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건지……”
사내가 한숨을 푹 내쉴 때였다.
토도도도도도도도도!
"으응?"
주변이 적막해진 탓인지 그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토도도도도도도도도도도도!
"뭔 소리……”
사내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오는 뒤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순간, 사내의 얼굴 바로 앞으로 새하얀 백색의 무언가가 섬전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으아아아아악!"
사내가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나뒹굴었다.
"뭐, 뭐야!"
마치 백색의 번개가 얼굴 앞으로 지나간 느낌이다.
놀란 사내가 고개를 획 들어 앞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귀, 귀신이라도 지나갔나?"
멍하니 앞을 바라보던 이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무래도 최근 곡기를 제대로 먹지 못했더니, 헛것이라도 본 모양이었다.
사내가 있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숲속.
토도도도도도도도!
앙증맞다는 말이 어울리는 네 개의 발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바닥을 박찼다.
언뜻 보기에는 귀엽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지만,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는 그저 새하얀 섬전이 숲을 가로지르는 모습으로만 보일 것이다.
헥! 헥!
말 그대로 개발에...... 아니, 족제비 발에 땀이 나도록 질주하던 백아의 앞으로 무언가 커다란 것이 뛰어든다.
"크허엉!"
집채만 한 대호!
그 크기로 보아하니 산군(山君). 아니, 영물(靈物)이라 불리기에 충분해 보이는 어마어마한 대호였다.
아마도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분노로 한걸음에 이곳까지 뛰셔 온 모양이었다.
커허허허어어어엉!
백아의 앞길을 막아선 대호가 날카롭기 짝이 없는 이빨을 있는 대로 드러내며 온 기세를 다해 위협한다.
듣는 것만으로도 절로 오금이 저리고 전신에 털이 곤두서는 어마어마한 포효였다.
하지만 그 포효를 들은 백아는 겁을 먹기는커녕, 눈을 가늘게 뜨더니 달리던 기세 그대로 대호의 얼굴 쪽으로 뛰어들어 조막만 한 머리로 대호의 머리를 곧장 들이받아 버렸다.
쿠우우우우웅!
거대한 종을 울리는 것 같은 타격음.
집채같은 대호가 강아지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으로 엎어진다.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대호의 머리 위로 올라탄 백아가 호두만 한 주먹을 맹렬하게 휘둘러 대호의 머리를 연신 후려치고, 그 발로 왕(王)자가 새겨진 머리를 마구 밟아 댄다.
키이이이이이이이익!
잔뜩 치켜 올라간 백아의 두 눈에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그 눈빛에 가득 찬 울분은 분명 대호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커허허헝!
저항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연신 얻어맞은 대호가 꼬리를 말고 달아나려 하자, 백아가 작은 앞발을 뻗어 대호의 꼬리를 움켜잡는다.
그리고는 그 긴 허리를 순간적으로 튕겨 대호를 휘둘러 바닥에 메다꽂아 버렸다.
콰아아아아앙!
대호가 파들파들 떨더니 그대로 목을 꺾고 기절한다.
키익! 키이이이이이익!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기절한 대호를 노려보던 백아가 짤막한 앞발로 삿대질을 하며 뭐라 뭐라 악을 써 댄다.
그리고는 아차 싶었는지, 몸을 휙 돌려 전력으로 다시 달려 나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타다다다다닷!
도로 백색의 섬전이 된 백아가 강남을 질주한다. 몸 안에 담은 내력을 모조리 끌어내며.
빨리. 한시라도 더 빨리!
이 목에 매달린 봇짐 안에 든 서찰을 강북에 전달해야 한다.
저 밉살맞은 주인 놈의 숨이 끊기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