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256화 (1,257/1,567)

1256화. 알아서 하시겠죠.(1)

퍼엉! 퍼엉!

사람 몸통만 한 닻이 연이어 수면으로 떨어졌다. 수면과 닻이 충돌하는 소리가 대포 소리처럼 해안으로 퍼져 나갔다.

이 광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이가 보더라도 절로 몸이 떨려 올 광경이었다.

"군사! 정박이 끝났습니다."

선실 안으로 바삐 들어선 이가 부복하며 보고했다. 하지만 장부를 들여다보는 호가명의 시선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음."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호가명이 빠른 손놀림으로 장부를 덮었다.

턱.

그는 일말의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켜 선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좁은 문을 통과하니 푸른 섬의 정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중원관느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호가명은 딱히 감흥 없는 표정으로 발을 옮겼다.

끼이이익.

그의 발이 움직일 때마다 배의 갑판이 삐걱대며 비명을 질렀다. 선수로 걸어간 그는 감정 없는 눈으로 해안을 빠르게 살폈다. 그리고 물었다.

"어부들은?"

"다들 달아나기 바빠 해안에 든 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해안에 있던 이들은 우리를 보았겠지."

호가명은 해안에 정박되어 있던 배들에 흘끗 시선을 주고는 입을 열었다.

"해남파도 곧 알게 될 것이다. 방비를 하게 두어 좋은 건 없겠지. 하선한다."

"예, 군사!"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인 이가 몸을 돌려 우렁차게 외쳤다.

"하서어어어어언!"

"예!"

각 배에서 대기하과 있던 이들이 재빠르게 배 밖으로 뛰어내렸다.

첨벙! 첨벙!

물경 천에 가까운 이들이 일제히 바다 위로 뛰어내리자 푸르른 해수면이 순식간에 새하얀 포말로 뒤덮였다. 아래로 내려선 이들은 일사불란하게 앞으로 달려 나가 새하얀 모래사장 위에 집결했다.

그 모습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던 호가명도 배의 선수를 밟고는 가볍게 몸을 날려 백사장 위로 내려섰다.

허리를 곧게 펴고 시선을 돌리니 대열을 갖춘 만인방의 무사들이 보였다. 그가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잠시 후 조금 늦게 합류한 이가 고개를 숙였다.

"군사!"

"늦군."

"죄, 죄송합니다."

호가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짧게 고개를 내저었다.

만일 지금 이 해안에서 펄쳐지는 광경을 다른 사파가 보았다면 당황하다 못해 말을 잃었을 것이다 .사실 지금 이들의 모습은 강호인이라기보다는 군인에 더 가까운 정도로 엄중하게 체계가 잡혀 있으니까.

천하의 모든 사파 중에서도 오직 만인방만이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 호가명의 성에는 차지 않는다.

"군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명을!"

"음."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만한 이들이 자신의 명만을 기다리는 상황이 되면 누구라도 절로 가슴이 부풀어 오를 것이다.

하지만 호가명의 두 눈에선 들뜬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평소처럼 더없이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할 뿐이다.

"진격합니까?"

"기다려라."

호가명이 오른손으로 왼쪽 소매를 잡으며 가볍게 문질렀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져든 듯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하군."

"예?"

"대처가 너무 없어."

"예?"

그 말을 들은 문방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저희가 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대비하지 못한 것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설령 어부들이 저희를 보았다 하더라고, 해남파에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호가명은 고개를 내저으며 차게 말했다.

"발자국이 없다."

"……예?"

호가명의 부관, 문방은 그 말을 듣고 다시 한번 새하얀 백사장을 살폈다. 확실히 호가명의 맏래로 이곳엔 발자국이랄 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왜 이상한 일이란 말인가?

"군사. 발자국이 없다는 건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닙니까?"

호가명이 고개를 돌려 문방을 빤히 보았다.

"좋은 일?"

"예. 이 해안에 사람이 없었다는 증거이니, 저들이 저희의 행적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 아닙니까?"

호가명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정박한 배는 있는데, 발자국이 없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고?"

"……아!"

문방이 그제야 놀라며 해안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들의 배 외에도 다른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배가 정박했다는 건 사람이 내렸다는 뜻. 하지만 이 백사장에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태풍 때문에 지워졌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뱃사람들은 태풍이 지나가면 당연히 배를 정비한다. 배를 수리하던 이들이 우리를 보았다면 빠르게 달아났을 터. 그렇다면 해안에는 발자국이 남아 있어야지."

"……"

"부자연스러워."

호가명이 고개를 들어 눈앞의 섬을 바라보았다.

"그럼 놈들이 저희가 올 줄 알고 미리 함정을 팠다는 의미인데…… 그 섬 촌놈드링 그럴 깜냥이 되겠습니까?"

호가명이 느리게 몬방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두 눈에 서린 한기에 문방의 얼굴이 일순 희게 질렸다.

"구파일방이 우스운 모양이로군."

"구, 군사. 그게 아니오라……"

"사람이 가장 추할 때가 언제인지 알고 있나?"

"잘……"

"운 좋게 얻어 낸 것을 제 실력으로 이루었다고 착각할 때다."

문방은 입이 잇어도 할 말이 없다는 듯 침묵했다. 호가명이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련주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더라면 한낱 광동의 쓰레기로 끝났을 놈들이 자기가 뭐라도 된 양 거드름을 떨어 대면 살의가 인다는 소리다."

문방이 재빨리 머리를 조아렸다.

호가명은 어지간한 일로는 화를 내지 않는다. 아랫사람이 대놓고 무례를 범해도 한숨이나 내쉬고 넘어가는 사람에 가까웠다. 사람이 인자해서가 아니다. 그런 놈들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는 것이 호가명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경우만은 다르다.

누군가 장일소의 권위에 자그만한 흠이라도 내는 순간, 호가명은 냉철한 군사에서 물불 가리지 않는 악귀로 돌변한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문방이기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구, 군사! 절대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그저 제가 멍청해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린 것뿐입니다. 어찌 만인방의 방도가 방주께서 주신 것을 제가 얻은 것이라 여기겠습니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호가명은 엎드린 문방을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가운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음에도, 문방은 등을 타고 한기가 흐르는 걸 느꼈다.

"일어나라."

"예!"

문방이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켰다.

"이번 한 번이다."

"가, 감사합니다, 군사!"

문방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저 흔히 이뤄지는 가벼운 질책 정도로 보일지는 모르나, 문방은 더없이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이 지옥문에 한 발을 걸쳤다가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하, 하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호가명의 뇌리에 그의 실책이 계속 남아 있어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함정이 있겠지."

호가명이 우거진 수풀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해안은 눈이 부시도록 희고, 이에 맞닿은 초지는 더없이 푸르르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진 수풀과 산은 중원의 것보다 오히려 더 울창하게 우거져서 어두웠다.

매복한다면 분명 저곳이리라.

"우회합니까?"

"아니."

호가명의 입매가 묘하게 뒤틀렸다.

"함정을 팠다면 가 줘야지."

문방은 입을 닫은 채 호가명을 주시했다. 의문은 당연히 있었으나, 지금 함부로 호가명에게 되물을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임무를 착각하지 마라, 문방. 우리가 받은 명령은 단순히 해남파의 현판을 내리는 게 아니다. 해남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박멸하는 것이다."

"아……"

"함정을 우회하면 그 함벙을 파고 있던 놈들이 집 잃은 벌레 떼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겠지. 그럼 뒤처리가 성가셔진다."

호가명은 딱히 감정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해남의 우거진 숲을 바라보았다.

"박멸해야 할 것들이 모여 있어 준다면 오히려 좋겠지. 일을 당길 수 있으니."

"예!"

"예정대로 전진한다. 단!"

호가명이 타고 왔던 배를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잠시 침묵하고 고민하는 듯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창귀대(倀鬼臺)를 남겨 배를 지키라고 해라."

그의 표정은 무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퇴로를 끊는 건 병법을 안다고 자부하는 놈들이 둘 만한 제일 뻔한 수다. 배를 잃는다고 해도 문제는 없지만, 귀찮아질 테니."

"명대로 하겠습니다!"

"음직여라."

"예!"

문방은 창귀대 쪽으로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실수를 저지르고도 살아남았다는 안도와 또 다른 서늘함이 함께 마음속에 휘몰아쳤다.

'겨우 해남 다위를 상대하는 데……'

호가명의 말대로, 문방에게는 만인방의 힘에 자부심을 느낄 자격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인방의 전력이 해남을 압도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호가명은 그런 해남을 상대하면서도 돌다리를 두들겨 건너듯 전략을 짜고 있다.

범은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그렇기에 두려운 것이다.

지금 호가명의 머릿속에는 장일소의 명령을 어떻게뜬 완벽하게 완수해 내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을 것이다.

적이 파 둔 함정으로 굳이 들어가겠다는 건, 함정에 뛰어들더라도 피해 없이 적을 무찌를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현 같은 게 아니다.

호가명은 신속히 해남을 처리하라는 장일소의 명령에 다르기 위해 다소간의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더 빠르게 적을 정리하는 방향을 선택한 것뿐이다. 호가명에게 중요한 것은 장일소의 명령밖에 없으므로.

그 사실이 문방의 뒷덜미를 서늘하게 했다.

'이번 일에는 절대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문방은 재차 다짐하며 창귀대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주*님*이-시*여)

"움직인다!"

"좋아. 그럼…… 어?"

해안의 상황을 지켜보던 윤종이 눈을 홉뜨며 백천을 휙 돌아보았다.

"병력이 나뉘는데요?"

백천은 눈을 끔뻑이며 해안의 상황을 확인했다. 과연, 적의 병력 중 일부가 남아 정박한 배를 지키려는 듯 포진하고 있었다.

"녹림왕?"

"흐음."

임소병이 부채 끝으로 제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호가명이 생각보다 해남을 높이 쳐주고 있는 모양이군요. 하긴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확실히 독심호리입니다. 훌륭하군요."

"아니, 계획이 틀어졌는데 지금 태평하게 칭찬이나 할 땝니까?"

"어떻게 할 거예요?"

여기저기서 원성이 빗발쳤다.

"에이, 진짜."

임소병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성을 냈다.

"이 양반들이 연의를 너무 봤나? 실제 전쟁이라는 게, 뭐 다 미리 짜 놓은 대로 술술 잘 굴러갈 것 같아요? 서로 서로 대비의 대비를 하면서 그때그때 수를 바꾸는 게 기본이죠!"

"그래서 지금은 호가명한테 한 방 먹었다는 뜻?"

"처발렸다는 뜻?"

"졌다는 뜻?"

"……개새끼들."

임소병이 이를 빠득빠득 갈아붙였다. 그때 백천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합니까?"

"딱히 다를 건 없습니다."

임소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계획대로 적이 충분한 거리를 벌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배를 탈취합니다!"

"지키고 있는 이들은?"

"그야, 뭐……"

임소병이 고개를 도렬 한 사람을 물끄러미 보았다.

"중원 최고 성능을 가진 사파분쇄기가 알아서 하시겠죠."

이미 검을 뽑은 청명이 해안에 진을 친 창귀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모두가 절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를 드러낸 청명의 모습이 실로 오싹했다.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