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5화. 그리고 살기 위해서다!(5)
푸른 물이 넘실대는 바다.
그 수평선 너머로 나타난 작은 점들이 점점 그 크기를 키워 간다.
딱히 대단하고 말고를 논할 장면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해남파의 제자들은 숨이 멎는 듯한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바다를 터전 삼아 살아가는 이들이기에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다가오는 저 배가 그들이 지금까지 봐 오던 것과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사패련……"
누군가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조금 전까지는 활기차게 움직이던 이들이 다들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다가오는 배를 바라본다.
사패련에 대항해 제 목숨까지 던지겠다는 의지로 불타던 이들이지만, 막상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사패련의 선단을 두 눈으로 목도하는 순간,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과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두려움이란 전염되는 것.
특히나 이런 상황이세는 그 어떤 것보다 빠르게 퍼져 나가기 마련이다. 해안에 서 있던 누군가가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하고 물러나려던 찰나.
"저 새끼드도 자주 보니 반가울 지경이네."
청명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가에 파고든다.
"……아무리 그래서 사파 놈들이 반갑다니."
"너무 자주 보긴 했잖아."
"저도 그렇습니다, 사숙. 장강에서 지겹도록 본 광경인데, 이 먼 데서 다시 보니 기분이 이상하기는 합니다. 이쯤되면 사파 놈들은 다 배 타고 다니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든다니까요."
"……그렇긴 한데."
청명이 코웃음을 쳤다.
"어하튼 저 새끼들은 성장이라는 게 없다니까. 배 타고 다니다가 그렇게 당해 놓고는 또 배를 타고 오나?"
"그럼 섬에 어떻게 오냐?"
"헤엄쳐 와야지!"
"……청명아. 세상 사람이 다 우리처럼 맛이 간 건 아니다."
"맛이 간 게 아니라. 합리적인 거지!"
"세상 합리가 다 뒈져도 그게 합리가 될 일은 없어……"
그 대화를 들은 이들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청명과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본다.
그들에게는 더없이 두렵기만 한 상황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하나의 이름이 그들의 뇌리에 떠올랐다.
매화도.
그래. 바로 그 이름이다.
'생각해 보니……'
매화도는 수로채의 병력에 포위당했던 장강 위의 외딴 섬.
화산은 그 섬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쳐들어가 절망에 빠져 있던 남궁세가를 구해 냈다. 그리고 그 업적 하나로 흔들릴지 않는 명성을 쌓아 올렸다.
차분히 생각해 보면 그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꽤 비슷한 면이 있지 않은가?
물론 상황이 완전히 같지는 않다. 매화도에서 사패련을 상대로 승리한 것은 화산이지만, 지금 이들은 화산의 일부에 불과하고, 진짜 저들을 상대로 맞서 싸워야 하는 건 바로 해남이니까.
하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천하의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이가 다름 아닌 저 화산의 제자들이라는 점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이들의 마음이 이전과 달리 조금은 편해진다.
게다가……
"그냥 상륙하자마자 족칠까?"
"그럴 거면 계획은 뭐 하러 세우냐! 이 새끼야!"
"아는데, 보고 나니 빡치잖아. 이 새끼들이 겁도 없이."
"아니. 쟤들은 우리가 여기 있는 줄 모른다니까?"
"몰라? 모르면 맞아야지!"
"……제발 좀."
사패련의 선단을 보고서도 기가 죽기는커녕, 되레 농담 다먹기나 하고 있는 이들을 보고 있으니 그들의 마음속에서도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들은 바다와 싸우는 바닷사람의 후에들.
실력은 몰라도 그 용기만은 천하의 어떤 문파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이들이다.
그런데 적을 보았다고 순간이나마 겁을 집어먹은 모습을 보이다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상륙하자마자 공격하실 거면 저희도 끼워 주십시오."
"응?"
청명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곽환소가 씨익 웃으며 말한다.
"사패련에 쌓인 걸로 치자면 저희보다 감정이 나쁜 곳은 없을 테니까요."
그 말을 들은 청명이 피식 웃는다.
"겁대가리가 없네. 그러다 뒈지면 어쩌려고?"
"죽는 게 겁났으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을 겁니다."
"호오?"
곽환소의 말에 해남 제자들의 표정이 결연해진다.
맞는 말이다.
애초에 이곳에 온 이들은 모두가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 이들.
그런데 이제 와 새삼 뭐가 두렵다는 말인가?
"……생각해 보면 쫒기기만 하다가 죽는 것보다는 우리가 공격하다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그게 더 속 시원하긴 할 거구요."
"나도 쌓인 게 많아서 저 새끼들 목에 칼 한번은 박아 봤으면 좋겠는데……"
"이를 말입니까."
모두의 목소리에 점점 호승심이 들어찬다.
두려움을 잊었기 때문이 아니다. 여전히 죽음은 무섭고, 사패련은 두렵다.
하지만 두려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없다면, 그 공포에 잠식되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그 사실을 이해했기에 없는 호기라도 끌어 올리려 애쓰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청명이 그제야 히죽 웃는다.
"기분은 알겠지만…… 일단 뭐……"
안색을 싹 바꾼 청명이 심드렁한 눈으로 임소병을 바라본다.
"나쁜 머리 굴려서 계획을 짠 놈의 성의도 있기는 하니까…… 일단은 계획대로 해야겠지."
"……그것 참 감사합니다."
임소병이 부글거리는 속을 억지로 참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곽 대협. 준비는 다 끝났습니까?"
곽환소가 상황을 재빠르게 흝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척 정도 남았습니다만, 지금 진행 중이니 곧 끝날 겁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그리고 지금 해안에 있는 인원 중 최소 인원을 빼고 모두 지정된 위치로 이동시켜 주십시오. 저들이 해안에 사람이 몰려 있는 걸 확인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예!"
곽환소가 빠르게 명을 내리자 해안에 있던 제자들이 뒤쪽으로 달려 나간다.
"발자국!"
그 순간, 임소병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발자국 지우십쇼! 발자국! 여기 사람이 미친 듯이 몰려 있었다고 온 동네에 자랑할 일 있습니까!"
그 말에 화들짝 놀란 해남의 제자들이 해안에 어지러이 찍힌 발자국들을 서둘러 비벼 지웠다.
"쯧."
임소병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찬다.
물 샐 틈 없이 만들어 놓은 둑도 작은 구멍 하나에서 무너지듯, 전략을 무너뜨리는 것은 이런 사소한 부분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움직이십시오!"
"예!"
임소병이 배와 해안의 상태를 빠르게 점검한다.
"저들이 이쪽에 상륙하는 건 확실한 겁니까? 준비 다 해 놨는데 다른 쪽으로 휙 가 버리면 의미가 없잖습니까."
"호가명이 왔을 겁니다."
"예?"
조금은 뜬금없이 들리는 대답에 남궁도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만인방 입장에서도 반드시 후환 없이 처리해야 하는 일입니다. 장일소가 직접 올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장일소는 사패련 본단에서 발을 뺄 수 없으니 호가명이 왔겠지요."
임소병이 고민할 일도 아니라는 듯 말을 이어 간다.
"장일소야 순간순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인간이지만, 호가명은 정직하게 실리를 추구하는 인간입니다. 우리가 이곳에 와 있다는 정보를 알았다면 모를까. 해남만 있는 곳에서 굳이 상황을 꼴 위인이 아닙니다. 반드시 여기에 상륙합니다."
남궁도위가 멍한 눈으로 임소병을 바라본다.
그 논리가 아니라, 그 말에 어려 있는 확신이 남궁도위를 당황하게 했다.
평소에는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이해하기 힘든 인간이지만, 이럴 때는 반박을 불허하는 위압감을 보여 주는 이가 또 임소병이다.
'이게 한 문파의 수장이 가지는 위엄.'
남궁도위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지만, 이런 점은 배워야 한다. 확실히 임소병은 쉽게 볼 이가……
"그럼 다른 곳에 상륙하면?"
"토껴야지요! 뒤도 안 돌아보고!"
"……"
임소병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다.
"그럼 저 새끼들이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왔다는 뜻이고, 대비를 다 하고 왔다는 뜻인데, 어설프게 대항하다간 그냥 모가지 잘리는 겁니다. 쓱싹쓱싹!"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남은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만 토끼는 건……"
"아니, 이 이간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해남이고 나발이고 내가 알 게 뭐야! 일단 나부터 살아야지."
아니다.
뭔가 착각을 했던 모양이다. 이런 인간에게 배울 점이 있을 리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멀리서 보이는 선단들은 방향을 바꾸지 않은 채, 그들이 있는 해안을 향해 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임소병이 날카로운 눈으로 해안의 상황을 마지막으로 점검한다.
"좋아!"
이 정도면 됐다는 듯 확신이 들지 임소병이 크게 손짓해 신호를 내렸다.
"미리 정한 위치로 가십시오! 미리 말하지만 절대 먼저 움직이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곽환소가 이끄는 해남의 제자들이 해안 너머에 있는 수풀 쪽으로 전력으로 달려갔다.
"저희도 움직입시다!"
"알겠습니다."
백천이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선단을 그 두 눈에 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제 남은 것은 미리 짠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뿐이다. 사소한 변수는 언제나처럼 그때그때 대응하는 것이 맞다.
"가자!"
"예!"
바닥을 박찬 화산의 제자들이 수풀을 뛰어넘어 계획한대로 해안과 이어진 산의 능선을 향해 내달렸다.
앞서 뛰는 백천의 등을 바라본 조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사숙도 연기가 많이 느셨네요."
"내가 보기에도 태연해 보이시더라."
"저는 다리가 후들거릴까 봐 걱정했는데."
"그러니까."
그들이라고 긴장되지 않을 리가 없다. 사패련과 만인방은 그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두렵고 위협적인 존재들이다.
평소에야 등 뒤를 받쳐 줘는 화산과 함께 싸운다는 자신감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단 한 번도 손발을 맞춰 보지 않은 해남파와 연계하여 싸워야 하는 상황이다. 왜 떨리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백천이 청명의 보조를 맞춰 실없는 농담을 나눠야 했던 이유는, 해남파의 제자드링 그들보다 더 두려워하고 긴장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앞선 이의 등을 보고 제 태도를 결정하는 법.
그렇기에 백천은 긴장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적어도 곁으로 보기에는 여유가 넘쳐야 한다.
조걸과 윤종은 그런 백천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지금 그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도 말이다.
"이쪽입니다!"
"예!"
달리던 이들이 임소병이 가리킨 능선의 움푹 파인 지형으로 몸을 숨긴다.
아직 거리가 있지만, 그 긴장감 때문인지 한껏 몸을 낮춘 이들이 고개만 살짝 들어 다가오는 배를 주시했다.
"……크네."
"그래. 전에 봤던 대로."
이미 한 번 본 적 있는 배들.
하지만 그 배가 해안에 접안해 있을 때와 그들을 향해 다가올 때의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정면에서 보이는 배들의 날코롭게 치솟은 선수가 마치 그들을 노리고 겨눠진 칼처럼 느껴졌다.
"사숙."
"그래."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다."
청명의 두 눈이 스산하게 가라앉는 그때.
촤아아악.
마침내 사패련의 선단들이 거친 물살을 가르며 그들이 있는 해안에 도달했다.
첨벙!
커다란 닻이 물속으로 처박히는 소리가 이 해안의 멍칭을 바꾸어 놓는다.
전장이라는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