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2화. 그리고 살기 위해서다!(2)
해남. 그 두 글자를 이제는 저러리려 하는 이들, 그리고 그 두 글자를 제 가슴에 품고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려는 이들도.
한때나마 해남이라는 두 글자를 품었든 이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금양백과 곽환소를 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딱히 더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 주지 않았다. 그저 이제는 자신들의 차례가 아니라는 것처럼 침묵했을 뿐.
두 사람의 침묵이 해남의 이름을 지닌 모두를 깨닫게 했다.
합류하여 함께 죽을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 남아 저들을 지켜볼 것인지, 그 모든 선택은 이제 오직 스스로에게 달린 것이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채근하지 않았다. 이것이 정당하다 소리 높여 외치지 않았다. 제 삶의 마지막이 어떤 모습일지는 오직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니까.
"후."
그때 깊은 적막을 깨고 스르릉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저벅. 저벅.
검을 뽑아 든 이자양이 앞으로 나서더니 곽환소의 옆으로 섰다. 무언가 말을 하진 않았다. 그저 곽환소의 곁을 지키며 섰을 뿐이다. 금양백의 뒤를 지키는 게 곽환소의 의무라면, 그의 옆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의무라는 걸 등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자극받은 이들은 제 입술을 짓씹었다.
저벅. 저벅.
또 몇몇 검수가 앞으로 나가 합류했다.
하나, 그리고 또 하나.
고작 몇 발짝에 불과한 짧은 길, 하지만 그 한없이 멀고도 아득한 길을 제 발로 걷는 이들이 있다.
어쩌면 그 길의 의미를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지 모른다 . 지금 내디딘 몇 걸음 때문에 맞이할 마지막 순간에는 후회하기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길을 걸었다. 이유를 정확히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이는 몇 없으리라. 그저 그래야 한다고 믿을 뿐이다.
저벅. 저벅.
하나와 둘을 넘엇 수십에 달하는 이들이 같은 이름을 쓰는 이들의 곁에 선다. 그리고 평생 제 곁에 두었던 검을 들어 제 의지를 다졌다.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해안으로 밀려오는 파도처럼 하나하나 더 많은 이들이 금양백과 곽환소의 의지에 제 의지를 더헀다.
하지만 모두가 그 광경에 뜨거운 열의를 느낀 건 아니었다.
"……사형."
떨떠름한 고홍의 목소리에 유공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왜……'
왜 이제 와 굳이 이런 일을 벌인단 말인가?
이제 다 끝난 판이었다. 이대로 파문식을 거행하고 사가로 내려가 버리는 것으로, 그와 해남의 인연은 남김없이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애 갑자기 이런 자리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해 댄단 말인가?
나서는 자와 그 자리에 멈춰 선 자.
그 대비는 지독할 정도로 극명했다.
장문인 금양백은 굳이 파문식을 거행하지 않는 걸로 문파를 떠날 이들의 부담을 덜어 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유공의 입장에선 이 자리게 되레 파문식보다 더한 수치를 주었다.
적어도 파문식은 스스로 수치심을 억누르고 나설 용기를 내는 것이다. 휩쓸려 목숨을 잃느니 힐난을 받더라고 나서서 파문을 ㅂ다는 게 더 용기 있는 행위처럼 보일 여지를 준다.
하지만 이런 광경 속에서는 아니다.
금양백이 만들어 낸 이 지독한 상황에서, 해남을 등질 이들은 그저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다. 해남이라는 이름에 제 목숨을 던지겠다 다짐한 이들의 등이나 지켜보며 말이다.
유공은 더욱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저들의 등이었다.
원래라면 해남을 떠날 이들이 앞으로 나서서 힐난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비겁자라 욕하는 눈빛과 어떻게든 우월감을 느끼려는 시선 속에서 이곳을 떠나야 했다. 그 눈빛이, 그 안에 서린 적대감이 유공을 흔들리지 않게 다잡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앞으로 나선 이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누구도 남겨진 이들을 바라보지 않는다. 누구도 해남을 저버린 이들에게 힐난의 눈빛을 보이지 않는다. 이미 앞을 바라보며 나선 이들에게 남겨진 이들은 관심 밖의 일이 되어 버렸다.
그 사실이 유공을 참기 어렵게 했다.
"사형…… 어떻게 합니까?"
고홍도 그런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안절부절못하며 유공에게 물었다.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유공은 되레 싸늘하게 그를 몰아붙였다.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
"……예?"
"장문인의 말씀을 못 들었느냐? 각자가 선택하면 될 일이다."
"하, 하지만 사형……"
유공은 더는 대꾸해 주지 않고 입술을 질끈 깨문 채 금양백만 노려보았다.
'사람을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어야 속이 풀리십니까, 장문인.'
이 자리를 통해 유공은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때로는 호의가 악의보다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순간에도 더 많은 이들이 앞에 나선 무리에 합류했다. 하지만 무도가 그런 건 아니었다. 이윽고 더는 누구도 나서지 않는 상황이 한참 동안 이어지자 침묵하고 있던 장로들이 마지막으로 나선 이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앞으로 나선 인원은 문파원의 절반이 조금 넘었다.
하지만 그건, 마지막까지 저들과 함께하지 않고 문파를 떠나기로 한 이들도 절반에 가깝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서로 비등한 수로 갈리기는 했으나, 사실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앞으로 나선 이들은 등 뒤에 누가 남았는지 굳이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건 해남이라는 두 글자에 모든것을 건 장문인과 그 길을 함께하기 위해 먼 곳에서 온 외인들, 그리고 그들이 헤쳐 나아가야 할 험로였다.
하지만 뒤에 남은 이들이 볼 수 있는 건, 오직 그들이 선택하지 못한 길을 걷기로 다짐한 이들의 등뿐이다. 그렇기에 차마 그들은 앞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대, 금양백이 남기 위해 선 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고개 숙일 것 없다."
금양백이 내뱉은 것은 힐난도, 질책도 아니었다.
"스스로 목숨을 걸 수 있는 것이 용기라면, 혈기를 억누르고 살아남기로 한 것 역시 용기다. 누구도 그 선택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금양백은 남은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 순간부터 너희는 해남의 제자가 아니다. 굳이 단전을 폐하고 무학을 회수하지는 않겠지만, 해남의 무학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문적에서 그 이름을 지울 것이다."
모두 알고 있다.
그게 남은 이들을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어설프게 무학을 사용한다면, 사패련은 반드시 그들을 추적하여 죽이려 들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강남 땅으로 향한 이들이 시선을 끌어 주어도 해남은 횡액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들을 위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괜스레 가슴이 아파 왔다.
"해남파의 제자가 아니라 해도, 너희가 이 섬을 함께 살아가는 해남인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강남으로 향할 것이다. 남은 이들은 이곳에서 해남인의 삶을 지켜 주거라."
남은 이들의 고개가 더 떨구어졌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한다고 해도, 결국은 스스로 문파의 이름을 버린 변절자들에 불과하다. 그 사리은 다른 누구보다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차라리 분노를 뒤집어쓰고 욕을 먹으면 마음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금양백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그들의 삶을 이어지길 기원할 뿐이ㅏㄷ.
그 사실이 남겨진 이들을 더욱 수치스럽게 했다.
"하산하거라."
휘몰아치는 감정의 격류에 어찌할 바 몰라 하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 금양백을 보았다.
"이별이 길어 좋을 건 없다. 지금 바로 산을 내려가거라. 그것으로 너희와의 인연은 끝난 것으로 하겠다."
"자, 장문인."
"가거라."
금양백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이들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둘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스승에게 예를 갖춘 그들은 돌아서서 어깨를 축 눌어뜨린 채 산문으로 향했다.
제자들이 떠나간다.
누군가는 눈물을 보였고, 누군가는 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숙였다. 누구는 욕지거리를 했고, 또 누군가는 화를 참지 못한 듯 제 가슴을 후려쳤다.
돌아선 이들과 돌아보지 않는 이들.
한때는 같은 꿈을 꾸었고, 서로가 가족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지금 이들의 길은 나뉘었다. 다시는 합쳐질 수 없도록.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은 유공은 그저 입술을 깨문 채, 해남의 이름을 짊어진 이들을 바라보았다.
마음은 떠나자고 하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한참 동안 그들을 바라보던 유공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는 입을 열었다.
"거기에 남았다고 해서 뭐가 대단한 일을 한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유공도 잘 알지 못했다.
사실 비난할 이유가 없다. 억지를 부릴 이유도 ㅇ벗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그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고, 저들은 멍청한 선택을 한 이들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저 저들을 비웃고 떠나 버리면 그만이 아니나규
"우리라고 해서 겁쟁이라 떠나는 건 아닙니다. 우월감을 느끼는 건 그 정도로 해 두십시오."
이자양이 얼굴을 찌푸렸다.
"저……!"
하지만 그가 막 한마디를 하려는 순간 곽환소가 어개를 가볍게 움켜잡아 오며 말렸다.
"……사형."
"됐다."
곽환소가 고개를 내젓고는 유공을 바라보았다.
"유공."
"……"
"한 가지 부탁을 하마."
"뭔……"
"우리가 떠나거든, 남은 해남의 전각을 한 번씩은 살펴 주거라."
유공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곽환소를 노려보았다.
"저는 이제 해남의 제자가 아닙니다."
"알고 있다."
곽환소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한때 함께 지냈던 정으로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더냐?"
유공은 말없이 곽환소를 노려보다가 휙 몸을 돌렸다. 그리고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산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자양은 그 모습을 보며 뿌득뿌득 이를 갈아붙였다.
"저 망할 놈이……"
"그만해라."
이자양은 산문을 나서는 유공을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이제 저들에게는 더 이상 신경을 쓸 필요가 없으니.
"장문인."
떠날 이들이 떠났다. 그럼에도 해남의 이름을 지키겠따 다짐하여 남은 이들을 대표하여 곽환소가 입을 열었다.
"이제 무엇ㅇ르 하면 되는 것입니까?"
"음."
금양백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을 바라본다. 그러자 그 눈빛을 받은 이들 중, 임소병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자!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바쁘게 움직여 주셔야 합니다. 우선 가까운 해안으로 가서 배를……"
"배를 구해 오면 되는 겁니까?"
"아니요."
"예?"
임소병이 씨익 사악한 미소를 흘렸다.
"구해 오는 게 아니라, 해안에 있는 배를 모조리 부숴 주십시오."
"……예?"
"싹 다! 하나도 남김없이! 고깃배고 뭐고 할 것 없이 모조리!"
"……예에?"
"움직이십쇼!"
"……"
뭔가, 예상과는 좀 다른 일이 펼쳐질 것만 같은 직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