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9화. 그건 그거고. (4)
곽환소는 생각했다.
‘이게 뭔 미친 소리지?’
처음에는 놀랐고, 이내 어처구니가 없어졌으며 끝내는 당황했다.
청명은 멍청하다며 힐난을 퍼부었지만, 곽환소는 해남의 대제자. 본디 멍청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들이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 그러니까⋯⋯.”
그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천우맹 특사로서의 일은 결렬되었으니 더는 논하지 않겠지만⋯⋯.”
“예.”
“그 자격을 모두 내려놓고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해남에 합류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곽환소는 입을 헤 벌린 채 천우맹 일행을 보았다. 옆에서 무슨 대화가 오가건 태연하게 밥을 밀어 넣고 있는 이들을 보고 있으니 겨우 찾아오려던 현실감이 멀리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말을 정제한 곽환소가 이윽고 그가 해야 할 가장 온당한 말을 입 밖으로 밀어 냈다.
“미치셨습니까?”
과하다고? 아니, 전혀 과하지 않다. 곽환소의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가장 온건한 말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내다 버리겠다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더 온건한 말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스읍, 이 새끼 말본새 보소? 어디 화산 장문대리한테!”
“청명아, 참아라!”
“화산 장문대리를 가장 막 대하는 사람은 너야⋯⋯.”
청명은 화를 냈지만 정작 백천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미친 걸로 보이십니까?”
“⋯⋯제정신으로 할 말은 아니잖습니까.”
“뭐 그리 틀린 말은 아니라 반박하기가 힘들군요.”
백천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결정이 난 것을.”
멍하니 있던 곽환소가 순간 무언가 떠오른 듯 크게 움찔했다.
“그, 그럼, 여기 계신 분들이 전부?”
“예, 그렇습니다.”
이제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진짜 제정신인가?’
여기 있는 이들이 누구인가?
화산의 장문대리와 남궁의 소가주, 당가의 소가주와 빙궁의 궁주다. 심지어는 녹림왕마저 있지 않은가?
물론 녹림왕은 한쪽 구석에서 ‘내가 어쩌다 이런 미친 새끼들하고 얽혀서 여기에 이러고 앉아 있나? 그냥 혀 깨물고 죽고 싶다’라는 기색을 팍팍 풍기고 있지만, 어쨌든 함께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곽환소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리만 벅벅 긁어 대었다.
당연히 고맙다. 모두가 해남을 외면하는 상황임에도, 굳이 해남까지 찾아와 주고, 협상이 결렬되었음에도 떠나지 않고 남아 주겠다고 하는데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눈물을 뿌리며 그 자리에 넙죽 엎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곽환소는 이 순간 새삼 깨달았다. 자신이 이토록 이성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니, 어쩌면 세상에 자신보다 더 비이성적인 인간이 수없이 많다는 걸 깨달은 건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어떤 입장에 서 계시는지 모르시는 겁니까?”
“⋯⋯.”
“여러분들은 각 문파의 미래를 짊어지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대체 왜 이 먼 땅에서 목숨을 내다 버리겠다는 겁니까?”
“그렇기 때문입니다.”
“예?”
백천이 담담하게 말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는 각 문파의 미래를 짊어진 이들입니다. 그러니 저희의 행적 하나하나가 문파의 본보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그걸 아시는 분들이⋯⋯.”
그때 백천이 단호한 목소리로 곽환소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 저희가 이대로 돌아간다면 저희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그 상황을 어찌 받아들이겠습니까?”
“⋯⋯.”
“해남까지 가 봤지만 일이 잘 안 풀렸고, 그래서 사패련이 들이닥치기 전에 줄행랑을 쳤다고 그들에게 말해 주어야 합니까?"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간 강대한 적이 있으면 동료를 버리고 달아나야 한다는 선례를 남길 뿐이니까요.”
“⋯⋯.”
“그러니 싸워야 하는 겁니다. 적이 강하니까 달아나는 게 아니라, 적이 강하니까 싸운다. 그게 협과 정을 논하며 이득을 얻은 이들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입니다.”
“하지만 천우맹은⋯⋯.”
“예. 물론 개인과 문파, 연맹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그런 개인의 협의를 누를 줄도 알아야 하는 곳이 맹이지요. 하지만⋯⋯.”
백천이 말을 하다 말고 나직이 쿡쿡 웃었다.
“뭐 어떻습니까? 맹주께서 여기에 안 계시는데. 나중에 혼이야 나겠지만, 당장 저희를 어쩌지는 못하시지요.”
“⋯⋯예?”
그 말이 나오자마자 옆에 있던 이들, 특히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우울해졌다.
“장문인이 아시면 우릴 죽일 거야.”
“이제 장문인이 아니라 태상장문인이시지.”
“아니, 장문인이 아셔도 우릴 죽일 거라고요. 사형.”
“⋯⋯어, 그⋯⋯.”
“사형은 운암 사숙조가 화내시는 걸 못 봤죠?"
“나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저는 딱 한 번 봤는데. 그⋯⋯. 제가 봤는데, 그⋯⋯.”
조걸이 생각만 해도 두렵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장문인이 안 바뀌었어야 하는 건데⋯⋯. 우린 다 뒈졌다.”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암울해졌지만, 백천만은 그저 태연했다.
“뒤에 닥칠 일은 뒤에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은 눈앞에 닥친 일만 고민하면 될 일이지요.”
곽환소는 그 순간 확실하게 깨달았다.
‘진짜 미친놈이네.’
이 허우대 멀쩡해 보이는 인간의 안에 얼마나 괴이한 것이 들어차 있는지 말이다.
말투는 정중하고, 얼굴은 더없이 신뢰가 가지만, 그 안에는 정말 화산스러운 것이 들어 있다. 하기야 이런 사람이니 화산의 장문대리를 맡은 것이겠지.
논리는 제멋대로고 앞뒤가 맞는 말이 없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지적해야 할지 감도 안 올 정도다.
하지만 곽환소는 차마 그 사실을 대놓고 지적하지 못했다. 이들의 합류가 이득이기 때문이 아니다.
동료.
지나가듯 무심하게 흘러나온 동료라는 그 백천의 한마디가 곽환소의 입을 강제로 닫아 버린 것이다.
“저희는⋯⋯.”
곽환소는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쥐어짜 냈다.
“천우맹의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예.”
“맹에 들지 않겠다고 확답을 드렸습니다.”
“압니다.”
곽환소가 눈에 힘을 주며 백천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런데도 저희가 천우맹의 동료입니까? 목숨까지 걸어 가며 같이 싸울 가치가 있는?”
“⋯⋯예?”
그 말을 들은 백천은 되레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해남이 천우맹에 들지 않았다고 사파가 된 것도 아니고 그래도 정파인데 같이 싸우지 못할 이유는 또 뭡니까?”
“⋯⋯.”
“물론 구파일방과 천우맹의 관계가 조금 어색한 면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냉정하게 말해서 천우맹과 소림의 관계가 나쁜 거지, 저희가 해남에 악감정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곽환소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백천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해남이 지금 사패련에 홀로 맞서고 있다는 것이고,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도록 담담했다. 대수롭지도 않고 굳이 논쟁할 필요도 없는 평범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듯이.
“그러니 싸우는 것뿐입니다. 거기에 왜 다른 말이 필요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곽환소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구어졌다. 감정이 북받쳤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짓고 있을 표정을 저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살짝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화산이 해남에 감정이 좋을 일이 없잖습니까?”
“물론 뭐 솔직히 그리 달가운 감정까지는 아닙니다. 아무래도 얽힌 게 있으니까요.”
“그런데⋯⋯.”
“하지만 그게 우리가 해남을 떠나야 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곽환소가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리고 조금 착각이 있었던 모양인데⋯⋯ 맹의 입장과 개인의 입장은 다릅니다. 하지만 그 말이 맹에서 이 상황을 알았다면 해남을 버렸을 거란 의미는 아닙니다.”
“⋯⋯.”
“저희는 그저 이곳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온 것일 뿐이죠. 상황을 알았더라면 해남이 천우맹에 합류하지 않는다 해도 전력으로 해남을 도우려 했을 겁니다.”
곽환소가 제 입술을 질끈 깨물고 물었다.
“그게⋯⋯ 천우맹의 방식입니까?”
“아닙니다.”
“⋯⋯예?”
“이건 천우맹의 방식이 아니라, 검을 든 이의 도리입니다.”
곽환소의 가슴이 일렁였다.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란 너무도 쉽다. 곽환소 역시 살아오며 수없이 들었고, 수없이 입 밖으로 내뱉었다.
하지만 정말 제 목숨을 걸어 놓고 이 말을 할 수 있는 이들이 천하에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그 몇 되지 않는 이들이 지금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의 눈앞에 말이다.
“⋯⋯감사합니다.”
지금만은 곽환소도 자신의 입장을 미뤄 두었다. 지금 이 말은 해남을 대변하는 대제자로서가 아니라, 그저 해남의 일개 제자로서 하는 말이었다.
“그저 말뿐이라 해도,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와 같이 죽어 준다는 말을 해 준⋯⋯.”
“누가?”
그때 한없이 못마땅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며 곽환소의 말허리를 잘랐다.
“⋯⋯예?”
“누가 같이 죽어 준대?”
“⋯⋯아, 아니. 지금.”
“아오, 이 새끼 진짜 정신 나갔나.”
청명이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리며 욕을 퍼부었다.
“죽긴 누가 죽어, 이 새끼야! 내가 미쳤어? 이 먼 데서 뒈지게? 화산 매화 숲에 조심스레 안장되어 대대손손 찬양받아도 모자랄 판에.”
“⋯⋯그 꼴만은 내 눈으로 안 봤으면 좋겠다.”
“저주지, 저주.”
“단장애에서 던져 버려야 해.”
“종남산에 묻는 게 낫지 않을까? 대대손손 저주도 될 거고?”
청명이 획 고개를 돌리며 눈을 부라리자 화산 제자들이 황급히 목을 움츠렸다.
“죽긴 누가 죽어 줘, 이 새끼야.”
“아, 아니⋯⋯.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까?”
“상황? 무슨 상황?”
“사패련이⋯⋯.”
“야!”
청명의 눈에서 아예 불꽃이 튀었다.
"사패련이 쳐들어오면 다 같이 목 빼 놓고 죽여 달라고 해야 해? 걔들이 전부 다 몰려오는 것도 아니고 그래 봐야 일부만 오는 건데, 명색이 구파일방이라는 놈들이 죽을 날 받아 놓은 영감들처럼 구는 것 보니 속이 다 터지네! 야, 이 새끼야! 여기서 입씨름할 시간 있으면 오는 놈들 싸그리 쳐죽일 생각을 해야지!”
“저, 전력이⋯⋯.”
“전력은 얼어 뒈질! 싸움은 센 놈이 이기는 게 아니야. 이긴 놈이 센 거지. 전력 타령 할 거면 중원은 백 년 전에 작살났어!”
“그 말도 맞지.”
“마교 새끼들 진짜 세더라.”
“⋯⋯예전엔 더 셌다잖아. 그걸 어떻게 이겼나 몰라.”
“거기에 비하면 사패련이야 별것도 아니지.”
어안이 벙벙해진 곽환소가 모두를 멍하니 보았다. 그때 청명이 또박또박 말했다.
“똑바로 들어, 새끼야.”
“⋯⋯.”
“죽을 각오로 싸우는 것과 죽으러 가는 건 달라. 누가 여기서 죽어 준대? 개소리하지 마. 나는 사패련 새끼들이랑 싸우려는 거지, 여기서 뒈지려는 게 아니니까.”
“화산검협⋯⋯.”
청명이 살짝 가라앉은 눈으로 곽환소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면서 낭비할 시간 있으면 가서 준비나 해. 밥 먹고 나면 바로 이야기하러 갈 테니까.”
“⋯⋯무슨 이야기 말씀이십니까?”
“무슨 이야기긴.”
모두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꽂혀 들었다.
“저 사패련 새끼들을 어떻게 죽일지 논의해야지.”
청명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