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8화. 그건 그거고. (3)
“아, 아니. 그⋯⋯.”
그 순간, 열린 문으로 다른 천우맹 일행들 역시 비척비척 모습을 드러냈다.
“끄응. 여독이 생각보다 상당했던 모양이군.”
“형님. 몸이 너무 약하신 것 아닙니까? 당가에서 좋은 건 다 챙겨 드셨을 텐데.”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잘 챙겨 먹은 건 남궁에서 자란 너겠지. 당가에는 독물은 많아도 영물은 없단 말이다. 먹어 봐야 독단이지.”
“당가 사람들은 독단을 영단처럼 활용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대체 어디서 그런 헛소문이 퍼지는 건지 모르겠네. 당가 사람은 피 대신 독이 흐른다더냐? 우리도 독 먹으면 죽어! 남궁이 칼 휘두른다고 칼 맞아도 안 죽는다더냐?”
“듣고 보니⋯⋯.”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며 걸어 나오는 이들을 본 곽환소가 멍한 얼굴로 두 눈을 끔뻑거렸다.
“밥은 왜 안 준답니까?”
“쯧쯧. 언제까지 앉아서 받아먹을 생각이냐. 시일이 지났으면 당연히 식당에 직접 가서 먹는 거지.”
“어제까지는 날라 줬으니까 그러죠.”
“새날이 밝았잖느냐. 어제와 같을 수 없지.”
“이야, 칼 같네요.”
이 인간들이 대체 왜 아직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
곽환소의 입에서 멍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니⋯⋯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응?”
“태풍이 멎으면 떠나시라고 배까지 준비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
배를 벅벅 긁어 대던 청명이 시큰둥하게 문 안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사숙. 얘들이 배 준비해 줬어?”
“음? 아아, 내가 들었다. 해안에 배를 준비해 뒀으니 섬을 나갈 때 쓰라고 하시더구나.”
안쪽에서 백천이 걸어 나왔다.
의복이 흐트러진 다른 이들과는 달리 백천의 의복은 여전히 티 한 점 없이 깨끗했다. 햇살을 받아 희게 빛나는 백색 무복을 망연히 보던 곽환소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정신이 있는 겁니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정신이 없는 건 그쪽이지, 이 새끼야.”
“⋯⋯예?”
“손님이 왔으면 밥은 먹여야지! 예의라고는 단장애에서 집어 던진 화산도 손님을 굶기지는 않는다!”
“청명아. 다른 문파에 와서 자문의 욕을 하면 안 된다.”
“이 새끼들이 화산만도 못하잖아!”
“타문 욕도 하면 안 된다.”
곽환소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사패련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태연하게 조식까지 챙겨 먹겠다니. 신경이 고래 심줄로 만들어져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저 인간들은 대체⋯⋯.
“자양.”
“⋯⋯예, 대사형.”
“손님들은 식당으로 안내해 드려라. 식사를 준비하라고 일러 두고.”
“아니, 사형. 이건⋯⋯.”
“시키는 대로 하거라.”
“예⋯⋯.”
자양은 불만을 모조리 욱여넣은 눈빛으로 청명과 그 일행들을 노려보았다.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원칙상으로는 이들의 말에 틀린 점이 없다. 먼 곳에서 호의를 가지고 찾아온 객을 조식조차 내주지 않고 떠나보내는 것은 분명 예의에 어긋난다. 다른 때였다면 장문인부터 무슨 일을 그렇게 처리하느냐고 호된 호통을 내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해남의 제자들은 이제 사패련을 맞이해야 한다. 남은 이들은 맞서 싸우다 죽을 것이고, 사패련을 피해 하산한 이들도 이제는 숨을 죽이며 그들의 치세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곳에 있는 모두는 이미 그 운명을 알고 있다. 그런 이들이 할 일을 다 끝냈다고 유유히 해남을 빠져나가는 천우맹도들을 보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아무리 의지가 대단하다 해도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적당히 말을 해도 알아들을 거라 생각했건만.’
이자양의 시선이 백천의 얼굴에 꽂혔다.
멍청한 이가 아니니 굳이 이쪽의 사정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여겼는데, 아무래도 저 눈치 없는 인간은 그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따라오십쇼.”
속에서 천불이 끓어올랐지만, 이미 다른 제자들이 모두 저들의 모습을 눈으로 봐 버린 이상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적당히 대접하고 배웅까지 해 주는 수밖에.
이자양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근데 너희들은 아침부터 왜 이렇게 단체로 몰려왔냐? 시비 거는 것도 아니고?”
청명의 물음에 이자양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그는 더 참지 못하고 벼락같이 호통을 쳤다.
“그런데 이 작자가 진짜!”
“자양!”
“아니, 대사형! 해도 해도 너무하잖습니까! 이게 조롱이 아니면 뭡니까?”
“그만하라지 않느냐!”
곽환소가 눈을 부릅뜨며 일갈하자 이자양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방홍(房鴻). 네가 안내해 드려라!”
“⋯⋯제, 제가요, 사형?”
“왜? 못 하겠느냐?”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이자양은 몸을 획 돌려 버렸다. 뒤에선 어떻게든 담담해 보이기 위해 애쓰는 곽환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객들이 가셨을 거라 생각하여 침소를 청소하러 온 참이었습니다. 아직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응?”
“짐은 저희가 잘 정리할 터이니, 개의치 마시고 가서 식사부터 하시기 바랍니다. 돌아오시면 바로 떠나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자양은 곽환소의 성격이 사실 자신보다도 더 급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저게 얼마나 큰 인내심을 발휘하여 하는 말인지도 알 수밖에 없었다.
대사형의 침착한 반응 앞에 이자양은 괜스레 자신의 성급한 행동이 부끄러워졌다.
그때였다.
“사숙. 얘들 뭐라는 거야?”
곽환소의 말을 대놓고 무시하는 듯한 청명의 목소리가 시큰둥하게 울렸다. 이게 이자양의 마지막 이성의 끈을 끊어 버렸다.
‘오냐!’
이자양이 눈에 불을 켜고 몸을 돌렸다. 해남의 마지막 모습이고 나발이고,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의 버릇만은 고쳐 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청명과 백천이 대화하는 게 들려온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서 몸에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남이 잘 쓰고 있는 처소를 왜 청소해?”
“청명아. 좋은 객잔에서는 사람이 묵고 있어도 방을 치워 준단다.”
“그건 객잔이고. 여기가 객잔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그럼 예의 없는 거지. 왜 남의 짐을 마음대로 뒤져.”
“흐음. 그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지. 섬서와 남해의 예가 꼭 같다고는 할 수 없으니.”
이자양은 화를 낼 기운조차 잃고 헛웃음을 흘렸다. 곽환소가 이를 악물고 부연했다.
“그게 아니라 떠나실 분들의 짐을 미리 싸 드리는 것입니다. 사패련이 공격해 오기 전에 섬을 떠나시려면 한시가 급합니다.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곽환소도 더는 참기 힘들었는지 말 안에 뼈가 있었다. 하지만 청명은 되레 헛웃음을 흘렸다.
“그건 내가 갈 때의 이야기고.”
“그러니까! 짐⋯⋯. 예?”
버럭 소리를 치려던 곽환소가 귀를 의심하며 눈을 끔뻑였다.
“누가 간대?”
“⋯⋯.”
“얘들 웃기네. 남해는 손님을 이렇게 대접하나? 내 입으로 간다는 말은 한 번도 안 했는데, 왜 지들 마음대로 손님을 쫓아내?”
“식비가 많이 들긴 하지.”
“양심적으로 우리가 너무 처먹긴 했다.”
“그거 다 남궁 소가주님이 드신 겁니다.”
“제, 제가요? 제가? 와, 제가?”
정작 천우맹 일행들은 반응이 태연하기만 했다. 곽환소는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들을 보았다. 청명이 손가락을 튀기며 말했다.
“어이, 너.”
“⋯⋯예?”
“헛소리하지 말고 식당이나 안내해. 우리 짐은 건드리지 말고. 하여튼 요즘 애들은 경우가 없어요, 경우가! 에잉!”
“⋯⋯.”
“앞장서!”
“예?”
“뭐 해?”
“아⋯⋯. 예.”
곽환소는 홀린 듯이 그들을 이끌고 식당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해남의 제자들은 그저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저기⋯⋯ 사형.”
“응?”
“그럼 저희는 뭘 합니까? 청소합니까? 아니면⋯⋯.”
이자양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 * *
“안⋯⋯ 가신다고요?”
곽환소는 최대한 황당한 티를 덜 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며 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그 말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나, 날고기를 먹는다고요?”
“이거 귀한 식재료예요.”
“안 익힌 거잖습니까? 누가 생선을 날로 먹습니까?”
“원래 그렇게 먹는 거라니까?”
“장강에 고기 잡는 사람들도 이렇겐 안 먹었습니다! 안휘도 동정호가 옆에 있는데 생선은 익혀 먹었다고요!”
“북해에서는 먹던데?”
“아니, 북해도 원래는 안 먹었지. 그래서 우리가 먹인 거잖아.”
“어쨌거나 먹잖습니까? 먹고 이상 없었으면 됐죠.”
“여긴 원래 이렇게 먹는 모양이구나.”
“아, 아니⋯⋯.”
남궁도위가 어떻게든 반박하려 하자 청명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냥 처먹어, 이 새끼야! 어디서 반찬 투정이야! 이래서 귀하게 큰 것들은! 다 구석에 처박아 놓고 진흙만 퍼먹여야 사람 되지!”
“귀하게 큰 거랑 이게 무슨 상관입니까!”
“닥쳐. 망할 부자 놈아!”
남궁도위는 문화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떨리는 눈으로 다른 이들의 동의를 구하려 애썼다.
하지만.
“오, 쫀득쫀득.”
“쫙쫙 달라붙네.”
“맛있는데?”
이미 화산 놈들은 날생선을 있는 대로 입 안에 쑤셔 넣고 있었다. 심지어 당패마저 ‘꿀맛!’ 하고 외치며 생선 살을 쩝쩝 씹고 있었다.
‘처먹을 수 있는 거라면 남의 생살도 뜯어 먹을 것들.’
아귀가 따로 있나. 저것들이 아귀지. 남궁도위가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하지만 이곳에는 남궁도위보다 더 속이 답답한 이가 있었다.
“아니! 말 좀 들어 주십쇼!”
“⋯⋯아, 밥 먹는데 자꾸⋯⋯.”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남해는 문화가 다른 모양이지.”
곽환소가 제 머리를 감싸쥐었다. 저 주둥이들에 대고 칼을 휘둘러 버리지 않는 자신의 인내심을 칭찬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이, 긍에 아아우어.”
“⋯⋯예?”
청명이 입 안에서 씹고 있던 걸 꿀꺽 삼키고는 화를 냈다.
“왜 자꾸 나가라고 핍박이야! 밥이 아깝냐?”
“네, 아깝⋯⋯. 아니, 그게 아니라 이미 이야기는 다 끝났고, 천우맹과 해남은 각자 갈 길을 가기로 결정이 나지 않았습니까?”
백천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남은 일이 없는데 이곳에 남아 계실 이유가 없잖습니까. 장문대리께서도 천우맹의 특사로서 그 입장을 맹에 잘 전달하겠다고 저희 장문인께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그 말도 맞습니다.”
이번에도 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가슴이 더 갑갑해진 건 곽환소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 가신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청명이 가슴을 치며 끼어들었다.
“그건 그거고, 인마!”
“예?”
“근데 얘는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지? 애가 좀 멍청한가?”
청명이 짜증 난다는 듯 얼굴을 한껏 구겼다.
“자, 봐 봐. 설명해 줄게. 천우맹이랑 협상은 결렬된 거잖아.”
“그렇죠.”
“그럼 우리는 그 상황을 맹에 잘 전달하면 되는 것 아냐?”
“그렇죠!”
“그럼 우리 역할은 끝난 거잖아.”
“제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청명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니까! 그럼 우린 맡은 임무를 다했으니까 남은 일은 마음대로 하면 되는 거 아냐! 천우맹은 가는데 나는 안 간다고! 이게 그렇게 어렵냐? 이해가 안 돼?”
곽환소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해가 되겠냐?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얼이 빠져 버린 그를 보며 청명이 혀를 찼다.
“이 간단한 걸 이해 못 해서 어쩌려고 그러지? 내가 속이 터진다, 진짜.”
곽환소는 고민에 잠겼다. 대체 이 미친놈에게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는가, 하고.듣고 있던 백천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식사가 끝나면 다시 자리를 가졌으면 합니다.”
“⋯⋯예?”
“천우맹의 입장을 대변하는 화산의 장문대리로서가 아니라⋯⋯.”
백천의 눈빛이 어느새 깊고 진중해졌다.
“중원의 동료가 위기에 처했음을 듣고 찾아온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말입니다.”
그 순간, 곽환소의 등을 타고 소름이 돋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