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9화. 저는 모르겠습니다. (4)
쇄애애애액!
천우맹 일행은 말 그대로 바람처럼 달렸다. 이미 지체된 시간이 있으니 한시도 쉬어 갈 수가 없었다. 낮과 밤을 따지지 않고 인적 드문 소로를 통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던 와중.
"잠깐!"
임소병이 짧게 소리치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내달리던 이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임소병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을 소매로 훔치더니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흠."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요?"
"예."
윤종이 의아한 눈으로 앞을 내다봤다. 지금껏 달려온 길과 딱히 다를 게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소병은 한마디로 그의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여기부터는 저도 길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
"예?"
조걸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아니, 천하의 산이 다 손안에 있다고 그렇게 호언장담하시더니!"
"그 말은 딱히 틀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앞을 과연 천하(天下)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는 점이죠."
"그건 또 무슨⋯⋯."
그 의문에 대답해 준 건 백천이었다. 그는 슬쩍 고개를 틀어 임소병에게 물었다. 짐작 가는 바가 있다는 듯이.
"여기부터입니까?"
"예."
"사숙. 무슨 말입니까?"
"대산(大山)이다."
"예?"
"십만대산."
그 순간 조걸의 등을 타고 소름이 돋아 올랐다.
'여기가?'
이 사실을 깨닫고 보니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확실히 지나왔던 길과 다를 건 없으나, 눈앞엔 어느새 완만한 산등성이가 아닌 삐죽삐죽 솟은 산봉우리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십만대산⋯⋯.'
알고 나니 저 광경이 수백 자루의 칼이 하늘을 향해 꽂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부터는 미지(未知)입니다. 녹림이 산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 산을 오가는 이들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십만대산에는 사람이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신이 박혀 있는 문파라면 절대 발을 들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지요."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이라면 이곳을 꺼릴 수밖에 없다. 이곳이야말로 과거 중원을 지옥으로 몰아갔던 그 마교의 본거지였으니까.
마교가 많이 잊힌 지금도, 그 이름이 주는 불길함과 공포만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러다 보니 누가 특별히 정해 공표한 게 아님에도, 중원 무림은 십만대산을 발 들여서는 안 될 금지(禁地)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 녹림왕."
"예."
"일단 우리 정파 사람들에겐 십만대산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인식이 있는데⋯⋯ 혹시 사파도 마찬가지입니까?"
"사파라고 해서 사람이 아닌 건 아니잖습니까? 그들도 불길함이 뭔지는 압니다."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애초에 정파가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것도 뭔가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잖습니까? 그저 껄끄럽고 불길하기 때문이죠."
"그렇죠⋯⋯."
"사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사파는 애초에 이곳에 발을 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이 없는 곳에 사파가 뭐 하러 자리를 잡겠습니까? 산속에서 도를 닦을 것도 아니고."
"하기야."
정파는 민가와 떨어져 있어도 큰 문제 없다. 특히나 도가나 불가 계열의 문파는 수행하는 이들이 모이다 보니 외딴곳을 선호하는 편이다. 어차피 문파가 유명해지면 사람은 알아서 찾아오는 법이므로.
하지만 사파는 다르다. 사파는 사람들이 꺼린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금전을 갈취하여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사파는 커다란 도시 근처에 자리를 잡는 편이었다.
임소병이 피식 웃었다.
"애초에 장일소가 만인방을 그렇게 키울 수 있었던 이유도 그 근거지가 귀주와 광동이라는 부분이 컸습니다. 다른 대문파들은 십만대산 때문에 그 아래로는 잘 움직이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자잘한 문파들만 난립하는 혼란이 벌어졌고, 장일소가 그 땅을 평정한 거지요."
"⋯⋯그거 듣기에 따라서는 마교 새끼들 때문에 장일소가 컸다는 말로 들리는데?"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설프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닐 겁니다."
백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여하튼 마교 새끼들은 도움 되는 게 없네."
그가 짐짓 과장되게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얼굴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여길 통과해야 하는 겁니까?"
"어쩔 수 없죠. 정보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사패련의 눈이 가장 덜 미치는 곳도 여기니까요."
"하지만⋯⋯."
남궁도위가 살짝 불길한 눈으로 십만대산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얼마 전 항주에서 보았던 주교의 모습이었다. 만약 저곳에 마교의 잔당이 아직 있다면⋯⋯. 심지어 그 주교 같은 놈이 있기라도 하면?
슬쩍 시선을 돌리니 다른 이들도 똑같은 우려를 하는 얼굴로 눈을 마주쳐 왔다.
이를 눈치챈 임소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야 이 길로 가는 걸 추천하기는 하지만, 우회하는 것도 뭐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애초에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니까요."
그 말에 눈빛을 교환하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회하는 쪽으로⋯⋯."
"지랄 났다. 지랄 났어."
하지만 그들의 소심한 목소리는 뒤쪽에서 들려온 짜증 섞인 목소리에 얻어맞고 완전히 묻혀 버렸다.
"뭐, 씨⋯⋯ 우회?"
"⋯⋯."
"근데 이 새끼들은 정신이 나갔나? 야, 이 새끼들아! 백 년 전에는 저기에 마교 새끼들이 바글바글했어도 닥치고 정면으로 들이받았어. 그런데 그 후손이라는 새끼들이 다 정리해 놓은 땅에도 겁나서 못 들어간다고? 왜? 마교가 무섭냐?"
"그, 그때는 우리도 개떼처럼 몰려갔겠지! 지금 우린 열 명밖에 안 되잖아!"
"그래서 겁나?"
"누가 마교가 겁난대?"
"그럼?"
조걸이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귀, 귀신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것도 마교 귀⋯⋯. 아아악!"
청명에게 냅다 걷어차인 조걸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처박혔다.
"이 미친 새끼 말하는 거 봐! 야, 이 미친놈아! 네가 도사야, 도사! 귀신 잡는 도사!"
"그건 맞지."
"원래 우리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게 맞긴 하지."
"잡아 본 적은 없지만⋯⋯."
도교가 아닌 불교에 몸담은 이들조차도, 잡귀나 귀신에 관련된 일은 도관에 의뢰하기 마련이다. 화산이야 그런 부분에는 손을 거의 대지 않지만, 무당에서는 도제(道齊)가 수입의 꽤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 새끼들아! 귀신이 됐으면 그 마교 새끼들만 됐겠냐? 저기서 뒈진 정파 새끼들도 다 귀신 됐겠지! 이긴 귀신이 우리 편인데 뭐가 문제야!"
"처, 청명아! 선조시다!"
"그분들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이 새끼야!"
"쯧⋯⋯."
청명이 혀를 찼다.
안 되긴 뭘 안 되냐, 그 쓸모없는 것들 엉덩이를 걷어차 가면서 십만대산으로 끌고 간 게 바로 청명이었는데.
'어째 그때고 지금이고 뭐가 달라진 게 없냐?'
한숨을 푹 내쉰 청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앞장섰다.
"잔말 말고 따라와."
"⋯⋯아, 아니⋯⋯."
"그냥 따라오라고."
먼저 휘휘 앞서가는 청명을 보며 모두가 불안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가, 갈까요?"
"⋯⋯가야죠. 그래야죠."
결국 하나둘씩 마지못해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불안한 기색은 영 떨치질 못했다.
파아아앗.
십만대산의 산자락에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내 다시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간간이 산짐승을 마주치는 것 외에는 살아 있는 것의 흔적이랄 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내내 불안해하던 이들도 이내 안정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과할 정도로 고요하네요."
"그러게."
그들이 지금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굳이 궂은 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주친 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럴 만도 하네.'
백천은 주위를 보며 금세 그 이유를 알았다.
만일 이곳이 마교의 근거지가 아니었다 해도 인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여긴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 아니다.
빼죽한 봉우리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보니 농사를 짓기에도 좋지 않았고, 그렇다고 산짐승을 사냥해 살아가기에는 봉우리 하나하나가 너무 가팔랐다.
무인은 무인대로, 양민은 양민대로 굳이 터를 잡을 이유가 없는 땅이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무섭네."
"예, 정말 무섭습니다."
백천의 말에 윤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예전, 먼발치에서 십만대산을 눈으로 본 적이 있다. 선조의 유해를 수습해 화산으로 돌아갔던 때 말이다.
하지만 직접 진입해 본 십만대산은 그렇게 멀리서 바라볼 때와는 사뭇 달랐다.
왜 이곳이 마교의 본거지였고, 왜 이곳에서 그런 끔찍한 전쟁이 벌어졌는지, 이 숨 막히는 지형이 절절히 알게 해 주었다.
끝도 없이 이어진 삐죽한 봉우리 때문에 어느 곳에서 보더라도 불과 몇 리 떨어진 뒤쪽의 상황을 알 수가 없다.
중원의 다른 곳이었다면 눈으로 훤히 파악할 수 있는 거리도 이곳에선 보기 힘들다. 완전한 암흑에 가까웠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옆으로 돌아가도 또 다른 봉우리가 앞을 가로막는다. 저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안으로 진입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디에 마교가 있을지 모르는데 말이지⋯⋯.'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군을 이끄는 입장이라고 생각해 보면 아득했다. 어디에 매복이 있을지 몰라 함부로 진입할 수 없을 테니까.
만일 이곳에 자리를 잡은 채 항전하는 입장이었다면, 그 역시 난감했을 것이다. 이 많은 매복지 중에 어디를 택해야 더 효과적인지 고민하느라 머리가 깨졌을 테니 말이다.
'이런 곳으로 정예를 이끌며 밀고 들어갔다고?'
예전에는 그저 막연히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다. 천마를 죽이기 위해 제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진 협사들의 의기만 생각하면 됐으니까.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본 십만대산은 그 상황이 생각처럼 낭만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만약 누군가가 백천더러 저곳으로 모든 정예를 끌어모아 돌입하자고 했으면 무슨 대답을 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제정신이냐는 말이 제일 먼저 나왔을 것이다.
단 한 번의 실수. 단 한 번의 오판으로 모든 전력을 상실해도 이상하지 않은 지형이니까.
그럼에도 정예를 이끌고 이곳에 와야 했던 이들은 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
건곤일척.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심정으로 응하는 단 한 번의 도박.
그게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 화산이 있었구나.'
누구보다 선두에⋯⋯.
백천은 저도 모르게 뒤돌아보았다. 뒤를 따르는 이들의 표정도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그가 느낀 심정을 이들 역시 비슷하게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화산의 제자들은 안색이 더욱 어두웠다.
그리고 그때였다.
"사, 사숙! 저기!"
갑자기 터져 나온 조걸의 목소리에 백천이 고개를 획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