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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28화 (1,229/1,567)

1228화. 저는 모르겠습니다. (3)

"똑바로 안 서?"

"⋯⋯."

"똑바로 서라고 했다?"

형욱의 표정은 그저 망연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상식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거기서 벗어나는 광경을 마주하면 누구라도 당황할 터.

물론 마음을 넓게 먹으면 어떻게든 이해를 해 볼 수도 있다.

저 무서운 사패련의 악도들을 단칼에 쓰러뜨린 무시무시한 이들이 갑자기 동료를 쥐 잡듯이 두들겨 패 버리는데, 심지어 그 폭력을 휘두르는 이가 무리 중 가장 어려 보이는 사람이라는 점도⋯⋯ 어떻게든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그래도 좀 너무한 게 아닌가?'

가장 어려 보이던 그가 앞에 선 다른 이를 또 갈구고 있는 게 이제 와 또다시 새롭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그 갈굼의 대상이 되어 시무룩해진 이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란 점만 빼면 말이다.

"중간에 딴 길로 새면 뒈진다."

"⋯⋯."

"네가 적당히 쉬면서 달려도 되겠지 생각하면 나도 적당한 목도리 하나 얻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살아도 같이 죽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청명아. 살아도 같이 살고다."

"그게 그거지!"

"많이 다르다⋯⋯."

"여하튼!"

청명이 백아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더니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까만 코앞에 대고 흔들었다.

"이게 그 야수궁주 아저씨가 준 만리정⋯⋯. 만리추⋯⋯. 아무튼 뭐 그런 거야. 너는 이 냄새를 몇천 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 조금이라도 늦었다 싶으면 그때는 정말 뒈지는 거야. 알았어?"

"⋯⋯."

"알았냐고!"

목에다가 조막만 한 봇짐을 매단 백아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쯧!"

청명이 혀를 차고는 영 미덥지 못한 듯 백아를 흘겼다.

"하여튼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 밎을 수 없는 광경에도 주위에선 그저 태연했다.

"뭐⋯⋯ 어쩔 수 없지. 출발해."

키이!

백아가 몸을 획 돌렸다.

"너 진짜 내가 당부하는데, 똑바⋯⋯. 야! 말 아직 안 끝났어! 야!"

백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으로 달려 청명의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와, 속도 보소."

"진짜 빠르네."

"거의 하루면 갔다 오겠는데? 뭐가 저리 급하냐?"

"⋯⋯저 잔소리를 듣고 있느니 그냥 달리고 말겠다는 거겠죠. 나 같아도 그러겠네요."

"공감합니다."

이미 멀어진 백아의 뒤에다가 주먹을 휘두르고 소리를 질러 대는 청명을 보며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괴롭힐 먹잇감을 잃어 아쉬운지 입맛을 다신 청명은 불현듯 고개를 획 돌려 임소병을 보았다. 움찔한 임소병이 시퍼렇게 물든 제 눈두덩을 바삐 문질렀다.

청명이 입을 열었다.

"너도! 혹⋯⋯."

"혹시라도 제대로 사람들을 구출하지 못하면 뒈질 줄 알란 말씀이시죠?"

"그⋯⋯."

"그리고 썩을 사파 새끼들이 사람들한테 함부로 굴었다는 말이라도 나오면 껍데기를 벗겨 버릴 거란 말씀이시죠?"

"절⋯⋯."

"우리가 지나온 절벽은 일반 양민들이 통행하기 어려울 테니 그쪽 말고 다른 길로 가라는 말도 서신에 적어 놨냐, 이 말씀이시죠?"

"⋯⋯."

청명이 할 말을 잃었다. 임소병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부채를 펼쳤다.

"후후후! 제가 누구입니까! 이 녹림왕 임소병, 화산검협의 오른팔로서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 꺄악!"

날아든 검집에 이마 한가운데를 찍힌 임소병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누가 오른팔이야, 누가! 이 사파 새끼야! 어디 사(邪)자 쓰는 새끼가 신성한 도인의 육신을 침탈하려고! 내가 이 새끼야, 예전에는 사파 새끼들이랑 겸상은커녕 반경 오 리 내에서는 물도 안 마시던 사람이야!"

또다시 임소병을 쥐 잡듯 하는 청명을 보며 백천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쪽에서 아예 시선을 떼 버리며 형욱에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예."

"그보다⋯⋯."

안색을 가다듬은 그가 말했다.

"아무리 늦어도 닷새 내로는 여러분들을 모실 이들이 도착할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형욱이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로 백천을 보았다.

"무사님⋯⋯.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그럴 의도로 말씀드렸던 게 아닌데⋯⋯."

"압니다."

하지만 백천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탓하셔서 마지못해 행동으로 옮긴 것이 아닙니다. 몰랐던 걸 새로이 알았기에 고친 것뿐입니다."

"이 은혜를 저희가 어찌 갚아야 할지⋯⋯."

형욱이 감사함과 죄송함과 민망함에 말도 채 다 잇질 못하니 백천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정 고마우시다면 저희에게 한 이야기를 강북에 가서도 들려주십시오. 그곳에 있는 이들이 연유를 묻는다면 더하거나 빼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순간 형욱의 안색이 살짝 핼쑥해졌다.

이 무사들의 동료들까지 그가 한 후안무치한 짓을 알게 되면 어떤 시선을 보낼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천은 그런 우려를 짐작했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이들이 아닙니다."

"⋯⋯."

"제가 이런 부탁을 드리는 건, 그들도 강남에서 고통받는 분들이 어떤 일들을 겪고 있고, 어떤 심정으로 살아가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사님⋯⋯."

"저희는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리 대단한 이들이 아닙니다. 그저 남들보다 칼 좀 휘두를 줄 아는 것에 불과하지요. 저희가 알고도 외면한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은 몰라서 손 쓰지 못하는 일도 많습니다."

"아⋯⋯."

형욱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보답은 그걸로 충분합니다."

형욱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손가락질당하게 된다 해도, 그 말만은 지키겠다는 듯이.

그 비장한 얼굴을 보며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 저희는 길이 바빠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제가 배운 것 없고 무식한 놈이지만, 예의를 차리는 말로 발을 잡아서는 안 될 분들이시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저 강녕하시길 마음 다해 빌겠습니다."

"예."

뒤쪽에서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이들이 형욱을 향해 웃어 주고는 몸을 돌렸다.

"그럼 보중하세요!"

당소소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에게 밥을 얻어먹었던 이들은 입구까지 나와 떠나는 천우맹 일행을 바라보긴 했지만, 여전히 쉽사리 대답하거나 인사하지 못했다. 그저 어쩔 줄 몰라 하며 보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당소소는 구김 없는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더니 몸을 돌렸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저들이 느낄 부담이 커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가죠!"

"그래."

천우맹 일행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들은 그들이 떠나간 길과 마을 중앙에 쌓인 곡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침묵 속에서, 그들의 얼굴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형욱이 자네⋯⋯."

"아무 말 마십시오."

형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파 놈들더러 짐승 같은 것들이라 욕을 해 댔는데⋯⋯. 막상 닥쳐 보니 저도 짐승이나 매한가지인 것 같습니다."

"⋯⋯."

"후⋯⋯."

어깨를 축 늘어뜨린 형욱이 아버지가 누워 계실 집으로 향했다. 마을 사람들은 복잡한 얼굴로 그런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파아아앗!

임소병을 앞세운 이들은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생각지도 못한 일로 시간을 지체했다. 만회하려면 조금 위험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속도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말없이 한참 달리던 백천은 제 옆에서 달리는 청명을 향해 곁눈질했다. 그는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앞만 주시하고 있었다.

백천은 짧게 탄식하며 다시 앞을 보았다. 이 일은 변명의 여지 없이 그의 잘못이었다.

시야가 너무 좁아진 탓에, 활용할 수 있는 이를 옆에 두고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일행을 이끄는 이로서는 물론이고, 화산의 장문대리로서도 실격이었다.

하지만 백천의 마음을 정말 복잡하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이번에야 녹림왕이 있어서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같은 상황에 곁에 녹림왕이 없었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정말 답이 있는 문제였을까?

"생각이 많네."

그때 심드렁한 목소리가 백천의 귀를 파고들었다. 백천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이놈은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를 않는다니까.

청명이 말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

"세상일이란 게 언제나 생각하는 만큼 간명하지 않으니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완벽한 해답이라는 건 절대 없거든."

"⋯⋯."

"하지만 이끄는 자는 그런 와중에도 답을 내놔야 하지. 그래서 어려운 거야."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녹림왕이 없었으면 어떻게 해야 했을지를 고민하고 있지?"

"⋯⋯어떻게 알았냐?"

"쯧쯧. 동룡아, 동룡아. 너는 대체 왜 그렇게 너를 과대평가하냐?"

"⋯⋯."

"너만큼 얼굴에 생각이 잘 드러나는 사람도 없는데, 본인은 자기가 뭐 엄청 진중하고 속내를 잘 감추는 사람인 줄 안다니까."

"끄응."

청명이 피식 웃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 무슨 답이 있겠어?"

"⋯⋯."

"답이 없는 문제를 두고 답을 찾으려고 하는 건 멍청한 짓이지."

"그럼⋯⋯"

"중요한 건 없는 답을 찾아내는 게 아냐. 애초에 그런 문제를 만들지 않는 거지."

"응?"

백천이 의아해하며 되물으니 청명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기 위한 화산이고, 그러기 위한 천우맹이지."

"⋯⋯."

"장문대리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걸 다 짊어지고 옳게 결정해야 한다는 건방진 생각은 버려. 사숙이 부족해서가 아냐. 지금까지 그런 걸 해낸 사람은 고금을 통틀어 아무도 없어."

백천이 입을 꾹 다물었다.

"조사께서도, 선조분들께서도 그게 어렵다는 걸 아니까 굳이 문파를 만들고 사람을 모은 거야. 심지어 그걸로도 부족해서 더 많은 문파와 힘을 합치며 의견을 모은 거고. 한 사람이라도 더 힘을 보태면 더 많은 걸 할 수 있으니까."

가만 듣고 있던 백천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도 알고 있었던 일이다. 아니,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녹림왕이 있어서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야. 녹림왕밖에 없어서 그 정도만 해 줄 수 있었던 거지. 유령문이 같이 왔다면 더 빨랐을 거고, 대문파가 몇 정도 더 같이했다면 애초에 사패련 새끼들이 이렇게 설치지도 못했을 거야."

"⋯⋯그러네."

"사숙이 구하려던 답은 지금 사숙이 가는 곳에 있어. 협의를 행한다, 그게 전부가 아니야. 사숙이 믿는 협의를 더 많은 이들이 믿고 실천하게 만들면, 애초에 해답이 없는 문제가 존재하질 않는 세상이 될 거야."

조용히 말하던 청명이 돌연 쯧, 하고 언짢은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 달리다 보면 그 해답을 찾을 날이 올 테니까."

"⋯⋯어린 새끼가 쪼잘쪼잘 바른말 늘어놓기는."

"맞아."

"건방지게 장문대리께!"

"저 새끼 기강 한번 잡아야 해!"

"어쭈?"

뒤에서 장난기 묻은 목소리가 우수수 쏟아졌다. 백천은 작게 미소 지었다. 청명이 건넨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고민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고민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관철하는 것이다. 협의를 행하는 일이 그리 쉬운 것이었다면, 세상에서 왜 협의라는 글자가 점점 사라져 가겠는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고, 스스로 믿는 길이다. 그러니 좀 더 확신을 가지고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지금 그의 뒤를 따라 달리는 이들이, 그리고 멀리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도와줄 테니까.

"⋯⋯쓸데없는 소리로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니, 일단 서두르자!"

"예!"

백천이 먼저 땅을 박차고 앞으로 쏘아졌다. 화산의 제자들과 타 문파의 소문주들 역시 그 뒤를 바짝 뒤따라 달렸다.

먼저 달려 나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청명은 웃어 버렸다.

"진짜 손 많이 가는 놈들이라니까."

타아아앗!

이윽고 그도 빠르게 일행을 따라 달렸다.

향하는 곳은 남쪽이었다.

중원에서 가장 먼 곳, 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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