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3화. 더없이 그러하다. (3)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해남까지 갈 건지가 문젠데......"
일행 중 그나마 상식적이다는 평을 받는 당패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남궁도위를 바라보았다.
참 미묘하지.
이름만 따져 보면 해남행에 동참한 이들은 말 그대로 성 하나를 통째로 뒤집어 놓고도 남을 만한 이들이다.
남궁세가의 소가주, 당가의 소가주, 빙궁의 궁주와 녹림의 녹림왕. 거기에 지금 천하에서 가장 기세가 좋다고 평해지는 문파인 화산의 오검. 심지어는 제 손으로 승복 찢고 파계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소림의 방장을 한 번은 해 먹을거라 여겨졌던 혜연까지 있지 않은가?
그 위명으로 보나 가진 실력으로 보나, 대단하다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왜 말을 할 사람이 없지?'
막상 그중 누군가와 논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갑갑해지고 식은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결국 당패가 부여잡은 이는 그나마 사람 같은 남궁도위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생각인가?"
"아니, 그걸 왜 저한테...... "
물론 남궁도위야 당패의 속도 모르고 황당해했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해남으로 가는 일은 더없이 중요한 일일세. 그런데 출발 당일까지 대체 어떤 식으로 해남까지 갈 것인지 조금도 논의하지 않았다는 게 당최 말이나 되는 일인가?"
"아니, 그러니까 왜 그걸 저한테......"
당패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그의 눈길이 이번 일의 책임자에게로 향했다.
"...... 백천 도장."
"그 부분은 안 그래도 말씀을 조금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백천을 바라보는 당패의 눙에 살짝 생기가 돌았다. 백천에게 나름의 계획과 의도가 있었다는 의미니까.
"그 부분에 있어서 저희를 함구시킨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그...... 어, 그게...... "
백천이 떨떠름한 얼굴로 한쪽을 슬쩍 보았다.
"다시 한번 말해 봐, 이 새끼야! 뭐? 화산 장문인 승계식에 의미가 없어?"
찰싹! 찰싹!
"그 망령된 조동아리가 요 조동아리냐? 요! 조동아리? 요?"
찰싹! 찰싹!
어느새 퉁퉁 부어오른 임소병의 입을 보며 백천은 탄식했다.
"일단 부기가 좀 빠질 때까지는 기다립시다."
"...... "
그 전에 더 때리는 것부터 좀 말려 봐. 이 인간아......
"그...... "
임소병이 입가를 문지르며 말을 꺼내다 말고 북받친 듯 눈가를 훔쳤다.
그 모습을 본 이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슬쩍 돌려 주었다. 물론 뭐 모든 화는 입에서 나온다고, 함부로 입을 놀린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 해도 녹림왕쯤 되는 사람이 저렇게 쥐 잡듯 잡히고 눈물 찔끔 흘리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면 서로가 민망하지 않겠는가.
아니, 다 떠나서 그게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뭘 잘했다고 울어?"
물론 여기에 있는 이들이 다 사람이란 이야기는 아니다......
코를 팽 푼 임소병이 뭔가 말을 하려다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터진 입술이 쓰라린 모양이다.
"그...... 일단 출발 전에 계획에 대해 논의하지 말자고 한 이유는 아무래도 말이 샐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 사람을 너무 못 믿는 것 아닙니까?"
당패의 말에 임소병이 독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게 뭔 속 편한 소립니까? 여기가 사천이라도 되는 줄 아시는 겁니까? 장원에 숙수부터 시작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오가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천우맹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해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계획을 발설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겁니까?"
"그, 그건 아닙니다만...... "
"이렇게 속 편한 소리나 하고 있으니 다 개판이 나는 거 아니냐고! 강호가 얼마나 살벌한 곳인데! 이래서 온실 속에서 자란 것들은!"
당패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지자 백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옹호하고 나섰다.
"사람을 빋는 건 나쁜 게 아니지요."
"아니! 백천...... "
"계속해 봐. 고 조동아리가 남아나는지."
청명이 살짝 으르렁대자 임소병이 다소곳하게 입을 닫았다. 강호가 얼마나 살벌한지는 모르겠지만, 저 인간의 주먹질보다 살벌하지는 않다.
백천이 말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파 쪽으로 정보가 흘러들어 갈 확률이야 높지 않겠지만, 구파 쪽으로는 아무래도 경계가 덜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굳이 그것까지...... "
"아. 이 인간! 진짜 말귀 못 알아먹네!"
이번엔 청명이 당패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지금 대왕 대머리가 우리 정보를 사패련에 넘길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잖아! 우리 장문대리가!"
"서,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설마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설마야! 결국은 같은 정파다 소리 할 때도 할 짓 못할 짓 안 가리던 놈인데! 이제 너희는 정파 아니라는 소리까지 나온 마당에 뭔 짓을 못하려고!"
"아무리 그래도 불자 아닙니까?"
"불자? 부울자아아아? 그 대머리가 불자면 나는 부처다, 이 인간아! 애초에 소림에 불자가 어딨어! 칼 들고 사람 쑤셔 대는 새끼들이 내가 불자입네 어쩌고 할 때부터 싹수가 노랬지!"
"청명아...... 그만해라. 혜연 스님 운다."
시무룩하게 처진 혜연의 어깨를 윤종이 다독여 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파계했잖아."
"안 했다고요!"
"한 거 아닙니까?"
"...... "
어수선해진 분위기 속에서 임소병이 헛기침 하고는 말을 이었다.
"여하튼 그래서 안에서는 따로 말을 나누지 못하게 한 거고, 출발해야 하니 이제는 계획을 공유합시다."
촤락!
임소병이 소매에서 작은 지도를 꺼내 바닥에 펼쳤다.
"......대체 지도가 몇 종류가 있는 겁니까?"
"크기별로 다 준비되어 있지요! 작은 것도 있는데, 하나 나눠 드립니까?"
"...... 괜찮습니다."
저쯤 되면 준비의 영역이라기보다 살짝 취미의 영역에 가깝지 않을까?
"먼저 서로 합의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음?"
"해남으로 향하는 길을 선택하는 데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그 지역에 우리가 기댈 곳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임소병이 차근차근 상황을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아시다시피 이런 일은 최소 인원으로 움직이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최소 인원만으로는 해남을 제대로 설득하는 게 불가능하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열이 넘는 인원이 해남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인원이 많아질수록 들킬 확률도 높아집니다."
"음."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는 우리의 행적을 숨길 수 있는 협조자가 있는 지역으로 움직이는 편이 좋습니다.
이 점을 고려했을 때 우리에게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해로입니다."
"해로라고 하셨습니까?"
"예."
임소병이 지도의 한 쪽을 가리켰다.
"장강을 타고 절강성 쪽으로 가 배를 타고 해남으로 향하는 겁니다. 아무래도 안휘와 절강에는 아직 남궁세가의 수족들이 많으니 행적을 감추는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우리가 배를 타고 해남으로 향했다는 사실 자체를 감출 수 있겠죠."
"확실히...... "
남궁도위 역시 가능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 길의 가장 좋은 점은 우리의 행적을 가장 확실히 감출 수 있고, 무엇보다 해로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지요.
강남 땅 어디에도 사패련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지만, 해로는 별개입니다. 놈들이 생선을 잡아 내가 파는 것도 아니니 바다까지 나올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무리 사패련이라고 해도 해로까지 장악하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배만 구해서 넉넉하게 준비하고 출발할 수 있다면 가장 안전하게 해남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단점은......"
"오래 걸리겠군요."
"쯧. 그렇습니다."
백천의 말에 임소병이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안그래도 먼 길인데 더 돌아가야 한다. 게다가 배는 인력으로 속도를 높이기가 힘들었다.
"안 되겠네."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니까."
"배에 문제라도 생가면 강남의 해안 한 중간에 고립될 수 있다는 것도 문제고."
얼핏 듣기에는 좋은 선택지 같았는데 뜯어보니 문제가 많았다.
"일단 해로는 알겠습니다. 그럼 또다른 길은요?"
"이쪽입니다."
임소병의 손가락이 다시 지도 위에 하나의 선을 그렸다.
"육로를 우회하는 방법이지요. 일단 사천으로 들어간 뒤, 운남으로 향하고, 마지막으로는 임읍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해남으로 향하는 방법입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적 있지요."
"예."
"이쪽도 나쁘지 않은 방법입니다. 문제는...... 사천과 운남으로 향하는 길에 눈이 굉장히 많다는 점입니다."
"으음."
그 말에 댱패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당가가 사천의 제왕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그건 그냥 형식상의 말일뿐이다. 당가의 영향력이 강한 곳은 사천의 성도를 비롯한 북쪽 지역이고, 아미와 청성이 위치한 남쪽은 구파일방의 세가 좀 더 강하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운남 역시 남만야수궁뿐만 아니라 점창파가 위치하고 있다. 행적을 완벽하게 숨기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무사히 넘긴다 해도 남해태양궁이 어찌 나올지 모르는 임읍에서 해남으로 갈 만한 배를 구하기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자칫하면 쓸데없이 분란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예전에도 했던 이야기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나름의 장단점이 있어서 어느 쪽이 옳다고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저 도착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녹림왕."
백천이 임소병을 똑바로 보며 말헀다.
"길이 세 가지라고 하셨지요?"
"예."
"그럼 녹림왕께서 생각하시는 세 번째 방법은 무엇입니까?"
백천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임소병을 보았다. 지금까지 임소병을 겪어 본 바, 아직 말하지 않은 세 번째 길이 그가 가장 현실적이라 여기는 길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 눈빛을 받은 임소병이 역시나 씨익 웃었다.
"예. 대답드리지요. 제가 생각하는 세 번째 길은...... "
임소명의 손 끝이 지도의 한쪽을 꾹 눌렀다. 그들이 지금 위치한 구강이었다.
"여기입니다."
구강을 꾹 눌렀던 손가락이 지도를 찢을 듯 강하게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손가락 끝이 만들어 낸 선을 본 모두가 두 눈을 부릅떴다.
"...... 미쳤습니까?"
"제정신이에요?"
"내 이 양반 언젠가는 본색을 드러낼 줄 알았지! 장일소가 얼마 주더냐, 이 사파 놈아!"
"...... 선 넘지 맙시다."
그 터져 나오는 반응 속에서 임소병이 히죽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설마 이 쟁쟁한 분들이 겁을 먹은 건 아닐테고?"
그 능글능글한 물음에 백천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들 이리 반응할 수 밖에 없다. 아니, 이리 반응하지 않는게 더 이상할 것이다. 왜냐면 임소병이 그려 낸 마지막 선은 구강과 해남을 일직선으로 잇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패련이 지배하고 있는 강남 땅을 직선으로 뚫고 가는 최단거리. 그게 임소병이 내세운 마지막 길이었다.
"해로가 좋겠군."
"아니, 저는 운남 쪽이 현실적이라 봅니다."
"일단 어디든 가죠. 세 번째만 아니면 됩니다!"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낀 이들이 재빨리 합의를 끌어내려는 순간.
"호오오오오?"
그들의 귓가에 소름 돋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꽤......."
"...... "
"...... "
"솔깃한데?"
모두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그들의 얼굴에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이 어둡게 드리웠다.
청명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