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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12화 (1,213/1,567)

1212화. 더없이 그러하다. (2)

임명식은 단출하게 끝이 났다.

어쩌면 이제는 섬서를 대표하는 대문파가 된 화산의 장문인 임명식으로는 어울리지 않게 초라했을지도 모른다.

본디 대문파의 장문인이 바뀌는 것은 지역 전체가 들썩이는 거대한 사건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 임명식에 참여하는 화산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그 모습을 조금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마저도 딱히 그 작은 규모에 아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게 화산이라는 문파에 가장 어울리는 임명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하신검을 받아든 운암이 감회가 새로운 눈으로 그 검을 바라본다. 솔직하게 말해서 운암은 딱히 이 검에 대단한 감상 같은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이 검을 쉬이 다룰 수 없는 이유는, 이 검에 어려 있는 의미 때문이다. 결코 그의 손에 들릴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바로 이 검의 의미 말이다.

길게 심호흡을 한 운암이 천천히 자하신검을 뽑아낸다.

그 새하얀 빛이 어린 검신을 두 눈으로 확인하던 운암이 검이 다 뽑히기 직전에 손을 멈추더니, 느릿하게 검을 다시 검집 안으로 밀어 넣는다.

타악!

순간적으로 충동이 일었다. 그 검을 끝까지 뽑아내어 한 번은 휘둘러 보고 싶다는 충동. 그 검이 상징하는 바를 떠나, 검을 손에 든 검수라면 누구라도 느낄 충동일 것이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검을 뽑지 않은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뽑히지 않았을 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그저 현종에게서 백천에게로 자하신검을 전하는 과정 중간에 운암이 잠시 끼어든 것에 불과하다.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바뀌지 않는 결과로 가는 짧은 ‘과정’이 어쩌면 수많은 것을 바꿔 놓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검이 있다.

어떤 검은 전장에서 누군가를 죽이고, 어떤 검은 또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것이다. 어떤 검은 이익을 위해 휘둘러지고, 어떤 검은 압제를 위해 휘둘러진다.

그 쓰임이 옳건 그르건, 그 검들에게는 하나하나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검으로 만들어졌으되,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베거나 위협하지 않은 검. 그 검집에서 뽑혀 나오지 않은 검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운암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거면 됐다.’

이 이상은 너무도 과분할 뿐이다.

운암이 슬쩍 고개를 돌려 현종을 바라본다. 이제 이 의식을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냐는 듯이. 하지만 현종은 그저 가볍게 웃는 얼굴로 지긋이 운암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운암이 낮게 헛기침을 하고는 스스로도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해남으로 갈 제자들은 앞으로 나오너라!”

“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산의 제자들이 앞으로 달려 나와 백천의 뒤쪽에 부복한다.

그들을 일별한 운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장문대리.”

운암이 고개를 돌려 백천을 부르자 백천이 공손히 예를 표한다.

“예. 장문인.”

그 장문인이라는 호칭에 운암이 살짝 눈을 감았다. 하지만 채 감회를 느끼기도 전에 다시 눈을 뜬 운암이 의지견정한 눈빛으로 입을 연다.

“해남에 화산의 뜻을 전해야 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장문대리다.”

백천이 대답 없이 빛나는 눈으로 운암을 마주한다.

“하나 화산의 장문인이 직접 가지 못한다 한들, 장문대리의 뜻이 곧 화산의 뜻임을 바로 이 검이 증명할 것이다.”

운암이 자하신검을 내밀자 백천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예를 표하며 그 검을 받아들었다.

백천이 그 검을 제 옆구리에 차자 운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장문대리.”

“예!”

“화산의 제자들을 이끌고, 그들에게 화산의 협의가 있음을 증명하고 돌아오라.”

“예!”

운암에게는 보였다.

대답을 하는 백천의 목소리는 더없이 진중했지만, 그 안에 숨길 수 없는 활기가 묻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녀석…….’

사람이란 욕심이 없을 수 없다. 그럼에도 진심으로 자신이 장문의 위에 오른 것을 기뻐해 주는 사질을 보고 있으니 묘한 울컥함이 치밀어 오른다.

백천뿐만이 아니다.

백천의 뒤쪽에서 그를 바라보는 제자들의 두 눈에도 일관된 기쁨이 담겨 있었다.

어찌할 수 없는 감흥에 운암이 입술을 살짝 깨무는 순간, 백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자 백천!”

운암의 눈이 백천에게로 향한다.

“장문인의 명을 받들어, 해남파에 화산의 뜻을 분명히 전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운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백천이 몸을 일으킨다. 그 헌앙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운암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자하신검을 옆에 찬 백천이 정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그 뒤를 오검이 호위하듯 뒤따랐다.

지금껏 여러 번 봐 왔던 모습이다. 그렇지만 지금 운암이 바라보는 모습은 이전과 같되, 또 같지 않았다.

그런 운암의 귓가에 현종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떻더냐?”

“…….”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지?”

그 목소리에 운암이 짧은 한숨을 내쉰다.

“저를 생각해 주셔서 한 결정인 줄 알았습니다만……. 이제 보니 저를 골탕 먹일 생각이셨던 모양입니다.”

“하하.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아닌 게 아니라 마음이 무겁다.

아무리 모두가 내린 결정이라고 한들, 그 결정을 인가하는 것은 장문인 고유의 몫이니까. 장문인이 된다는 것은 그 모든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만약 저 아이들 중 단 하나라도 상처 입어 돌아온다면 운암이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항상 이런 심정으로 아이들을 보내셨던 겁니까?”

“짐작하지 않았더냐?”

“짐작은 했습니다. 하지만 그 짐작과 현실이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습니다.”

운암이 고개를 내젓는다.

그제야 마지막 순간에 현종이 마음을 바꾼 이유를 알 것 같다.

지켜보는 이들도 이리 힘든데, 해남으로 가는 이가 그 책임까지 져야 한다면 백천의 어깨에 올려질 무게가 얼마나 크겠는가?

이건 운암을 위한 결정인 동시에 백천을 위한 현종의 배려이기도 하리라.

“저 아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만입니다.”

“지금은 그걸로 좋단다.”

운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서려고 할 때였다.

“어딜 가느냐?”

“예?”

“장문인도 되었으니 아이들에게 가서 그 기분을 마음껏 만끽하고 싶은 모양인데……. 안타깝지만 네게는 그럴 시간이 없다.”

“…….”

“어차피 백천이는 해남으로 갈 사람이라 넘겨주지 않았던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지금 당장 인계를 시작할 터이니 내 처소로 오거라.”

“……예?”

“아이고. 속이 시원하구나. 백천이 놈이 장문인이 되었으면 태상장문이 되어서도 일을 떠맡고 있을 뻔했는데.”

“…….”

운암이 현종을 바라본다. 현종은 정말로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은 스승의 익살맞은 얼굴에 운암의 얼굴이 절로 아연해지는 순간이었다.

장원의 정문으로 향하던 조걸이 낄낄대며 입을 연다.

“아이고, 장문대리니이이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백천의 이마에 핏대가 돋아 올랐다.

“고오속으로 승진하실 줄 알았는데, 밀려서 어떻게 하십니까? 아이고, 이 사질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장문대리께서 얼마나 속이 상하실지!”

“…….”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사질의 충심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장문대리께서 조금 더 먼 길을 돌아가신다고 한들, 이 사질은 한결같이 장문대리님의 옆을 지켜 몸이 오체분시가 될…….”

“조동아리! 조동아리!”

윤종이 조걸의 멱살을 잡고는 그 입을 찰싹찰싹 때려 댄다. 악악 비명을 지르는 조걸을 몇 대 더 쥐어박아 준 윤종이 피식 웃으며 백천에게 물었다.

“조금 급작스럽긴 합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나도 몰랐다. 정말.”

백천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난다.

“하지만 이게 맞는 방향이겠지. 덕분에 나도 마음이 좀 편해졌구나.”

윤종이 고소를 머금는다.

“성장하기 위해서 책임을 짊어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책임이 덜어졌다고 안심하시니 조금 미묘합니다?”

“그것과는 다르지.”

백천이 고개를 저었다.

“원래대로라면 장문인의 자리는 온당히 사숙께 돌아갔어야 하는 일이다. 나 역시 그리하고 싶었지만, 사숙께서 완강하시니 도리가 없었던 거지.”

“그렇긴 합니다.”

“사숙께서 장문인이 되셨다고는 하지만 내가 짊어진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안도를 느낀 건, 책임이 줄었기 때문이 아니라 본디 아직 내 자리가 아닌 것을 내가 얻었다는 부담감을 덜었기 때문이지.”

백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나도 배분을 건너뛰어 장문인의 자리를 받는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 순간, 백천의 귓가에 백 년 묵은 상 꼰대의 호통이 들려왔다.

“어디! 어? 규범이 살아 있고 법도가 살아 있는 대화산파에서! 도적을 거꾸로 기어오르는 짓을!”

“…….”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 꼴 못 보지! 아암! 당연하지!”

“걸아.”

“예. 사숙!”

“가서 흙 좀 퍼 와라…….”

“……누가 넣을지는 정해졌습니까?”

“다 같이 노력해 보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그럼 우리부터 눈에 흙 들어갑니다.”

“…….”

“이게 똑바로 돌아가는 거지! 이게!”

“어휴.”

오검의 입장에서는 청명이 청명 한 것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이건 청명에게는 나름 중요한 문제였다.

청명이야말로, 스스로 살아온 삶과 업적을 모조리 내다 버리고 화산의 삼대제자라는 직분에 최대한 충실하려 애쓰는 살아 있는 도적의 화신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

그의 입장에서는 배분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 때문에라도 예전 같았으면 무릎에 올려놓고 놀았을 아이들을 깍듯이 모시고 있는데, 눈앞에서 배분이 거꾸로 돌아가는 꼴을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고로 문파란 말이야!”

“가자, 가자!”

“저거 들어 주다 보면 하루 또 간다. 제발 좀 가자! 해남!”

“솜 좀 줘 봐. 귀 좀 막고 가게.”

화산의 제자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청명을 남겨 두고 정문으로 향한다.

정문에는 이미 준비를 마친 이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궁도위와 당패, 설소백. 그리고 입이 댓 발은 튀어나온 임소병까지.

백천이 대표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남궁도위가 그 인사를 받았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요. 정식으로 장문대리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백천 도장.”

“감사합니다.”

“먼저 남궁세가를…….”

“아!”

그 순간 임소병이 버럭 고함을 지른다.

“날 새울 겁니까? 날? 아, 출발 좀 합시다! 왜 출발하는 날에 굳이 장문인을 바꿔서 사람들 다 기다리게 만들고! 별 의미도 없는 일을 굳이 그렇게 거창……. 꿰에에에엑!”

거의 승천하듯 날아오른 청명이 그대로 임소병의 면상을 발바닥으로 걷어찼다. 그러고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지른 임소병을 늑대처럼 덮쳐 들어간다.

“의미가 없어? 이 근본도 없는 사파 새끼가 대화산파 장문인 승계식을 뭘로 보고!”

“아악! 악! 아아아아악!”

“안 그래도 강남 가는데 그 전에 사파 새끼 송장 하나 치우고 가자! 죽어! 죽어 이 사파 새끼야!”

“아아아악! 살려 주십쇼! 아악!”

쥐 잡듯이 임소병을 후드려 패는 청명을 바라보던 모두가 일제히 한숨을 내쉰다.

“출발하실까요?”

“……그러죠.”

아무래도 이 해남행 역시 쉬이 가기는 틀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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