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6화. 이걸 대체 어떻게 버티셨습니까? (1)
“어떠냐?”
“그럴 일은 없을 거 알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괜찮은 거야?”
당소소가 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 청명이 이부자리를 깔고 누워 끙끙 앓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뭔가 살짝 머뭇거리던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울화병이에요.”
“울화병?”
“예, 울화병.”
윤종이 눈을 끔뻑였다.
“그...... 어...... 그러니까......”
앓아누운 청명을 힐끔 본 그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울화병이라는 병이 정말 있는 거였어?"
“있죠. 사람이 큰일을 겪더니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 보셨을 거 아니에요.”
“......들어 봤지.”
“그게 울화병이에요.”
윤종은 다시 고개를 돌려 누워 있는 청명 쪽을 보았다. 끙끙대는 놈 옆에 조심스레 앉은 혜연이 섬세한 손길로 수건을 물에 적셔 이마에 얹어 주고 있었다.
환자를 돌보는 더없이 조심스러운 모습만 봐도 혜연이 얼마나 마음 착한 불자인지 알 것 같았다.
다만 조금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
“스, 스님! 환자 돌보면서 불경 외지 마시라고요!”
“송장 치는 것 같잖습니까!"
“섬세함이 없어! 섬세함이 !"
오검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혜연의 옆으로 다가가 함께 도경을 외려던 조걸이 찔끔하고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그런 조걸을 노려본 윤종이 혀를 차며 당소소를 보았다.
“아니, 그런데 울화병이라니 이게 뭔......”
“특이하긴 하죠.”
당소소가 입을 샐쭉 내밀었다.
“보통 이런 병은 심약한 사람이나 화만 남은 노인들이 잘 걸리는 병인데, 저 양반은.......”
“아니지.”
“많이 아니네. 쟤가 걸리면 안 되는 병이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심약이라는 말과 제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청명입니다, 사형."
“그렇죠?”
윤종이 연신 혀를 차며 끙끙 앓는 청명을 바라본다.
“울화병에 걸린 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무인이라는 놈이 병 좀 걸렸다고 저렇게 앓아누울 것까지는......”
“아, 아니, 사형. 그렇게 말할 일이 아닙니다.”
“응? 왜?”
조걸이 살짝 질린 얼굴로 말했다.
“생각해 보면 이건 진짜 심각한 일 아닙니까? 저 새끼 저거 북해에서 피떡 됐을 때도 신음 소리 한 번 안 내던 놈이잖습니까.”
“그런 놈이 저렇게 머리 싸매고 누운 거면 정말 아픈 거라고요.”
“...... 일리가 있네.”
그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앓아누운 청명이 놈이 좀 안쓰러워 보이기도...... 아니, 사실 안쓰럽지는 않은데...... 여하튼!
“얼마나 울화가 터졌으면.......”
“그러게요.......”
그리고 그 말이 나온 순간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한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방 한쪽에 기대앉은 백천이 세상 모든 걸 다 잃은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꺾고 있었다. 얼핏 보면 색이 좀 바랜 것도 같은 모습으로......
시선이 몰리는 걸 느낀 백천이 쩌적쩌적 갈라진 입을 천천히 열었다.
“내가.......”
그의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 사이로 다 죽어 가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장문대리 자리에 오른 게......”
“......저렇게 앓아눕기까지 할 일이냐?"
"......"
“응?”
글쎄요, 사숙.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저놈에게는 ...... 장일소가 엿을 먹인 거나...... 마교가 다시 발호한 거나...... 종남이 날뛰고 소림이 앞에서 깨춤을 추는 것보다, 내가 장문대리에 오른 게 더 울화가 터지는 일이라는 거지?”
"...... 그게 그렇게 됩니까?"
“내가 뒈져야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백천이 바스락바스락 말라 가기 시작했다. 넋을 놓은 백천과 앓아누운 청명을 번갈아 바라보던 윤종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승자 없는 싸움이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
“내가 살다 살다 무인이 울화병에 걸리는 걸 다 보네. 저 새끼도 참 신기한 새끼야.”
"글쎄요. 그건 틀린 말입니다.”
“아이 씨! 깜짝이야!”
“마, 말을 하고 나타나십시오, 스님!"
어느새 청명을 내팽개치고 다가온 혜연이 반질거리는 민머리를 쓱 들이민 것이다. 모두가 깜짝 놀라자 그가 살짝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아미타불, 죄송합니다. 재미있는 말씀 중이시길래.”
“그런데 틀린 말이라니요?"
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무인이 울화병에 걸린 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사실 말이 달라서 그렇지, 무인은 세상에서 울화병에 가장 잘 걸리는 이들이지요.”
“예? 살면서 무인이 울화병 걸려 죽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말을 조금만 바꾸면 자주 들어 본 이야기지요. 강호에서 화가 쌓여 몸이 이상해지는 현상을 지칭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 호, 혹시 심마?"
“그렇습니다.”
혜연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주화입마도 넓은 의미로 보면 같은 현상이라 할 수 있지요. 심적인 타격으로 주화입마에 드는 현상도 드물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러네요?”
“그러니 따지고 보면 강호인만큼 울화병에 자주 걸리는 이들도 없을 것입니다. 속세를 살아가는 이들이 강호인들이 주화입마나 심마를 경계하는 것처럼 울화병을 경계하며 살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
“따지고 보면 강호인들이 제일 약한 거 아닙니까?"
“울화병이 제일 심할 부류들이긴 하지.”
애초에 강호인들이란 정사를 가리지 않고, 수틀리면 칼부터 꺼내고 보는 족속이 아니던가? 평범한 이들이 말로 해결을 하거나, 관아를 찾아 송사를 청할 일조차 일단은 들이받아 버리는 게 강호인이다.
그러니 화병 나기 딱 좋은 부류일 수밖에.
특히나 저놈은 그 강호인 중에서도 성질 급하고 더러운 걸로는 첫손에 꼽히는 인간이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주화입마에 안 걸리고 멀쩡히 살아 있는 게 더 신기......
“자, 잠시만요. 그럼 청명이가 지금 심마에 들었다는 말?"
“사숙이 장문인이 됐다고 심마에 들어?"
“사람 새낀가?”
백천의 빛깔이 조금 더 바래지는 순간, 당소소가 딱 잘라 말했다.
“아뇨. 저건 그냥 울화병이에요."
"......"
“주화입마도 심마도 아니고, 그냥 순수한 울화병이에요. 입마나 심마였으면 제가 알죠.”
“하긴.”
“그렇네요. 소소가 모를 리가 없죠.”
“무공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 아니, 웬만한 사람이면 주화입마에 들었을지도 모르는데 사형은 워낙에 내력이 정순하고 무학이 고강해서 영향을 안 받은 건지도 모르겠네요. 여하튼 결과적으로는 그냥 제 성질을 못 이겨서 자리 깔고 누운 거예요.”
“...... 다행인 건가?”
“다행이겠습니까?”
윤종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싸매고 누운 청명이를 바라보았다.
“일신일신우일신(日新日新又日新)이라는 말이 생각나는구나.”
“그건 좋은 말 아닙니까?"
“좋은 말이지. 저놈 성질이 더러운 건 과할 정도로 알고 있는데, 나날이 보면 볼수록 더 새롭게 더러워지니 어찌 좋지 않은 일이겠느냐.”
“그냥 대놓고 욕을 하시죠."
“저 미친놈.”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유이설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더니 옆에 늘어져 있는 백천을 발견하고는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사형.”
“사형.”
"으, 으응?”
멀어져 가던 정신의 끄트머리를 가까스로 잡은 백천이 고개를 들어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문주님들. 다 모이셨어. 가야죠.”
“문주...... 회의, 가야지. 그래. 가야지......”
빛이 바래 버린 백천이 연체동물처럼 흐느적대며 몸을 일으켰다.
“가야지. 내가 장문대린데...... 나이도 어린 놈이 늦게 가면 안 되지. 걱정하지 마라. 지금 갈 테니까.”
당소소는 덜컥대면서도 발을 옮기는 백천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걸 사형.”
“응?”
“다음 장문인은 그냥 사형이 하십시오.”
“......갑자기 뭔 개소리냐.”
“좋은 자리는 사형이 하셔야죠."
뭔가 알 수 없는 찝찝함을 느낀 조걸이 무어라 말하려 할 때였다.
“어, 어딜? 어딜 간다고?"
드러누워 시름시름 앓고만 있던 청명이 갑자기 상체를 벌떡 일으키더니 눈을 희번덕거렸다.
“문주? 회의?”
“......쟤 또 왜 저러냐.”
“소소야, 수면 약 같은 건 없냐? 하나 먹으면 한 달쯤 자는 걸로.”
“수면 독은 있는데......”
“줘 봐라. 내가 좀 쓸 데가 있어서 그래.”
“......잘못 쓰면 죽어요.”
“그게 나을지도 모르잖아. 잘 생각해 봐.”
청명이 제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거의 걷어차 날려 버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가 현기증이 나는지 휘청댔다.
“저, 저......”
“왜 그러는데, 인마!”
모두가 만류하며 묻자 청명이 눈을 까뒤집었다.
“나, 나도 간다!”
“아니, 몸도 안 좋은 놈이.........”
“아, 안 돼! 저...... 저 인간이 무슨 짓을 저지를 줄 알고! 내가 어떻게 되살린 화산인데! 저 인간이 말아먹게 둘 수는 없어!”
“청명아...... 사숙이시다.”
“그래. 저 사숙 놈이 말아먹게 둘 수는 없어."
아무리 봐도 지금 화산은 네가 말아먹고 있단다, 청명아. 그리고 아무래도 이대로 가다가는 좀 더 대차게 말아 먹을 것 같구나.
“내, 내가 가야.......”
발을 옮기려던 청명이 제 뒷머리를 잡고 휘청거렸다.
“끄윽. 뒷골이.......”
“저, 저, 쓰러진다 저거."
“누가 부축이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야 한다는 건 알고 있는데, 솔직히 닿고 싶지 않다.”
“저도요.”
주변 사람들이 학을 뗐지만, 지금 청명의 눈에 그런 게 들어올 리 없었다.
“화, 화산은 내가 지킨다...... 화산은......”
강시처럼 걸어 나가는 백천과 병자처럼 따라가는 청명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오검의 입에서 일제히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문파 꼴....... 아주 잘 돌아간다.
***
“우선......"
당군악이 살짝 헛기침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 자리에 현종이 있었다면 그가 이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현종은 백천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인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니 천우맹의 실질적인 부맹주 역할을 하고 있는 그가 상황을 한차례 정리하고 말문을 틀 필요가 있었다.
“다들 아시는 일이라 다시 말하기에 새삼스럽지만, 백천 도장께서 화산의 장문대리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예, 가주님.”
“그 자리에서는 워낙 경황이 없어 어물쩍 넘어갔지만, 원래는 다들 축하를 해 주어야 할 일이지요.”
자리에 모인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새로운 젊은 피가 천우맹의 중진으로 합류했으니, 장문대리께서 만들어 가실 화산과 천우맹의 미래를 위해 축하부터 건네는 게 맞는데......"맞기는 한데.......”
당군악이 뭔가 맥 빠진 얼굴로 앞에 앉은 백천과 청명을 보았다.
“......장문대리.”
“예?”
"......대체 몰골이 왜 그런가?"
"......"
“그 잠깐 사이에 마교라도 만나고 왔는가?”
백천이 반쯤 바랜 얼굴로 쓸쓸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백천은 병든 닭처럼 골골거리는데, 청명은 상태가 더 심각했다. 거의 정신이 나가 버린 사람처럼 우울해하다 화를 내다가 야단이었다. 숨 한 번 쉴 때마다 오락가락하는 듯했다.
'맹주님......’
당군악은 어쩐지 아뜩한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걸 대체 어떻게 버티셨습니까?'
화산을 감당하는 이들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지독한 위통이 당군악에게도 강림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