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5화. 왜 그렇게 되는 건데? (5)
“일단......”
숨을 몰아쉬던 백천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장문대리 자리에 오른 것은 맞지만, 너희의 사숙이고 또한 사형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그래,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평소와 다름없이 대해 주면 된다. 알겠느냐?”
“이해는 했습니다. 다만......”
“또 뭐?”
“그걸 이해시키는 과정에서...... 사람을 너무 피떡으로 만들어 놓으신 것 아닌가요?”
모두의 시선이 박살이나 엎어져 있는 조걸에게로 쏟아졌다.
“........ 어지간히 깐죽거려야지.”
“그건 맞지.”
“솔직히 과하게 나댔지.”
“맞아도 싸.”
물론 이곳에 있는 모두가 같은 짓을 했지만,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과거 행적 같은 건 까맣게 사라진 뒤였다.
조걸 입장에서야 억울할 만하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억울함을 토로할 주둥이는 이미 퉁퉁 부어 있는데.
“여하튼.....”
여기에서 기세로 밀리면 평생 놀림감으로 살아야 한다는 걸 직감한 듯, 백천은 눈에 한껏 힘을 주며 말했다.
“나는 아직 정식으로 장문인 자리에 오른 것도 아니고, 이대제자라는 신분이 바뀐 것도 아니니, 꼭! 평소처럼! 그냥 지금까지처럼 대해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예, 장문대리.”
“......그냥 사숙이라고 하라고."
“에이. 그래도 어떻게 그럽니까? 문파에 법도가 있는데.”
“그 문파의 법도로 처맞고 싶지 않으면 사숙이라고 하라고.”
“이야아, 권력자.”
“아이고오. 권력으로 찍어 누르시니 쇤네가 따라야지요.”
“네, 장문대리.”
백천의 고개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뭔가 서글퍼 보이는 그의 어깨에 윤종이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사숙.”
“.......으응?”
“책임을 떠안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버티십시오.”
“........ 이런 책임은 아니었어.”
“사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윤종이 조용히 백천을 위로했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 승냥이 떼에게 충분히 물어뜯기고 나면 그다음에는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의 들개 떼가 그를 물어뜯으러 올 것이다.
"이 문파는 망해야 돼.”
어쩌다 청정해야 할 도관에 승냥이와 들개만 우글거리게 되었단 말인가? 화산의 선조들께서 보시면 통탄해 눈물로 강을 이룰 일이었다.
이제 문제는, 백천이 바로 그 승냥이 떼의 우두머리라는 점이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러 버렸는지를 새삼 실감한 백천이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쳤다.
“끄으...어....... 자, 장문........”
저 봐라, 저.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도록 처맞아 놓고도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더해서 그의 속을 뒤집으려고 고개를 쳐드는 저 인간을 보라고!
조용히 발을 뻗어 조걸의 머리를 지그시 지르밟은 백천이 다시 헛기침하며 분위기 환기를 시도했다.
“크흠. 얘들아.”
“들었어? 얘들아래!”
“우와! 장문대리가 되시더니 말투부터 달라지시네요! 이것이 권력인가?"
“......소소야, 제발.”
“네네, 장문대리! 말씀....... 아니, 하명하세요!"
당소소가 생글생글 웃으며 백천의 말을 받았다. 저렇게 웃으면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각설하고.”
백천이 짧게 헛기침하고는 한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너희도 알다시피, 나는 많이 부족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준비를 하고 있던 오검이 그 말에 슬그머니 입을 닫았다.
“스스로 장문인께 장문대리 자리를 요청하기는 했지만, 내가 장문인처럼 화산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어서 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그래야 했기 때문에 한 일이다.”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희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직 너희에게 확신이 없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너희도 예전과 같기는 어렵겠지.”
“예, 사숙.”
“무슨 말인지 알아요.”
이건 세대가 바뀌는 일이다.
달라진 것은 딱히 없다. 현종은 여전히 화산의 장문인이고, 그들은 여전히 화산의 이대제자이고, 삼대제자일 뿐이다.
하지만 백천이 장문대리에 오른 이상, 언젠가 그들은 장로가 되어야 하고, 일대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 시기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이르게 당겨진 것이다.
“갑작스레 너희에게도 책임을 떠넘기게 되어 미안하다.”
“아닙니다, 사숙.”
윤종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숙이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는지는 충분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숙께서 그만한 짐을 지겠다 다짐하셨다면, 저희도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짐을 져야죠."
“그래.”
백천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확실히 이럴 때 그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건 윤종이다.
화산이 화산이기 위해서는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아직 화산을 이끌기에는 모자란 사람이다. 그러니...........”
백천이 오검을 향해 고개 숙였다.
“너희가 나를 많이 도와주거라. 부탁한다.”
그 인사를 받은 오검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숙.”
“그럴게요.”
“걱정 마세요, 사숙! 최선을 다할게요!”
신나게 놀려 먹기도 했고, 아직 덜 놀리기도 했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백천이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백천이 나서 준 덕분에 원치도 않는 상황에 강제로 끌려가는 것을 피해 냈단 사실도 잘 알았다. 그러니 백천을 보는 눈에 고마움이 어리지 않을 리 없었다.
그 반응에 백천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반발을 사지 않을까 내심 우려했다. 그런데 그의 사매와 사질들은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장문대리의 자리에 올랐는지를 이해해 주고 있다.
“저, 저도 돕겠........습니다. 사숙......”
심지어 엎어져 있던 조걸마저 힘을 짜내 말했다.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진 백천이 살짝 눈가를 눌렀다. 그리고 애써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래,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하......"
“그러든지 말든지.”
불쑥 날아든 삐딱한 목소리에 백천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한쪽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은 청명이 얼굴로 '아이고, 아주 잘나기도 하셨네.' 하고 말하는 듯했다.
“보기 좋네.”
“이제 장문인 되실 분이랑, 그다음에 장문인 되실 분이 '아이고! 장문인이 얼마나 힘든 자린데! 고생이 많으십니다!' 하고 서로 치켜세워 주는 꼴을 보고 있으니 평생 가도 장문인 될 일 없는 사람 배알 꼴리고 좋다. 그치?"
백천은 슬쩍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너희가 좀 말려 보라는 듯이. 하지만 열정으로 가득 차 백천을 위해 뭐든 할 것 같았던 오검도 이 순간만큼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해 버렸다.
‘비는 맞서 싸울 게 아니라 피해야지.'
'저건 지금 잘못 건드리면 진짜 못 볼 꼴 본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도 읊는다는데, 청명이 놈 옆에서 몇 년을 지내고도 분위기 파악 하나 못 하겠는가?
지금 저건 거의 불붙은 기름통이나 마찬가지다. 건드리면 바로 터지는 기름통에 가까이 가고 싶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입장이고 백천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개새끼들.'
조금 전에는 최선을 다해 돕겠다더니.
저것들은 앞에 마교 놈들이 나타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 것들이다. 아니, 오히려 백천을 걷어차 미끼로 던져 줄 놈들이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긴 백천은 슬쩍 청명의 눈치를 살피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크흠. 큼! 저....... 청명아........”
“아?”
청명의 얼굴이 순간 환하게 밝아졌다.
“아이고오. 화산의 장문대리께서 이 미천한 삼대제자 놈에게 직접 말까지 걸어 주시고오.”
"......"
“이거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에?"
백천의 얼굴이 슬슬 창백하게 질려 갔다.
'내 저 인간 저럴 줄 알았다.'
장문대리 자리를 청하리라 다짐했을 때, 그를 가장 부담스럽게 했던 것은 장문인으로서 그가 감내해야 할 무게가 아니라, 저 망할 놈의 반응이었다.
봐라! 저 새끼 저거 눈 뒤집힌 것 좀 보라고!
“문파가 거꾸로 돌아가도 유분수지. 어디 항렬이고 배분이고 다 건너뛰고 새파란 놈이 장문인 자리를 차지해!"
“어? 자고로 문파에는 규범과! 어? 법도가! 어?"
“청명아.”
“상황이 어쩌니, 이번만이니 해 가면서 원칙이고 뭐고 다 무시하면 잘나가던 문파도 순식간에 삼류 문파 되는 거야! 어어어디 역사와 전통의 화산에서 이런.......”
“청명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청명아!”
“응?”
정신없이 떠들어 대던 청명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백천이 턱을 치켜들었다. 그 날카로운 턱선을 과시하듯 고개를 쳐든 백천이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어투로 툭 내뱉었다.
“꼬우면 네가 장문인 하시든가."
순간 청명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어......? 어어......”
“아니면 장문인께 가서 따지시든가."
"......"
“못 하지? 아무것도 못 하겠지?"
"......"
“그럼 쉿. 조용히 입 닫고 있어라, 삼대제자야."
백천이 씨익 웃어 주는 순간 청명의 몸이 기우뚱 옆으로 넘어갔다.
털썩.
두 눈은 썩은 동태처럼 빛을 잃었고, 힘없이 벌어진 입에서는 마지막 남은 영혼의 찌꺼기마저 빠져나갔다.
“내가....... 내가 왜......”
단 한 방에 격침되어 버린 청명을 본 오검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백천을 돌아보았다.
“세상에....... 청명이를 말 몇 마디로......”
“이게 권력의 힘?”
“저 새끼 은근히 권력에 약하다니까.”
“은근히는 무.슨 대놓고 약하죠.”
윤종이 백천에게 속삭였다.
“좀 심하게 패신 거 아닙니까?”
“.......저 새끼는 이 정도는 해 줘야 돼. 안 그러면 앞으로 일 년은 더 저러고 있었을 거다.”
“하긴......”
윤종이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이 손을 내젓고는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래저래 할 말은 많지만, 우선 해야 할 것부터 하자.”
“예? 해야 할 거라뇨? 지금 뭐 급한 게 있습니까?"
“윤종, 조걸.”
“예, 사숙!”
“각 문파의 문주님들께 내 말을 전하고 와라.”
백천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사람이 말을 내뱉었으면 지켜야지. 해남을 구하러 갈 거다.”
"아!”
그제야 그 문제를 떠올린 조걸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탄성을 흘렸다. 워낙 충격적인 일이 연달아 일어나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할 일을 다 끝내 놓고 갈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빠르게 상황을 논의해 보자고 전해라.”
“알겠습.......”
“뭐? 해남?”
그 순간 다 죽어 가던 청명이 눈을 까뒤집으며 벌떡 일어났다.
“야, 이 미친 인간아! 대체 화산을 뭘 어떻게 하려고!"
“아, 그러니까 억울하면 일찍 입문해서 백자 배 하셨어야지. 아이고, 이걸 어떻게 하나? 내가 장문인 자리를 주고 싶어도 청자 배에게 줄 도리가 없네? 문파에 지켜야 할 법도가 있는 거라고 누가 그러셔서.” |
“저, 저......! 저...... 어억!"
청명이 끝내 뒷목을 잡고 뒤로 넘어가자 오검이 묘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나쁘지 않은데?'
'오히려 좋아?’
장문인이 바뀐 효용을 벌써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