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8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3)
조걸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엿듣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저 문안을 드리려다 우연히 흘러나오는 말을 들었을 뿐.
하지만 지금 그가 저 안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어떤 의도로 들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 내용이 그딴 것보다 백 배는 더 중요하니까.
가슴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른다.
앞뒤 따지지 않고 안으로 달려 들어가려는 그의 어깨를 누군가 꽉 움켜잡았다.
조걸이 격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뒤로 획 돌렸다. 하지만 화가 있는 대로 올라 당장이라도 소리를 내지를 것 같았던 조걸은 어깨를 잡은 이를 확인하자마자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백천.
그가 더없이 단호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젓고 있었다.
소리를 죽이라는 신호를 보낸 백천이 조걸을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손에 실린 힘에서 저항 같은 건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조걸은 그대로 힘없이 끌려가 장문인의 처소에서 한참 멀어졌다.그제야 조걸을 놓아 준 백천이 엄한 눈으로 조걸을 보았다.
“장문인께서 어떤 선택을 하시건, 군말 없이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하지만…… 하지만, 사숙.”
“너보다 저분들이 열 배는 더 고민했을 테고, 백 배는 더 속이 쓰리실 것이다. 네가 소리치고 울며 매달린다 해서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조걸의 어깨가 축 처졌다.
‘……빌어먹을.’
왜 모르겠는가? 그도 백천의 뜻을 알고 있기에 이곳에 오는 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럼에도 요동치는 감정을 어찌할 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그는 천우맹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걸이 아닌 다른 이들의 심정도 그리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차마 대놓고 동조하지는 못하지만, 주변에 늘어선 오검 역시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하아…….”
윤종의 입에서 참지 못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느 정도 생각한 일이지만…… 막상 눈앞에 닥쳐오니 기분이 좀 이상합니다.”
“그래?”
백천이 윤종을 빤히 보았다.
“선택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어느 정도는 선택을 내려놓았던 모양이구나.”
“…….”
“그래. 우유부단한 것보다는 그게 낫겠지.”
백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어가려 하자 조걸이 더는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사숙. 그래도 이건 아니잖습니까?”
백천이 말없이 조걸을 돌아보았다.
“답이 없는 문제란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이야기를 한번 들어볼 수는 있는…….”
“건방져.”
그 말을 끊은 것은 유이설이었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냉기가 흐르는 눈으로 조걸을 노려보았다. 조걸이 움찔했다.
“사고…….”
“장문인께서 선택하신 일.”
그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매의 말이 맞다.”
“사숙…….”
그리고 백천 역시 평소보다 배는 더 엄정했다.
“너는 화산의 제자가 아니더냐?”
“…….”
“화산의 방향을 결정하시는 분은 다름 아닌 장문인이시다. 제자들의 의견을 구하는 것 역시 장문인께서 선택하실 일이지, 그분이 반드시 행해야 할 의무는 아니다.”
“하지만…….”
“네가 화산의 제자라면, 네 뜻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장문인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한다. 그 당연한 것마저 내가 다시 설명해 주어야 하느냐?”
조걸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천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화산은 이제껏 제자들에게 타 문파에서는 감히 바랄 수도 없는 권한을 내주었다. 그건 장문인께서 더없이 훌륭하시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그에 감사할 줄 알아야지,네가 지금껏 누려 오던 것들이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윤종이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걸이를 너무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사숙. 제 딴에는 속이 상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까.”
“속이 상한다고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건 아니다.”
“그럼 차라리 평소에도 입을 다물라고 하시지 그러십니까?”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백천이 감정을 짐작할 수 없는 눈으로 윤종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윤종은 그 시선을 받으면서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짧게 부딪쳤다.
“장문인께서 하신 선택에 걸이가 왈가왈부하는 게 못마땅하신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화산은 애초에 그걸 허락하는 곳이 아니었습니까?”
“허락?”
백천 대신 입을 연 유이설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방종.”
“…….”
백자 배의 두 사람과 청자 배의 두 사람이 서로 대치하듯 마주 섰다. 주변 공기가 가라앉는다 싶은 순간, 당소소가 힘없이 뇌까렸다.
“……들을 수가 없으셨던 것 아닐까요?”
네 사람이 모두 당소소를 돌아보았다.
“들어 버리면…… 같이 결정해 버리면 그 책임도 모두 같이 져야 하는 거잖아요.”
“…….”
“들어 버리면요…….”
윤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이윽고 눈을 뜨며 백천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숙. 제가 생각 없이…….”
“아니다. 괘념치 말아라.”
백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일을 마무리했지만, 윤종과 조걸을 바라보는 유이설의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다. 워낙 현종에 대한 애정이 깊은 유이설이니만큼 장문인이 정한 일을 걸고넘어진 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백천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들어라.”
“……예.”
“저분들이 우리가 밖에서 듣고 있었단 사실을 모르셨을 리가 없다.”
“…….”
“그런데도 말을 그치지 않으셨던 것은, 우리는 먼저 듣고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겠지. 그 배려를 감사히 여겨야 한다.”
“……예.”
백천이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세상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완벽한 선택 같은 건 없다. 결국은 더 나은 방향이라고 믿는 쪽을 밀고 나갈 수밖에. 선택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이가 책임을 짊어진 이들의 선택을 옳다 그르다 평해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소로 돌아가 있거라. 곧 장문인께서 부르실 테니까.”
백천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냉정한 기운이 묻어났다.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모습을 조금 껄끄러운 듯 지켜보던 유이설과 당소소, 혜연도 자리를 떴다.
“……죄송합니다, 사형. 괜히 저 때문에.”
윤종과 둘만 남게 되자 조걸이 한숨을 내쉬며 사과를 건넸다. 하지만 윤종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됐다.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다. 누구든, 어떤 상황에서든,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있었기에 화산이었던 것 아니더냐?”
“……그래도.”
“됐다.”
윤종이 조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너는 그대로면 된다.”
“……사형.”
그는 조걸을 향해 가만히 웃어 주고는 저 멀리 걸어가는 백천의 등을 응시했다.
이해는 한다. 그래. 이해는 한다.이 중 가장 윗사람인 입장에서 장문인의 선택을 믿고, 혹시 나올지 모르는 불만을 해결하는 것이 백천의 역할이었겠지. 그렇지만…….‘적어도 그렇게 말씀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숙.’
작아지는 백천의 등을 빤히 바라보던 윤종이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가자.”
“예.”
두 사람이 말없이 제 처소를 향해 힘없이 걸어갔다.
* * *
이른 아침이 지날 무렵, 천우맹이 거하는 장원 쪽으로 두 사람이 느릿하게 걸어왔다.
소림을 상징하는 황포 차림의 법정과, 그런 그를 호위하듯 뒤따르는 종리형.
더없이 편안해 보이는 법정을 힐끗 바라본 종리형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방장.”
“……그렇습니까?”
법정이 드물게도 살짝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민망합니다. 오랫동안 고심하던 일이 마침내 해결된다고 생각하니 얼굴에 내심이 드러난 모양입니다.”
“하하.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웃으며 답한 종리형이 슬쩍 고소를 머금었다.
웬만해서는 표정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이가 법정이다. 거인이 괜히 거인이겠는가? 하지만 그런 법정이 감정도 제대로 숨기지 못할 만큼 천우맹은 민감한 문제였던 것이다.
종리형이 물었다.
“좋은 대답을 들을 수 있겠지요?”
“그럴 것입니다.”
돌아온 대답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못내 하나가 걸리는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방장. 저야 방장께서 하신 말씀을 믿지만…… 그래도 우려가 되긴 합니다. 방장의 말씀대로라면 그 화산검협은 도무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이인데…….”
“그럴 일은 없습니다.”
법정이 고개를 내젓는다.
“무엇을 걱정하시는지는 압니다. 분명 천우맹은 괴이한 구조로 이루어진 곳이지요. 화산의 장문, 당가의 가주, 그리고 녹림의 수장과 남궁의 후계, 새외의 궁주들까지 모여 있는 곳인데 정작 그 천우맹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새파란 어린아이이니 말입니다.”
종리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저 화산검협이 그간 해 온 일을 생각한다면 무턱대고 잘못되었다고 폄훼할 수도 없었다.
“화산검협은 변덕스러운 자입니다. 적어도 외부에서 보기에는 그렇겠지요. 그러니 그가 마음을 순간적으로 돌려 버릴까 봐 걱정하시는 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워낙 보고 들은 것이 많다보니…….”
“하지만 이번만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예?”
종리형이 되묻자 법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화산의 장문인이 다름 아닌 현종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장문이라면 이런 일이라면 발을 빼려 할 것입니다.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쉬이 감당할 수 없으니까요.”
“예, 그렇습니다.”
종리형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이건 일개 장문인의 의지로 이끌기에는 너무도 파급이 큰 일이다.
“하지만 현종이란 사람은 이럴 때는 절대 물러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선택을 미루는 순간, 그 모든 선택에 대한 책임이 화산검협에게 몰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
“아미타불.”
법정이 나직하게 불호를 외었다.
“그러니 현종은 절대 이번 선택에 대한 권한을 화산검협에게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화산검협이 생각을 바꾸려 든다고 해도, 이번만은 화산 장문인의 권한으로 그를 찍어누를 것입니다. 그럼 훗날 혹여 문제가 생기더라도 자신이 오욕을 짊어지고 물러나는 것으로 화산과 화산검협을 보호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이지요. 그렇기에 존경스러운 이입니다.”
나직이 말한 법정이 작게 한숨 쉬었다.
“이번만은 그런 현종의 성향이 모든 일을 순리대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행스러운 건, 장문인께서 다시없을 도인이자 군자라는 것, 그리고 천하의 화산검협이 괴이하게도 제 장문의 명만은 어떻게든 지키려 한다는 점이겠지요.”
“참으로 절묘합니다.”
종리형이 고개를 연신 끄덕여 댔다.
법정은 운이 좋았다고 말하며 상대를 띄워 주고 있지만, 정말 대단한 것은 그런 상대의 성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절대 발을 뺄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끌어 간 법정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제 그만 저들을 경원하는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이제는 한 식구가 되어 함께 적들을 상대해야 할 이들입니다. 종리 장문인께서 먼저 모범이 되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아미타불.”
법정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잠시 장원을 바라보다 담담히 발을 옮겼다.
“가 보십시다. 시간을 너무 끄는 것도 못 할 짓일 테니.”
“예, 방장.”
두 사람이 장원을 향해 걸었다.
장원이 가까워질수록 법정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제야 모든 것이 바로 서겠구나.’
참 먼 길을 돌아왔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빨리 온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일지도 모른다.
천우맹 소속 문파들은 과거보다 더욱 강해졌고, 소림과 구파일방은 그런 저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제 마지막 한 땀만이 남았구나.’
천려일실은 있어서는 안 된다. 머릿속에서 마지막 한 걸음을 점검하는 차에 마침내 장원의 문이 열렸다.
낯을 굳힌 일련의 무리가 나와 법정과 종리형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