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7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2)
방 안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다.
화산의 장문인 현종과 화산의 장로들.
그리고 천우맹의 실질적인 부맹주를 맡고 있는 당군악.
네 사람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채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을 받은 이, 청명만은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
“정말…….”
현종이 말문이 막히는지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 묻는다.
“정말 괜찮겠느냐?”
“네. 뭐.”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애초에 답은 정해져 있었던 거잖아요?”
“그렇다 해도…….”
“장문인께서는 생각이 다르세요?”
현종이 한숨을 푹하고 내쉰다.
“……내 생각도 그리 다르지는 않구나.”
“네. 제 생각과 장문인의 생각이 같으면 더 고민할 것도 없는 거죠.”
청명의 시선이 당군악에게로 향했다.
“가주님께는 좀 죄송하네요.”
“자네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지.”
당군악이 고개를 내젓는다.
“당가는 손해를 본 게 없네. 당가의 위상은 오대세가에 있었던 때보다 천우맹의 이인자 취급을 받는 지금이 배는 더 높아졌으니까.”
당군악이 온정이 담긴 눈으로 청명을 바라봤다.
“그리고 위상만이 아닐세. 사천에서 오직 제 가문의 이득만을 생각하던 사천당가가, 자네와 화산 덕분에 무엇이 정파로서 옳게 서는 것인지를 배우게 되었네.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지.”
“크흠. 좀 쑥스럽네요.”
“아니, 자네는 충분히 자랑…….”
“사실 딱 까놓고 말해서 사천당가가 그런 면이 좀 있기는 했죠. 이기적이고 독랄하고. 어휴, 생각만 해도.”
“…….”
당군악의 눈썹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킨다.
“……여하튼.”
“네.”
그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른 문파의 문주들도 화산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했으니 반발은 없을 걸세. 하지만 내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
“자네는 정말 그걸로 괜찮은가?”
“…….”
당군악이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더 옳은 길이라 할지라도, 자네가 지금껏 이뤘던 모든 것들을 내어놓는 결정이라는 건 다르지 않네. 화산이 다시 구파일방이라는 위명을 얻어도, 설사 저 소림과 동등한 지위를 손에 넣게 된다고 해도 말일세.”
청명이 입을 닫는다.
“자네가 일구려 했던 것은 단순히 위상만은 아니잖은가?”
“뭐, 그렇긴 한데……. 괜찮아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뚱한 얼굴로 앉아 있던 현영이 ‘괜찮긴 뭐가 괜찮아. 빌어먹을.’하고 중얼대다가 험악한 현상의 표정을 보고는 입술을 깨문다.
“저도 알아요. 동등한 지위니, 구파일방이니. 그게 뭐 별 의미가 없는 말이라는 걸요. 사실 이건 현금 주고 어음 받는 거죠. 어음에 액수가 얼마나 크게 쓰여 있건 하루아침에 종이 쪼가리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잘 알고 있군. 그런데 왜?”
“애초에 천우맹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었잖아요.”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화산이 대단한 곳이 되고 싶어서 천우맹을 만들었던 게 아니죠. 한 사람이라도 더 지키고 싶어서 천우맹이란 이름 아래에 뭉친 거잖아요. 그런데 그 수단에 집착해서 더 안전한 길을 포기한다는 건 주객이 전도된 거죠.”
“법정을 믿는가?”
“당연히 안 믿죠.”
청명이 딱 잘라 말했다.
“제가 믿는 건 저와 화산. 그리고 천우맹에 들었던 다른 문파들이죠. 제가 그 대왕 대머리가 생각하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들어줄 것 같으세요? 어림도 없는 소리. 어디 머리도 없는 게!”
“…….”
살짝 씩씩댄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일단은 들어가는 거예요. 폭우가 치는데 들판에서 버티느니, 마음에 들지 않는 놈 집의 처마 아래라도 들어가는 게 나으니까요.”
당군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가 가지 않는군.”
“……뭐가요?”
“우리에게는 천우맹이 그 처마였지 않은가?”
“…….”
당군악이 청명과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다.
“모순이네. 이대로라면 천우맹이 협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 강호의 미래를 위해 대승적인 결단을 내렸다고 칭송받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잃지 말아야 할 처마를 잃게 되는 게 아닌가?”
청명이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나는 천우맹 안에서 우리가 공유했던 게 단순히 힘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네. 우리는 그 너머의 무언가를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 그저 더 강해지고 안전해지는 쪽을 선택한다는 게…….”
청명이 천천히 눈을 다시 떴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언젠가부터 느끼고 있었어요.”
“……무엇을 말인가?”
“어쩌면 나는 지금 정해진 결과로 달려가고 있고, 그저 그 결과를 외면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요.”
당군악이 입을 다문다. 청명의 말에 실린 무게가 너무도 무거웠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이 올바르게 자라길 바라죠. 불의에 굴하지 않고, 정도를 지키고, 약한 이를 도울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라죠.”
“그렇겠지.”
“하지만 그 어떤 부모도 제 자식이 남을 위해 대신 죽기를 원하지는 않을 거예요.”
“…….”
“이미 벌어진 일에 눈물을 흘리며, 잘했다고 칭찬을 해 줄 수는 있겠죠. 하지만 누구도 자기 자식이 남을 구하기 위해 불구덩이에 뛰어들게 두지는 않을 거예요.”
당군악이 눈을 감아 버렸다.
청명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가 화산을, 화산의 문도들을 그 불구덩이로 밀어 넣고 있었어요. 화산이 외치는 것들이 커질수록, 화산이 더욱 대단한 곳이 되어갈수록, 그들은 좀 더 위험해지겠죠.”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물론 화산뿐만이 아니라 천우맹도 마찬가지예요.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죠.”
“……알고 있네.”
“어느 순간, 그런 꿈을 꾸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사패련을 물리치고, 천마를 물리치고, 모두를 물리쳐 마침내 강호에 평화가 찾아오는 거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이.”
“그게 우리가 바라는 것이잖은가?”
“그런데 거기에 화산이 없어요.”
“…….”“화산도, 당가도, 남궁도……. 녹림과 새외의 두 문파도. 아무도.”
청명이 심드렁한 얼굴로 천정을 올려다본다.
“결과적으로는 잘 된 거죠. 모두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켰고,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뤘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걸 보고 웃지 못했어요.”
그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이상하게도 처절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같은 결과니까.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만은 확연하게 다가온다. 그 짙은 씁쓸함과 회한이 말이다.
“저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온 것뿐인데, 언제부턴가 화산이 대단한 협의를 만들어 내는 문파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리고 모두가 어느 새부터 협의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고요.”
“자네…….”
“그 끝에 뭐가 있을까요?”
당군악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앞으로 항주 같은 일은 몇 번이고 벌어질 거예요. 그때마다 천우맹이니까. 화산이니까. 당가니까. 앞에 나서서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게 당연해지겠죠.”
그 말에 당군악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다. 이미 천우맹의 모든 것이 그런 경향을 띠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그럼 언젠가 우리는 우리의 희생을 바탕으로 지켜 낸 모든 것을 다른 이들만 누리는 결과를 마주하게 될지도 몰라요.”
그게 과거의 화산이 갔던 길이다.
청명이 뼈저리게 후회하고, 결코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하지만 참 우습지 않은가? 그토록 원망하고 후회했음에도, 어느새 청명도 그와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청문을 이해하고, 과거를 더 이해하면 할수록 그의 선택도 과거의 화산과 같아진다.
그리고 그 결과마저 같아질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뭐.”
청명이 다시금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정말 대단한 협사였으면, 그래도좋다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솔직히 저는 속 좁고 이기적인 놈이라서, 저희가 개고생해서 이룬 것들을 남들만 누리는 꼴은 못 보겠어요. 그냥 제가 좀 더 비겁해지면 될 일이죠.”
“자네…….”
“그게 옳을 거예요.”
청명이 피식 웃는다.“
저 망할 것들은 이제 와 몸을 사리라고 한다 해서 몸을 사리지도 않을 거고, 남들만큼만 싸우라고 해서 그러지도 못할 거예요. 그러니 제가 막아야죠. 더 위험하지 않게, 더 힘들지 않게.”
“하지만…… 자네는 누누이 그렇게 해서는 마교를 이길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방법은 또 찾을 수 있겠죠. 애초에 답이 없었던 건 처음부터 마찬가지였으니까.”
“무책임하군.”
“알아요.”
청명이 한숨을 내쉰다.
“그런데 이게 제 한계에요. 더는 어렵네요. 남은 건 저 대왕 대머리와 논의해 봐야죠. 믿음직스럽지는 않지만, 상황은 저보다 더 잘 보고 있는 측면도 있거든요.”
당군악이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자네도 어른이 되었군.”
“비겁해졌다는 말로 들리네요.”
“칭찬이라면 칭찬일세. 언제까지 패기만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
청명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힌다.
답은 쉽게 나왔다. 그저 그가 가장 지키고자 했던 게 무엇인지 돌이켜 보았을 뿐이다.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화산,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 그리고 화산의 미래.
강호가 아닌, 중원이 아닌, 천하가 아닌 바로 화산이었다.
화산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 천하를 지켜야 한다는 청문의 말에 그토록 반발했던 게 청명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역시 청문과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그 길을 바꿔야 한다.
“맹주님께서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저 역시 소인배에 불과합니다.”
현종이 고개를 내저었다.
“청명이의 말대로입니다. 제가 감히 저 아이들의 부모를 자처할 수는 없겠지만, 세상에 어느 부모가 제 아이의 피로 세상이 평화로워지길 바라겠습니까?”
“…….”
“그저 조금이라도 저 아이들이 흘릴 피가 적어졌으면 할 뿐입니다. 그 선택의 대가로 다른 이들이 흘릴 피가 더 많아진다고 한들……. 그건 제가 감당해야 할 죄의 대가겠지요.”
“이해합니다. 충분히.”
당군악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은 양민들을 지키고, 천하를 지켜야 한다. 하지만 당군악에게 당가가 그렇듯이, 화산의 제자들 역시 저들이 지켜내야 할 이들이다.
어쩌면 천하의 모두보다 더 소중한.
그런 이들을 위험에 내몰면서 협의를 논하는 것은 어쩌면 이상에 함몰되어 버린 이의 무도한 짓거리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당군악은 이들의 말을 이해했다. 둘 모두 너무도 화산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이들이기에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 분의 뜻은 알겠습니다.”
달라지는 건 크게 없을 것이다.
그저 더 큰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그곳에는 이제 구파일방이 된 화산이 있을 것이고, 또한 오대세가로 합류한 당가와 남궁세가가 있을 것이고, 새외의 문파들과 녹림 역시 함께하겠지.
이름이 바뀐다고 해서 그 교감이 사라질 일도 없다.
그러니 달라지는 것은 그저 하나뿐이다.
“그럼.”
당군악이 조금 씁쓸하게, 차마 떨어지지 않은 입술을 떼어 말했다.
“천우맹은 여기까지군요.”
그 말을 들은 모두가 그저 눈을 감아 버렸다.
차마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