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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71화 (1,172/1,567)

1171화. 대답도 못 해 주는 양반이. (1)

“흐으으음.”

임소병이 손에 든 부채를 가볍게 흔들어 댔다.

“그런 이야기들이 오갔군요. 흥미롭네요.”

남궁도위가 조금쯤 언짢고 탐탁지 않은 눈길로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그 옆으로 앉은 맹소, 설소백까지도 말이다.

‘나도 나를 모르겠군.’

가슴이 답답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누구에게라도 풀어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누구’가 굳이 이 남자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상하게 남궁도위의 발길은 이곳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임소병과 함께 있던 새외의 궁주들과 합석하게 된 것은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앉고 보니 그 모양새가 딱히 자연스럽진 않았지만…….

“그래서 다른 분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반응이라 해 봐야…….”

뭐라고 말해야 그 분위기를 전할 수 있을까?

남궁도위는 자신이 말주변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해 본 적 없다. 하지만 그 자리의 미묘한 분위기를 정확하게 전달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임소병은 총명했다. 총명한 이들은 굳이 완벽한 전달이 없어도 머릿속에서 상황을 그려 낼 줄 안다.

“대충은 알겠군요.”

지금처럼 말이다. 남궁도위의 표정만으로 다른 이들의 반응을 예상한 임소병이 나직이 웃었다.

“음, 이거 뭐랄까……. 참 법정답게 아픈 곳을 잘 찔렀다고 할 수는 있지만…….”

임소병이 슬쩍 남궁도위를 보았다.

“그 말을 들은 분들의 반응이라는 게 굉장히 새삼스럽군요.”

“새삼스럽다고 하셨습니까?”

“예. 새삼스럽네요. 모두가 뻔히 알고 있는 사실 아니었습니까?”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임소병의 투명한 시선에 남궁도위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임소병이 말했다.

“애초에 천우맹이란 그런 곳입니다. 이곳에 정말 화산이라는 두 글자에 이끌려 온 이들이 있습니까?”

그 말에는 남궁도위는 물론, 설소백과 맹소조차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지요.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청명이라는 두 글자에 이끌린 것입니다. 화산이 지금과 똑같은 것들을 해 왔다 한들, 그 일의 주체가 화산검협 청명 도장이 아니었다면 천우맹은 절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

팔짱을 낀 맹소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청명이라는 이의 가능성을 보고 화산과 손을 잡기로 한 사람이기에 임소병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천우맹은 화산검협 청명이라는 이의 희생이 있어야 성립 가능한 곳이라는 의미기도 하지요.”

“희생이라는 말은 좀…….”

남궁도위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애초에 남궁은 청명 도장의 피를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화산에 이끌린 이유는 청명 도장이 보여 준 협의와 인품 때문이지. 그가 우리 대신 화살받이를 해 줄 거란 생각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 양반에게 인품이라는 말을 들이미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는 우선 접어 두고.”

임소병이 헛기침을 하고는 살짝 어두워진 시선으로 남궁도위를 보았다.

“뭐. 남궁 소가주의 말이 그리 틀린 건 아닐 겁니다. 남궁 소가주가 청명 도장을 따르는 이유는 그가 보여 준 희생 때문이 아니라, 그가 보인 영웅적인 행적 때문일 테니까.”

남궁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화산에 도움을 청했을 때, 청명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고 매화도로 향했다. 남궁도위는 그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항상 입버릇처럼 논해 오던 협의.

그 협의를 실제로 실천하는 이의 뒷모습이 가장 간절한 이에게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그 순간 절절히 느껴 버렸으니까.

“하지만…… 그건 결국 같은 말입니다.”

“예?”

“영웅적인 행적이라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라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게 어떻게…….”

임소병이 희미하게 비웃음을 흘렸다.

“물론 남궁 소가주께서는 영웅적인 행적의 핵심이 위험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협심이라고 주장하고 싶으시겠지만…… 정말 그럴까요? 청명 도장이 매화도로 향할 때와 같은 마음으로 동네 산적들을 때려잡았다면 남궁 소가주께서는 그 두 일을 똑같이 평가하셨겠습니까?”

“그건…….”

임소병이 거 보라는 듯 피식 웃었다.

“우습지만 그렇지 않겠지요. 왜냐면 사람들이 보는 것은 ‘어떤 이가 어떤 일을 했는가’니까. 그렇기에 똑같은 산적 토벌이라도 명문의 제자가 쉬이 행하면 온당히 해야 할 일이 되지만, 사가의 양민이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미담이 되는 겁니다.”

남궁도위가 침묵하자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화산검협의 협심을 평가하고 칭찬할수록, 세상이 천우맹의 협의지심을 믿고 따를수록, 청명 도장은 그 협의라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는 거지요.”

남궁도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도, 부정할 논리가 마땅히 떠오르질 않았다. 이미 상황이 그리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천우맹이란 결국 화산검협의 희생을 근간에 깔고 만들어진 곳이 될 수밖에 없지요. 아마 남궁 소가주께서도 사패련과 마교와의 싸움을 생각해 오셨을 텐데, 그 상상 속에서 청명 도장은 어찌하고 있었습니까?”

“그야…….”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입술 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제일 앞에서 싸운다. 가장 처절하게.

수많은 이들을 이끌며 누구보다 밝게 빛나지만, 남궁도위도 부정하기 어려웠다. 그 가장 빛나는 곳이 가장 위험한 곳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알아 두십시오. 남궁 소가주.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을 태연히 반복하는 미친 인간들이.”

남궁도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는 이 중에 저 표현에 가장 맞아떨어지는 사람이 청명이라는 사실을.

“물론 그런 인간 중 대부분은 죽어 나갑니다. 하지만…… 백만에 하나, 천만에 하나……. 아니, 어쩌면 수백 년에 걸쳐서 하나.”

임소병이 부채를 꽉 움켜잡았다.

“그 미친 짓거리를 하고도 마지막까지 운 좋게 살아남는 이가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세상이 뭐라 부르는지 아십니까?”

“……뭐라 합니까?”

“영웅이라 합니다.”

“…….”

더는 저 영웅이라는 말이 좋은 말로 들리지 않았다.

임소병이 비웃듯 그런 남궁도위를 바라보았다.

“남궁 소가주의 상상 속에서, 모든 전쟁이 끝난 뒤 청명 도장은 영웅이 되어 있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말은 마치 청명을 지옥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던 게 다름 아닌 남궁도위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렇기에 남궁도위는 숙인 고개를 차마 들 수가 없었다.

“그럼…….”

그 순간, 잠자코 임소병의 말을 듣고 있던 설소백이 입을 뗐다.

“녹림왕께서는 다르다는 건가요?”

임소병이 빙긋 웃으며 설소백을 보더니 대답했다.

“뭐 다를 게 있겠습니까? 저도 뻔히 알면서 그 청명 도장에게 기생하는 것이지요.”

“…….”

“하지만……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알고 이용하는 쪽과, 나는 몰랐다고 하면서 사람을 슬슬 절벽으로 밀어 내는 이들 중 누가 더 나쁜 건지 말입니다. 물론 그 절벽에서 살아 돌아오면 영웅이 되기는 하겠지만…….”

듣고 있던 맹소가 눈살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녹림왕께서 비꼼이 너무 과하신 것 같소.”

“비꼼이요?”

“애초에 화산검협이 원치 않는 것을 다른 이들이 억지로 떠민 것이 아니잖소. 다른 이들 역시 화산검협이 걷는 길에 이끌린 것뿐이오. 그런 이들은 필연적으로 평범한 이들에게 눈부시게 보일 수밖에 없으니.”

“흐음.”

맹소를 보는 임소병의 두 눈에 슬쩍 이채가 어렸다.

“과연 맞는 말씀입니다. 그저 저는 그 뻔한 사실에 이제 와 새삼 충격을 받은 듯 구는 게 꽤 우스꽝스레 느껴져서 말입니다.”

“그 정도만 합시다.”

“예, 그러지요.”

임소병이 순순히 물러난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었는지 맹소가 슬쩍 임소병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녹림왕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무얼 말씀하시는 건지?”

“소림이 한 제의를 화산이 받아들일 거라 보십니까?”

“흐으음.”

임소병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제 뺨을 긁적였다.

“거꾸로 저도 하나 물어보고 싶습니다만, 두 궁주께서는 어떻게 답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무래도 변화를 피할 수는 없을 듯한데.”

“……약속만 지켜진다면, 저희 입장에서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지요.”

“예?”

태연한 맹소의 대답에, 설소백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궁주님! 그 제안을 받으실 건가요?”

“진정하게, 설 궁주.”

맹소가 고개를 내저었다.

“화산검협과 법정은 비교하기 어렵지. 애초에 소림을 신뢰하기란 쉽지 않아.”

“네! 당연하죠.”

“지금이라면 당연히 화산을 선택해야겠지. 화산에는 화산검협이 있으니까.”

“네. 저도 그렇게…….”

“하지만 백 년 뒤에도 화산에 화산검협이 있겠는가?”

“…….”

설소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백 년 뒤에도 소림은 중원의 북두일 걸세. 그리고 그들은 전대의 방장이 한 약속을 기억하겠지. 하지만…… 백 년 뒤의 화산이 어찌 되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네.”

“그건…….”

무언가 반박하려던 설소백이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맹소의 말이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야 소림과는 손잡고 싶지 않네. 하지만 궁주로서 판단한다면, 천하의 어떤 문파도 소림이 내미는 손은 거부할 수가 없지. 특히나 우리 같은 새외의 문파는 말일세.”

“…….”

“나 하나의 기분을 우선하는 건 궁도들을 책임지는 궁주로서 해선 안 될 일이지. 나의 이 판단이 궁을 그르쳤다고, 언젠가 후대가 원망하지 않는단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설소백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지금껏 새외를 신경 써 준 화산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 역시 궁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일 터. 그러니 나는 맹주께서 어떤 결론을 내리든 그저 따를 생각이네. 그게 순리겠지.”

호오, 하며 살짝 감탄사를 흘린 임소병이 설소백을 돌아보았다.

“설 궁주께서는?”

“저는…….”

설소백이 우물쭈물 답을 하지 못하자 임소병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사실 그게 가장 정론이기도 하죠.”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실 뭐 녹림의 입장에서는 거절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긴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림이 녹림을 내치지야 않겠지만, 지금과 같은 대접은 어렵겠죠.”

“전후 논공에서도 후순위로 밀릴 테고?”

“예, 맞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그쪽을 바랍니다만…….”

임소병이 부채를 펴 들고 얼굴을 반쯤 가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법정이 들고 온 수가 너무도 절묘했습니다. 아마 이번만은…… 맹주님도, 화산검협도 그 제안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둘은 지금껏 어떤 제안도 거절해 오지 않았는가? 그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확률이 아주 적다고는 할 수 없을 듯한데.”

“그건 지금껏 저들이 해 온 모든 것들이 사람을 살리기 위한 길이라는 대의와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다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저 제안을 거절하고 천우맹이 단독으로 사패련과 맞서는 순간?”

맹소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부족해서 흘려야 할 피는 모조리 그 두 사람의 책임이 된다는 거로군.”

“그렇지요. 그 선택이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쉽지 않은 것 아니겠습니까?”

맹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참 어려운 일이다.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할 현실이었지만…… 설마 그게 이런 식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소림의 방장은 과연 무시할 이가 아니군요.”

임소병의 시선이 열린 창 쪽으로 향했다.

“저도 궁금합니다. 지금껏 자기가 믿어 오던 모든 것들이, 오히려 자신이 지키려 하던 것을 해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을 때 과연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말입니다.”

그 말에 남궁도위가 무겁고 긴 한숨을 토했다.

둔중해진 공기를 느끼며, 임소병은 구름에 반쯤 가려진 달을 응시했다.

‘긴 밤이 되겠군.’

그에게나, 다른 모든 이들에게나 말이다.

특히나 한 사람에게는 너무도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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