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화. 정말 내가 틀렸던 것인가? (5)
법정이 돌아간 뒤, 방 안에 남은 이들은 애매한 침묵을 지키다 삼삼오오 흩어졌다. 지금은 서로 대책을 논의하기보다 각자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말없이 동의한 것이다.
그리하여 방에 남게 된 건 화산의 장문인 현종과 장로들뿐이었다.
“장문인.”
현상이 슬쩍 입을 떼자 수심 깊은 얼굴로 침묵하던 현종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방장이 한 말을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현종은 말없이 타오르는 등불을 바라보다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상.”
“예, 장문인.”
“……등의 심지가 다 되어 가는 것 같지 않으냐?”
현상이 슬쩍 등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교체해 두겠습니다.”
“다 닳아 버린 심지는 바꾸면 그만이겠지. 하지만 바꿀 수 없는 것이 닳아 간다면 어찌해야 하겠느냐?”
현상이 입을 닫았다. 현종이 논하고자 하는 것이 단순히 심지에 대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현종이 씁쓸한 얼굴로 읊조렸다.
“알고 있었음에도 외면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방장께서 한 지적이 더 아프구나.”
현상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평소 같으면 이쯤에서 쏘아붙이듯 한마디를 보탰을 현영조차도 지금은 그저 굳은 얼굴로 입을 닫고 있을 뿐이었다.
“다들 알고 있었잖으냐?”
“…….”
“지금의 화산은 청명이라는 심지를 태우는 등불과도 같다는 것을. 심지가 밝게 타오르면 타오를수록 더 큰 빛을 내뿜겠지만…… 빛이 밝을수록 그 심지는 더욱 빨리 닳아 간다는 것을 말이다.”
“누가 그리 타라고 했습니까?”
현영이 대뜸 버럭 역정을 냈다.
“말렸잖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습니까! 그런데도 본인이 계속 날뛰는 것을 저희가 뭘 어떻게 합니까! 말릴 수가 있어야 말릴 것 아닙니까!”
평소에는 화산의 누구보다 청명을 아끼는 현영이다. 그런 이가 청명에 대해 이리 악담을 늘어놓는 이유야 빤했다. 자책하고 있을 현종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다.
“현영아.”
“애초에 그놈…….”
“정말 말릴 방도가 없었더냐?”
현종의 말에 현영이 잠깐 침묵하다 입을 꾹 다물었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일이다. 말릴 방법이야 어떻게든 있었겠지.”
현종은 알고 있다. 청명은 그의 명을 거부하지 않는다. 물론 반발하고 설득하려 들기는 하겠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둘 사이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상황이 온다면 결국에는 현종의 말을 따르려 할 것이다.
그렇기에 현종 역시 항상 청명에 대한 고마움을 새기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건 배려였겠지.’
아니, 어쩌면 신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순간, 지금까지는 그저 고맙기만 했던 그 배려와 신념이 지금 현종의 가슴을 찔러 오고 있었다.
부정할 수 없으니까. 지금껏 청명과 오검을 사지로 끝없이 내몰아 온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현종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장문인.”
현상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래.”
“청명이는 우리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이가 아닙니다. 저 천하의 법정대사마저 자신보다 위에 있다고 인정하는 아이가 아닙니까?”
현종이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리 생각해 버린다면 마음은 편안할 것이다.
하지만 현종은 알고 있다. 청명이라는 사람에게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강인한 부분과,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나약한 부분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현영이 시큰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쩌시렵니까? 법정의 제안을 받으실 겁니까?”
“글쎄. 모르겠구나.”
“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 양반이 입으로야 사과하고 자신의 잘못을 알았다고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보나 마나 천우맹을 제 발아래로 끌어들이려는 수작이겠지요.”
“그래. 그리 볼 수도 있겠지.”
현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미 방장이 그 의심에 대한 대답도 하지 않았더냐? 그 욕심이 천하를 위한다는 대의와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면, 우리에겐 거절할 명분이 없단다.”
“명분, 명분! 그놈의 명분이 뭐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현영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명분 소리도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신물이 납니다! 다른 이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그놈의 대의며 명분에 왜 우리만 이토록 시달려야 하는 겁니까?”
“현영아…….”
“우리가 천우맹을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현영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예, 압니다! 천우맹을 만든 것은 우리가 아니라 청명이 놈이라는 것도요! 그러니 그놈이 그러자고 하면 그리해야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먼저 나서서 천우맹을 해체하자는 말을 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현종이 한숨을 푹 내쉰다.
“현영아. 청명이는…….”
“청명이 놈이 그럴 놈이 아니면, 우리가 먼저 나서서 다 집어던져야 합니까?”
현종이 쓴웃음을 지었다.
“방장의 말을 잘 생각해 보거라. 청명이 놈은 어깨에 짐이 올려져 있으면 또 무리하고도 남을 놈이 아니냐?”
“그럼 무리를 못 하게 만들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세상에 길이 얼마나 많은데, 그놈 하나 말리는 길이 천우맹을 해체하고 구파일방에 기어들어 가는 것밖에 없겠습니까!”
현종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현영은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듯이 성이 잔뜩 난 눈으로 노려보았다.
“지킬 것은 지키며 타협하는 방법도 있잖습니까. 왜 항상 이리 극단적이어야 합니까!”
“단순히 청명이를 지킨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잖느냐. 모르겠느냐? 천하만민을 구하기 위해 천우맹과 구파일방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방장의 말씀에 어디 틀림이 있더냐?”
“그게 옳으니까, 그럼 지금껏 해 온 것을 다 거름통에 밀어 넣고 고개를 조아리자 이겁니까?”
“……현영아, 우리는 도인이다.”
“예, 도인이지요. 우리만 한 도인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같은 도가인 무당이 돈과 권력을 쓸어 담고, 불가인 소림은 천하의 북두에 서 있는데, 우리는 도인이라 굴러든 제 밥그릇도 걷어차고 있지요, 예!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
“그 잘난 도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지키고 살아서 대체 뭐가 달라졌습니까? 제자라고 들어온 놈들 피죽도 제대로 못 먹이고 산 게 불과 몇 해 전인지는 아십니까?”
“그만하거라.”
“장문인! 솔직히 말해 보십시오. 장문인은 원망한 적이 없습니까? 그 대단하던 문파 꼴을 개판으로 망가뜨려 놓고, 무책임하게 제자를 받아 버린 선대들을 원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까?”
현종이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왜 없었겠는가? 원망으로 지새운 밤을 열 손가락으로는 모두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화산이 그런 정도는 아니잖으냐.”
“예. 예전의 화산도 융성했었지요. 오히려 지금보다 더 대단했었지요.”
“…….”
현영이 입술을 깨물고 말한다.
“모르겠습니다, 장문인. 정말 모르겠습니다.”
“현영아…….”
“평생을 화산의 도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도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화산에 처음 입문할 때는 스스로 세운 뜻이 확고했는데, 이제는 제가 무엇 때문에 도인이 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현종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현영의 말에 실망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말에 현종도 공감하기 때문이었다.
“그 뭔지도 모르는 도 때문에 아이들에게 또 내어 주라 해야 합니까? 포기하라고 말해야 하는 겁니까?”
현종이 고개를 저었다.
“현영아. 화산은…… 우리가 만들려 했던 화산은 그런 곳이지 않으냐? 선대들께서도…….”
“예, 장문인. 선대께서도 그러셨지요. 그러니 우리도 그래야겠지요. 아이들에게 그리 말해야겠지요. 내어 주어야 한다고. 내놓아야 한다고. 그것이 모두를 위한 길이며 순리라고.”
“…….”
“하지만 장문인. 화산이 지키려 했던 그 대의와 도리 덕분에 화산은 완전히 망했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다시 여기까지 왔습니다.”
현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지금 장문인이 한 선택 역시 화산에 남아 뒤따르는 아이들에게 이정표가 되겠지요. 그것이 옳다 배우게 되겠지요.”
“나는…….”
“언젠가는 이 선택이 다시 화산을 망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되면 우리가 겪었던 고통을 우리의 후대가 고스란히 다시 겪게 될 겁니다.”
현종이 눈을 감아 버렸다. 지금껏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 이 말이 가장 아프고 시렸다.
“아니, 그보다 더하겠지요. 적어도 우리는 운 좋게 청명이 놈을 만나서 화산의 현판이 내려가는 꼴을 두 눈으로 보진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후대의 아이들에게도 청명이 같은 놈이 있겠습니까? 우리처럼 운이 따라 주질 않으면, 아마 별꼴을 다 보게 되겠지요.”
“그만 좀 하거라, 이놈아!”
“뭘요! 뭘 그만합니까!”
현상이 버럭 고함을 치자 현영 역시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 마주 역정을 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장문인! 장문인이 그곳에서 고고하게 도를 논하고, 대의를 논할 수 있는 건 장문인이 그 오랜 시간 동안 도를 지켜 오고, 그 대의를 이어 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놈이 벌어 온 것들을 제 것인 양 두른 덕분에 거지꼴로 쫓겨나야 했을 장문인이 고고한 도사인 척할 수 있는 겁니다.”
“이놈의 자식이!”
“현상아!”
“아니, 말이 심하지 않습니까!”
현상이 날뛰자 현영이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야, 이놈아. 아무리 그래도 할 말이 있고…….”
“그렇게 대단한 대의와 협의를 좇으시는 분들이 쓴소리는 또 듣기 싫으신 모양입니다?”
현상이 입을 다물었다. 현영은 살짝 핏발 선 눈으로 현종을 노려보았다.
“대의와 도의, 그리고 협의를 논하고 싶으시면, 그 잘난 대의와 도리로 무엇이라도 이루고 말씀하십시오. 아이들이 피로 벌어 와 마련해 준 그 고급 침상에 앉아서 고고함을 논하시기 전에요!”
현종의 고개가 절로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귓가로 나직한 현영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지금의 장문인에게는 그것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궁금합니다. 과연 화산의 현판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라 불면의 밤을 보내던 몇 해 전의 장문인께서도 지금 장문인과 같은 결정을 하셨을지.”
“…….”
“같지 않다면 이유야 하나뿐이겠지요. 아이들이 피로 벌어 온 것들이 장문인의 배에 기름이 끼게 만든 것. 그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닥치지 못할까, 이놈!”
결국 더는 참지 못한 현상이 버럭 소리를 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서 흉흉한 기운이 번져 나왔다.
“듣자 듣자 하니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네 언제부터 이리 방자해졌단 말이더냐! 그게 장문인께 감히 할 수 있는 말이더냐?”
“예. 실로 ‘감히’지요.”
그러나 현영은 그저 차가운 눈으로 현상과 현종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 협의로 천하에 칭송이 자자하신 현종진인께 제가 ‘감히’ 어찌 이런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이, 이놈이 끝까지!”
현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현종을 노려보며 일갈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저희야 따라야겠지요. 하지만, 장문인. 적어도 결정을 내리시기 전에 생각해 주십시오. 저 아이들이 피 흘려 일군 것을 대의나 협의라는 이름으로 내던져 버리는 것이 그저 올곧고자 하는 장문인의 자기만족은 아닌지 말입니다.”
그 말을 끝낸 현영이 거칠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찬바람 일으키는 현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현종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입술 새로 무거운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