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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65화 (1,166/1,567)

1165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5)

백색 나삼 아래로 드러난 흰 손이 붉은색 술잔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장일소는 고개를 젖힌 채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하늘에 뜬 달을 응시했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달만 바라보던 그가 제 손에 들린 술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술잔은 금방이라도 넘칠 듯 그득 차 있었다. 그 안에 비친 달이 흔들리며 일렁였다.

“내 노래하니 달은 거닐고…….”

그의 입술 새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내 춤을 추니 그림자 어지러이.”

입가로 잔을 가져간 장일소가 천천히 기울였다.

“깨어서는 함께 즐기는 것을, 취한 뒤에는 흔적 없더라…….”

텅 비어 버린 술잔엔 더 이상 술도, 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장일소는 빈 잔을 말없이 그저 바라보았다.

“이백(李白)이군요.”

호가명이 다가오며 나직이 말했다.

“련주님께서 시선(詩仙)을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백이라.”

장일소가 읊조리듯 웃었다.

“좋아하지는 않아. 아니……. 오히려 싫어하는 편이지.”

“이백을 말입니까?”

장일소의 시선이 강으로 옮겨 갔다. 강 위로 일렁대는 달이 보였다.

“이백은…… 강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더군.”

“…….”

“멍청하게 말이야.”

장일소가 쥐고 있던 술잔을 단숨에 강으로 던졌다. 술잔이 일으킨 파문에 강에 비친 달이 이지러졌다.

하지만 흔들리고 흔들리던 달은 이내 다시 제 모습을 찾아 갔다. 고요하게.

“저건 환상일 뿐이지. 아무리 잡으려 해도 결코 잡을 수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장일소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사라지지 않는단 말이야. 그러니 볼 수밖에 없지. 홀린 것처럼.”

“하늘 위에 진짜 달이 있잖습니까?”

“닿지 않잖니.”

장일소가 고개를 뒤로 늘어뜨리듯 젖혔다.

“하늘에 뜬 달은 죽어라 손을 뻗어 봐야 닿지 않아. 하지만 강 위에 뜬 달은 잡을 수 있을 것 같거든. 손만 뻗으면 말이야…….”

“…….”

“그러니 이백도 물에 빠져 죽었겠지. 그 달을 어떻게든 가지고 싶었을 테니.”

반쯤 감은 듯한 눈으로 한참 동안 물에 뜬 달을 바라보던 장일소의 시선이 호가명에게로 향한다.

“어떠냐? 가명아. 너도 내가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 하는 것처럼 보이더냐?”

그 말에 호가명이 작은 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그건 모르겠지만, 닿지 않는 달을 손에 넣는 방법은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호가명이 말없이 걸어와 장일소 앞에 새 잔을 내려놓고는 술을 채웠다. 잔에 가득 찬 술 위로, 다시금 달이 떠올랐다.

“여기에 있습니다.”

“…….”

“마시면 사라지지만, 다시 채우면 다시 가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라진 달을 아쉬워하지 마시고 다시금 술을 부으면 그만이지요.”

장일소가 쿡쿡 웃어 댔다.

“진짜 똑똑한 이는 따로 있다니까.”

장일소가 손을 뻗어 호가명이 채운 술을 천천히 들이켰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호가명이 살짝 무거워진 목소리로 입을 뗐다.

“탈명독호(奪命獨虎)의 설득에 실패했습니다.”

장일소는 대답하지 않고 강만 바라보았다.

“죽는 한이 있어도, 련주님을 따르지는 않겠다고 하더군요.”

여전히 대답이 없는 장일소를 보며 호가명이 나직이 말했다.

“……달리 도리가 없어 처형했습니다.”

“그래.”

장일소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가족이 있던가?”

“복건 쪽에 처와 아들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본인이야 집을 떠난 지 십 년은 족히 지난 것 같습니다만…….”

“무정한 사람이구나.”

“그런 이들이 보통 그렇지 않습니까?”

“남은 가족들에게 평생 쓸 만큼 돈을 보내 주렴.”

호가명이 대답 없이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니?”

“조금 주제넘는 질문일지는 모르지만…… 그는 련주님께 반기를 든 이입니다. 우둔하여 주인을 잘못 모시고, 끝끝내 틀린 선택을 한 이가 아닙니까? 그런 이의 식솔들에게 굳이…….”

“틀렸다라…….”

장일소가 다시 고개를 돌려 강을 바라보았다.

“그래……. 멍청해서 만금대부의 휘하로 들어가고, 멍청해서 끝까지 충성을 지키는 거지. 사람은 개가 아닌데, 개처럼 사는 천하의 멍청한 놈이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글쎄. 그게 과연 틀린 것일까?”

“……련주님?”

장일소가 쿡쿡 웃었다.

“세상일이라는 게, 옳고 그름을 확실히 나눌 수 있다면 어려울 게 뭐가 있겠니? 그저 누가 옳은지만 가리면 될 일인 것을.”

“…….”

“하지만 가명아……. 사람에겐 저마다 자신만의 ‘옳음’이 있지 않니.”

호가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힘든 것이지. 누구도 틀리지 않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니까.”

“그렇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누군가는 설득할 것이고, 누군가는 논리로 찍어 누르려 하겠지. 누군가는 기다리고, 누군가는 읍소하고, 또 누군가는 감화되겠지. 하지만 나는 그저…….”

챙!

장일소가 쥔 잔에 쩌적쩌적 금이 가더니 이내 산산조각 났다.

“짓밟고 빼앗을 뿐이란다.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이니까.”

장일소는 술이 반쯤 찬 술병을 들어 천천히 기울였다. 흘러나온 술이 천천히 강에 흘러내렸다.

“내가 짓밟은 이들에게 미안하진 않지만, 술 한 잔 정도야 줄 수 있는 것 아니겠니? 그렇지?”

호가명이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그러자꾸나.”

“예, 그럼.”

호가명이 읍하고 조용히 물러나자 장일소의 시선이 다시 강 위에 뜬 달로 향했다.

‘누가 옳은가라…….’

허망하도록 무의미했다.

* * *

법정의 입이 가만히 닫혔다.

청명의 투명한 눈빛이 그를 차갑게 짓누르고 있었다. 마치 차갑게 얼린 예리한 칼날이 폐부 깊숙한 곳을 찌르는 것만 같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 등불 밝힌 방 안에서 저 눈빛만이 형형하게 빛나는 것 같다.

이 눈빛을 보는 것이 오늘이 처음은 아니다. 벌써 몇 번이고 보아 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법정은 자신의 진의를 숨기기 위해서 애를 써야 했다. 제 반의반도 살지 않은 어린아이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껄끄러움을 피하고자 말이다.

그래, 껄끄러움…….

지금에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 껄끄러움은 어쩌면 두려움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결코 두려움을 줄 수 없어야 할 이에게서 느낀 두려움이기에 그 자신도 알 수 없었을 뿐.

법정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속내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곳에 올 때, 법정은 이미 이런 순간을 마주할 것이라 예상했다.

‘화산검협.’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이. 언제나 그가 나아가려는 방향과 반대로 나아가 그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업적을 이룩해 버리는 이.

그는 존재 자체가 법정에 대한 위협이자, 소림에 대한 위협이다.

그렇기에 지금껏 법정은 화산검협을 어떻게든 통제하려 애써 왔다. 하지만 깊고 깊은 참오 끝에 알게 되었다. 그가 어째서 청명을 두려워해 왔는지 말이다.

‘나의 것이 아니기에, 내 안에 가둘 수 없었기에 두려웠던 것뿐이다.’

만약 소림에 청명과 같은 이가 났다면, 법정이 과연 그를 두려워했겠는가? 그가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 여겨 경계하고 억누르려 들었겠는가?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청명의 존재를 그 누구보다 기꺼워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소림에는 없는 것을 채워 줄 존재라고 말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해할 수 없다면 곁에 두면 된다.’

상대가 적이 아니게 되는 순간, 두려움 역시 사라질 테니까.

그렇기에 법정이 내린 결론은 하나. 소림과 화산검협을 어떻게든 품어 내는 것이다. 그들이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준비해서 말이다.

법정이 천천히 눈을 떴다.

“시주.”

청명이 대답 없이 법정을 마주 보았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눈빛으로.

“솔직히 말하자면…… 이곳에 오기 전부터 나는 이 순간을 예상했네.”

“……무슨 의미죠?”

법정이 빙그레 웃는다.

“무슨 질문을 할지까지는 몰랐네. 그리고 무슨 반응을 할지도 몰랐지. 하지만 시주가 반드시 내가 예상하지 못한 무언가를 꺼낼 것이라 여겼네.”

법정이 빙그레 웃었다.

“지금까지 언제나 그래 왔으니 말일세.”

청명의 입술이 살짝 실룩였다. 그도 직감한 것이다. 지금의 법정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그렇기에 이곳에 오기 전에 한 가지 원칙을 세우고 왔다네.”

“그게 뭐죠?”

“그 어떤 질문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법정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청명을 응시했다. 청명의 시선을 한 치도 피하지 않으며.

“결코, 거짓을 입에 담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네.”

청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불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불자가 입에 담기에는 어처구니없는 말이네요. 그건 결국 지금까지는 거짓말을 밥 먹듯 했다는 거잖아요.”

“그럴지도 모르네.”

“……소림도 다된 모양이네요. 방장이라는 분이 태연하게 그런 말을 다 하고.”

청명이 살짝 힐난하자 법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스스로 거짓을 말하려 한 적은 없네. 하지만 때로는 진실마저 거짓이 될 때가 있는 법이지.”

청명은 짧게 혀를 찼다. 법정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때문이다.

“노력하겠다느니, 최선을 다하겠다느니,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뻔한 말은 안 하겠다는 소리 같은데요?”

“아미타불.”

법정이 낮게 불호를 외었다.

“그렇다네. 이 자리에 있다 보면 때로는 거짓 아닌 거짓을 입에 담아야 할 때도 있다네. 스스로도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았지. 말한 그대로 지키려 했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다른 형태의 거짓일 뿐이겠지.”

법정이 청명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습구나.’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 버렸을까?

그가 보기에도 청명은 천하의 영웅이다. 이제는 그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가 정말 소림의 방장으로서 강호를 수호하고, 그 정기를 바로 세우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면 청명 같은 이가 나타나는 것을 응당 기뻐하고 기꺼워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청명의 존재는 그의 마음에 들어찬 미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니 솔직하게 말하겠네.”

알고 있다.

여기서 그가 해야 할 말은 잘 포장된 거짓이라는 걸. 그게 그의 입장을 조금 더 낫게 만들어 준다는 걸.

해남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그러니 천우맹이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도 어려운 게 아니니까.

하지만 법정은 알고 있다. 그건 조금 전에 말했던 형태만 다른 거짓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는 이미 결심하지 않았는가? 이곳에서는 조금의 거짓도 입에 담지 않겠노라고.

“자네가 물었지. 단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 사실이냐고.”

“……그랬죠.”

법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솔직하게 말하겠네.”

어둑하게 가라앉은 법정의 시선과 청명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소림은…… 나는 해남을 구할 생각이 없네.”

그 목소리는 너무도 담담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짙고 선명하게 그 자리에 앉은 이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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