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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64화 (1,165/1,567)

1164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4)

‘이거였구나.’

종리형이 입술을 실룩이며 고개를 숙인 법정의 등을 바라보았다.

‘설마…….’

처음에는 법정이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다.

화산을 구파일방에 복귀시키고, 내어 줄 수 있는 것을 모조리 내어 주겠다는 그 말을 구파일방의 다른 문파들이 어찌 받아들이겠는가?

이건 천우맹에 대한 무조건적인 항복 선언이나 다름 없는 말이다.

하지만 법정이 마지막 말을 한 순간, 종리형은 법정의 진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손해 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녹림을 정파로 인정해 준다고 해서 구파일방에 무슨 타격이 오겠는가? 저 새외의 문파들을 중원의 문파로 인정한다고 해서, 그들이 갑자기 터전을 버리고 이 중원에 몰려와 자리를 잡기라도 하겠는가?

당가와 남궁이야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럼 실질적으로 소림이 양보하는 것은 그저 화산을 인정해 주는 것뿐.

물론 소림이 홀로 주도해 왔던 구파일방의 권력구도에 화산이라는 대척점을 만드는 것은 소림으로서도 달갑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외부에 천우맹이 있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생각해 보면 화산을 대척점에 세우는 것이 꼭 소림에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소림이 확고부동한 입지를 지니고 있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소림은 분명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 와중에 소림과 대립할 문파가 외부에서 들어온다면?

저 화산에 권력을 빼앗기기 싫은 다른 문파들은 반드시 소림의 밑으로 집결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소림이 공격을 받는 이유는 법정의 실책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소림이 완벽히 다른 문파들의 위에 있기 때문이니까.

사람은 가장 높이 선 이를 어떻게든 끌어내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람은 누군가 자신을 추월해 올라가는 것을 애초에 높게 선 사람보다 더 싫어하지.’

누구도 제 머리 위에 서는 사람이 둘로 늘어나는 걸 원치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소림은 되레 흔들리는 입지를 회복할 기회를 얻게 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완벽하다.’

만약 이 제안을 화산이 받아들이게 된다면 법정은 단숨에 사패련과 마교에 대항해 분열된 정파를 일통한 영웅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 가진 것을 내려놓으면서까지 천하를 위해 희생한 영웅이!

더 황망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본디 법정이 해야 했을 일이라는 것. 그저 순리대로 흘렀으면 자연히 이리 흘렀을 것이, 여러 진통을 겪으며 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원래 세인들은 자연스런 승리보다 이런 극적 타결에 더 관심을 가지는 법이 아니던가? 전화위복이라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리라.

‘어쩌시겠소, 현종?’

종리형의 시선이 안색을 굳힌 현종에게로 꽂혔다.

물론 천우맹이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헛물만 켠 겪이 되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기가 힘들다. 이 제안을 거절해 버리는 순간, 지금까지 천우맹이 내세운 명분과 가치는 모조리 땅바닥에 처박혀 버릴 테니까.

그리고 남는 것은 오직 권력을 탐하느라 양민들의 희생을 외면했다는 평가뿐일 것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수로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있다는 말인가?

종리형의 눈에는 보인다. 저 현종의 옆구리에 틀어박힌 법정의 비수가. 단숨에 살을 뚫고, 뼈를 갈라 폐까지 찢어 버린 비수가 말이다.

“음…….”

현종이 고통에 신음하듯 헛바람을 삼키는 순간이었다.

“왜…… 왜 꼭 우리가 그래야 하는 겁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소림이 천우맹에 들어오시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천우맹에 들어와도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 아닙니까?”

머리로는 몰라도 감각으로는 상황이 이상해졌다는 걸 느낀 조걸이 황급히 외쳤다. 감히 화산의 삼대제자의 신분으로 소림의 방장에게 하기에는 과도하게 무례한 언사로 말이다.

하지만 법정은 그런 조걸을 탓하기는커녕, 되레 기특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물론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건 안 될 일일세.”

“……어째서요?”

“양민들 역시 우리와 함께 싸우는 이들이기 때문이지. 그들이 어느 이름에 더 익숙하겠는가?”

“……그건…….”

법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부끄러운 말이지만, 다른 구파일방의 문파들은 구파일방을 해체하고 천우맹에 들어가기를 거부할 걸세. 그래서야 또 다른 분열을 낳을 뿐이지.”

“우, 우리만 왜…….”

“그러니 이리 부탁하는 것일세. 내 생각에는 이 이상의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군.”

법정이 남은 이들을 바라본다.

“대원칙은 하나뿐일세. 더 좋은 방향으로 힘을 모아 더 많은 이들을 구하는 것. 내 생각보다 더 나은 방법을 알고 있다면 가르침을 주게나. 타당하다면 내 반드시 따르겠네.”

“…….”

그런 방법이 있을 리 없다.

이곳에 있는 이들마저도 모두 납득해 버렸다. 지금 법정이 말한 방법이야말로 저 사패련과 마교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는 것을.

‘구파일방과 함께 싸운다고?’

조금 전까지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전력을 강화해 보겠다고 발버둥 쳤던 게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다. 물론 그 모든 일이 헛수고일 수야 없겠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이 들 만큼 구파일방의 이름은 거대한 것이다.

당군악이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말했다.

“조금 전, 화산에 동등한 지위를 약속하겠다 하셨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건 그저 말일 뿐이지 않습니까?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소림이 인정해도 다른 문파들이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법정이 빙그레 웃었다.

“그게 왜 걱정이란 말입니까? 그럼 여기 계신 분들이 도와주시면 될 것 아닙니까?”

“…….”

“소속을 바꾼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쌓은 유대가 사라지지는 않을 터. 그 알량한 약속과 지위 따위보다 더 확실한 지원이 아닙니까?”

“구파일방은 경우가 조금…….”

“당가주.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소.”

법정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내 가진 것 하나도 내어 놓지 않고, 단 하나도 양보하지 않으려 든다면 화합도 타협도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오.”

법정이 현종을 향해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 않습니까, 장문인?”

현종은 그만 웃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는 그가 천우맹의 맹주여야 하기에 한 번도 빠짐없이 맹주라 부르더니, 이제는 이미 그가 구파일방의 일원인 것처럼 장문이라 부른다. 참 교묘한 언사다.

“하나 묻겠습니다, 방장.”

“하문하시지요.”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법정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현종을 바라보았다.

“장문인께서는 지금 제 진의를 의심하고 계실 것입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럼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지금 매우 사적이고, 노골적이며, 욕망에 가득 차 있습니다.”

“예?”

“후대에 어느 날, 그 법정이라는 미친 중놈이 제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날뛰다가 천하를 사파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소리 같은 건 절대로 듣고 싶지 않습니다.”

현종이 움찔했다.

“제 말이 겁박처럼 들리셨다면, 제가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천하를 구한 영웅은 되지 못할지언정, 천하를 도탄에 빠뜨린 역적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된다면 죽어서도 소림의 선대를 뵐 낯이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무간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받는 편이 더 낫겠지요.”

현종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법정은 그저 담담히 자신의 속내를 풀어내고 있는 것뿐이지만, 현종에게는 마치 날 선 경고처럼 들렸다. 이 제안을 거절하게 된다면 역적이 되는 것은 바로 현종이라고 말이다.

그럴 의도가 아닌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하여, 제가 원래 해야 했던 일을 이제라도 하려 합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고, 지나간 것은 어떻게도 돌이킬 수 없겠지만, 그래도 후회를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현종은 이제 더는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이가 더없이 지독한 독을 품은 뱀 같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세상의 모든 집착을 버리고 득도한 고승 같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그 두 가지가 모두 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모르겠구나.’

알 수가 없다. 분명 법정의 행동과 목적은 선인의 그것이되, 그가 하는 행위의 결과는 화산을 궁지로 밀어 넣고 있다. 지고한 선이 오히려 지독한 악처럼 그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방장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것을 두고 옳다 여기면, 최선을 다해 그 옳음을 관철하려 든다. 그 과정에 있어서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체면이 상하는 것마저 감수하며, 순간적인 굴욕도 끈덕지게 참아 낸다.

그래, 이건 지금까지 법정이 그들의 반대편에서 보여 주는 모습일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 법정의 목적이 그들과 함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 뿐.

저것을 두고 틀렸다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어찌 해야 하는가?’

모두가 현종을 바라보고 있다.

조금 전까지 그토록 열정적으로 천우맹의 미래에 대해 논하던 이들이 이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로 그저 그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이 대단한 이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법정에게 휘둘려 버린 것이다.

아니, 하나도 남김없이?

현종의 시선이 자연스레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가 궁지에 몰렸을 때마다 언제나 길을 열어 주던 이에게로.

“구파일방에 화산이라…….”

현종의 시선이 채 닿기도 전에 청명의 느른한 목소리가 방 안에 물처럼 흘렀다. 그 목소리가 자연스레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뭐 나쁘지는 않네요. 방장이 말씀하신 걸 다 지킨다면 말이죠.”

“믿음이 없다면 서약이라도 하겠네. 그 대가는 내 목이라도 괜찮다네.”

“뭐,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야.”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구파일방이 이제 십파일방이 되는 건가요? 이름이 영 별론데.”

법정이 허허 웃어 버렸다.

“이름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구파일방은 열 개의 문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 되어 버린 지 오래라네. 그러니 구파일방에 열한 개의 문파가 든다고 해도 세인들은 이해할 걸세.”

“뭐. 그렇기도 하겠네요.”

팔짱을 낀 청명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방장.”

“왜 그러는가?”

“생각보다 대단하시네요. 솔직히 이렇게까지 몰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그 말에 법정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천하의 화산검협이 이리 말해 주는 걸 보니, 내가 좋은 제안을 한 건 맞는 모양이로군.”

“너무 좋아서 춤이라도 추고 싶을 지경이네요. 언제부터 생각하신 거죠?”

“그저 내려놓으니 보였다네.”

“……불교라도 믿어 봐야 하나.”

청명이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법정이 다시 입을 뗐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는가? 대답은?”

“……거절할 방법이 생각이 안 나네요. 솔직히 이걸 안 받으면 화산은 온 천하에서 욕을 퍼먹다가 배가 터져 죽겠죠.”

“그게 그저 옳은 일이기 때문이라네. 그렇지 않은가?”

“……그 명분과 정도는 내가 쓰던 칼인데, 그걸 방장이 휘두를 줄이야.”

쯧 하고 크게 혀를 찬 청명이 양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항복한다는 듯 말이다.

“그럼 받아들이는 걸로 알면 되겠는가?”

“뭐, 그래야겠죠. 나중에야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은 일단 긍정적으로 논해 보겠다고 대답하는 게 우선이죠.”

“그래. 나 역시 이 자리에서 즉답을 바라는 건 아닐세. 천천히 생각해 주게나.”

법정의 미소에서 그의 자신감이 엿보였다. 청명이 그런 그를 보다 말했다.

“그런데 그 전에, 하나만 물을게요.”

“무엇인가?”

“조금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들을 구하기 위함이라 하셨죠? 그러기 위해서 다 내려놓았다고?”

“그렇다네.”

“진심이십니까?”

“당연히 그렇다네.”

“아, 그래요?”

청명이 싱긋 웃었다. 두 사람의 웃음기 어린 시선이 서로 마주치는 순간.

“그럼 해남파는 어찌하실 거죠?”

“……해남파?”

“네, 해남파요. 저 강남의 끝자락에서 사패련에 포위되어 있는 해남파.”

“…….”

“그걸 듣고 정하죠. 말씀해 보세요, 저들을 어쩌실 건지.”

그 자리에서 숨죽이고 있던 이들은 순간 똑똑히 보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청명의 눈빛이 법정을 꿰뚫는 모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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