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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35화 (1,136/1,567)

1135화. 같이 한번 친해져 보자! (5)

콰득!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백천의 이마에 손때 묻은 엽전이 틀어박혔다.

파직!

나무로 만들어진 엽전이 산산조각 나며 백천이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갔다.

철푸덕.

대자로 뻗은 그의 이마에서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백천까지 조져 버린 당군악은 엽전을 던진 손을 가볍게 털어 냈다.

“확실히 화산파가 끈기가 있군.”

“그에 비해 당가 놈들은 영 끈기가 없는데요?”

“……그런가?”

엎어져 있던 당가인들이 그 짧은 대화를 듣고 몸을 움찔 떨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당군악이 어떤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을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우리 애들은 그 험한 산에서 데굴데굴 구르던 놈들이고, 당가 애들이야 물 좋은 사천 땅에서 편하게 살던 애들인데 비교할 수가 있겠어요?”

“……당가가 호의호식해서 독기가 없다는 말로 들리는군?”

“하하핫. 그 말 엄청 웃기네요. 당가가 독기가 없다니. 하하하핫.”

“…….”

“하하…….”

“…….”

“농담 아니셨어요?”

우득.

당군악이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 섬뜩한 소음에, 엎어져 있던 이들이 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저 미친놈이…….’

‘뭔 사람을 저렇게까지 긁어 대지?’

쓰러진 이들이야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지만, 청명이 그런 걸 신경 쓸 일은 이제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아,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청명이 깍지 낀 손으로 제 뒷머리를 받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생각해 보니 호의호식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당가보다 더 호의호식하고 자란 남궁세가 애들은 확실히 끈기가 있거든요.”

“…….”

“그럼 당가는 왜 그렇지? 도통 알 수가 없네. 터가 안 좋은가? 아니면 타고나기를……. 크흠.”

순간 당군악의 독사 같은 시선이 당패와 당잔에게로 꽂혔다. 그렇잖아도 눈치를 살피고 있던 둘은 재빨리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굳이 이유는 중요하지 않겠지. 결과만 바꾸면 될 일이니까.”

“뭐, 그렇긴 하죠. 근데 그게 쉽지 않은 일이니까.”

“쉽지 않아도 하면 될 일이지. 어떻게든.”

당패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번졌다.

오늘의 당군악은 어제와 달랐다. 물론 어제도 과격하게 그들을 몰아붙였지만, 오늘은 대체 무슨 작정을 한 것인지 말 그대로 입에 칼을 문 기세로 날뛰었다.

눈에서 살기를 뿜던 당군악을 떠올리기만 해도 바지춤이 젖을 판인데, 그런 사람을 왜 더 긁어 댄단 말인가! 대체 왜!

저 썩을 도사 새끼!

그 와중에 청명은 널브러진 이들을 슬쩍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행히 시간이야 충분할 거예요. 보아하니 아직 한참 더 맞아야 할 것 같으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군.”

당군악의 말에 청명이 피식 웃고는 널브러진 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일도 같은 수련 할 테니까. 준비 제대로 해서 나오도록.”

“…….”

“뭐 준비해 봐야 어차피 결과는 같을 것 같지만. 낄낄낄낄.”

청명이 몸을 돌려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쓰러진 이들을 일별한 각 문의 장로들과 맹소가 그 뒤를 뒤따랐다.

유일하게 청명을 따라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은 당군악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소가주.”

“…….”

“소가주.”

“예, 예! 가주님!”

당패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순간 서늘하게 가라앉은 당군악의 눈빛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패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최근 들어서는 잘 볼 수 없던 눈빛. 마치 청명을 만나기 전 당군악의 눈빛 같다.

“사람이란 누구나 최소한의 제 몫은 해야 한다.”

“죄, 죄송합…….”

“너희 중에 오늘 사천당가의 후예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을 보인 이가 있느냐?”

“…….”

“화산검협은 농으로 한 말이겠지만, 내게는 농으로만 들리지는 않는구나. 제 손으로 얻어 내지 않아도 뭐든 주어졌으니 마음이 급할 이유도 없고, 간절할 이유도 없겠지.”

당패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벌로…… 오늘 당가는 모두 금식이다.”

“……예.”

밥값을 못했으니 밥을 먹지 말란 말에 변명의 여지가 있을 리 없었다.

무감정해 보이는 눈빛으로 모두를 둘러본 당군악은 이내 연무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힘겹게 버티고 있던 당패가 엎어지듯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조걸이 비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끄으으으응. 아니…… 다들 날을 잡았나.”

목소리에 짜증과 피로가 잔뜩 묻어났다. 조걸은 제 옆에 시체처럼 엎어진 이를 슬쩍 보며 말했다.

“사형.”

그래도 반응이 없자, 이젠 발을 뻗어 윤종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사형, 살아 있수? 사형.”

쿡. 쿡.

“죽었어?”

“……안 죽었어, 이 새끼야.”

“에이, 뭐야. 난 또 뒈지신 줄.”

“……으으.”

윤종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저 방자한 조동아리를 사정없이 돌려 버렸겠지만, 지금은 조걸이 아니라 사패련이 날뛰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만큼 잔뜩 지쳤다. 무엇보다 청명이 놈에게 얻어맞은 정수리가 아파서 입도 열기 힘들 정도다.

대체 조걸 이놈은 같은 것을 겪고도 무슨 힘이 남아서 저리 조동아리를 놀려 대는 걸까? 저놈이 두 배는 더 얻어맞았는데.

“근데 이거 좀 심하지 않습니까?”

“뭐가?”

“아니…… 말이야 바른말이지. 청명이 놈이랑 문주님들에, 장로님들까지 편을 먹고 달려드는데 우리가 저걸 무슨 수로 상대합니까! 이게 무슨 수련이야. 수련을 빙자한 구타지.”

“뭘 새삼스럽게. 항상 당하던 거구만.”

“어? 듣고 보니…….”

조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와중에 윤종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은 안 했지만,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로 본다면 그들이 이기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겠지만, 거듭 강조했다시피 강호에서는 병력의 차이라는 게 큰 의미가 없다.

다 큰 어른은 여섯 살짜리 아이보다 기껏해야 열 배 정도의 힘을 더 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게 다 큰 어른이 어린아이보다 딱 열 배 더 강하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다 큰 어른이 여섯 살짜리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달려든다면 열이 아니라 백이라도 해치울 수 있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강호에서 절대고수와 그 아래에 있는 이들의 차이는 그 이상으로 크다.

그나마 청명이 놈과 시도 때도 없이 붙어 본 화산이야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지만 문제는…….

윤종이 널브러져 있는 이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엎어져 있는 이들이야 표정을 살필 수 없었지만, 하늘을 보고 드러누워 있는 이들의 얼굴은 볼 수 있었다.

윤종은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다 맛이 갔네.’

과거 시험장에서 완벽한 답안을 작성하고 장원을 확신하며 의기양양하게 나온 이가, 사실은 답안에 이름을 써 넣지 않아 실격되었다는 걸 그날 밤에 깨달으면 저런 얼굴이 되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그런 이들의 상태가 조금 더 나아 보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다들 혼이 빠진 얼굴이었다.

윤종은 저들의 기분을 십분 이해했다.

‘우리도 처음엔 저랬지.’

강호에 무인이야 차고 넘치지만, 어디에서나 절정고수로 인정을 받는 이는 의외로 찾아보기가 어렵다. 각 문파에 한둘만 있어도 그 문파는 명문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 강호인이라는 이름을 쓰면서도 평생 동안 절정고수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그나마 명문정파에 속한 이들은 각 문의 어른을 볼 기회가 있기에 사정이 어느 정도 낫기야 하겠다마는…… 제 실력을 조금 더 끌어 올리기에도 바쁜 절정고수가 파리 떼나 마찬가지인 가문의 아이들과 손을 섞어 줄 일이 흔할 리 없다. 기껏해야 재능 있는 아이 몇에게 놀이 삼아 몇 번 가르침을 줄 정도일 뿐이다.

‘그런 양반들이 눈을 까뒤집고 전력으로 달려드는 걸 봤으니.’

절정고수의 살기를 눈앞에서 정통으로 맞았는데 혼이 달아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끄으응.”

그때 마지막으로 쓰러졌던 백천이 비틀비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역시 사숙, 회복도 빠르시지.”

“맞는 데는 이골이 난 분이시잖아.”

“하기야. 저도 맞을 만큼 맞아 봤는데, 사숙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들으며 백천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망할…….”

그가 이를 뿌득뿌득 갈아붙였다.

“청명이 놈 하나로도 미치겠는데.”

혼자서 화산 하나를 쓸어 먹는 청명이를 상대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덩치 때문에 청명이보다 더 시선을 끄는 맹소가 야수처럼 날뛰고, 그 사이사이로 당군악의 암기가 날아든다.

겨우겨우 찾아낸 틈을 각 문파의 장로들이 채워 버리니 이건 뭐 답이 없었다.

물론 훈련을 받는 이들 역시 수가 늘어났지만…….

“방해돼.”

유이설의 나직한 말에 백천은 뼛속 깊게 공감하고 말았다.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아군이 생기는 게 방해가 되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다.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이 연무장에서는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청명을 상대하기 위해서 완벽하게 발전시켜 온 합격은 도대체가 써먹을 수가 없다. 그들이 움직일 방향에 다른 놈들이 끼어들고, 혼비백산한 타문의 분위기가 화산에 그대로 전염된다.

차라리 저놈들 없이 화산만으로 청명과 맹소, 당군악을 상대한다면 이것보다는 상황이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전쟁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복잡한 거였나?’

그저 더 강한 세력을 구축하기만 하면 이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이 연무장에서 그가 겪은 일은 그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뒤틀어 놓기에 충분했다.

‘이래서야 한곳에 전력이 과하게 집중되면 오히려 해가 되겠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힘을 모으면 서로 방해가 되고, 힘을 모으지 않으면 강대한 적을 상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래서야 각 문파가 따로 움직이고, 소수의 몇몇이 밀리는 곳을 지원하러 돌아다니는 수밖에 없잖습니까?”

윤종의 말에 백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리지 않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게 최선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바로 그때였다.

“이런 빌어먹을!”

야수궁도 하나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더니 퉁퉁 부은 얼굴로 역정을 냈다.

“왜 자꾸 앞에서 깔짝거리는 거냐! 궁주님은 너희 따위가 상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란 말이다! 진검도 궁주님 몸에는 안 박히는데 목검 들고 뭘 어쩌겠다고!”

그 말에 조걸이 눈을 치떴다.

“지금 설마 우리한테 한 소리냐?”

“그래! 너희 화산 새끼들! 그 깔짝대는 칼질로 뭘 어쩌겠다고 앞을 가로막고 있냐고! 너희 때문에 우리가 제대로 싸울 수가 없잖아!”

화산의 제자들이 입을 쩌억 벌렸다. 방해? 대체 누가 누굴 방해하는데 저리 말한단 말인가?

“아니…….”

하지만 굳이 그 말에 반박할 필요는 없었다. 그 말에 화를 내 줄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머리에도 근육만 찬 것들이 개소리를 지껄여 대는군. 너희가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 우리와 화산이 연합할 수 있게만 해 줬어도 상황이 배는 나았을 것이다.”

“뭐? 같은 칼 쓰는 놈들이라 이거냐?”

“그게 진실일 뿐이지. 너희 따위는 아무런 도움도 안 돼!”

빙궁이 즉각적으로 화산의 편을 들고 나선 것이다.

그때 듣고 있던 임소병이 코웃음을 쳤다.

“뭐 그러면 둘이서 상대해 보시든지.”

그러자 남궁도위가 이를 갈며 끼어들었다.

“아군을 힐난하지 마시오. 왜 분열의 여지를 만듭니까!”

“아이고. 그 잘나신 남궁세가 분들께서 이 더러운 사파 놈에게 말도 걸어 주시고. 이거 황공해서 원.”

“……뭐요?”

서로 노골적으로 비꼬고 책임을 전가한다. 감정의 골이 너무 깊어져서 이런 상황에서조차 서로에게 이를 갈아 대는 것이다.

백천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청명아.’

그의 시선이 청명이 멀어진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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