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7화. 그건 다 준비해 놨죠! (2)
구파일방과 같다니.
그 말은 도무지 참을 수 말이었다. 현종이 구파일방의 위선에 얼마나 많은 실망을 했던가?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가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 저 구파일방의 행태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서로의 감정을 숨기고 좋은 낯으로 대하기를 반복하다 쌓이고 쌓인 것이 끝내 곪아 터진 게 바로 지금의 구파일방이 아니던가?
청명이 현종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애초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제가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인데, 문파와 문파가 아무 문제 없이 화합할 수 있을 리가 없어요.”
“…….”
“문제야 당연히 있죠. 중요한 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다만…….”
그 해결 방식이라는 게 영 못 미덥다는 게 문제 아니겠는가?
“가식을 걷어내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서로에 대해 나쁜 감정만 남게 된다면 차라리 가식을 떠는 것만 못한 것 아니더냐?”
구파일방이라고 해서 가식을 떨고 싶어서 그러겠는가. 기본적으로 사회란 서로의 내밀한 마음을 훤히 드러내기 어려운 곳이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말은 듣기에는 좋지만, 실제로는 용이나 기린과 다를 바 없다. 말은 존재하지만 그 실체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과 경쟁을 하다 보면 결국은 시기심이 드는 게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어렵다고 해결하지 않고 덮어놓는 게 능사는 아니잖아요?”
“으음…….”
현종은 문득 이 상황이 참 기이하다고 느꼈다.
평소에는 그가 정론을 이야기하고, 청명이 궤변을 늘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청명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오히려 정론에 가깝다.
지키기 어렵고 실천하기 힘든 정론 말이다.
“나는 아무래도 우려가 되는구나.”
“장문인.”
청명이 진지한 눈으로 현종을 마주 보았다.
“만약 저들이 당가가 아니고, 녹림이 아니고, 남궁이 아니었다면 어떠셨을 것 같으세요?”
“음?”
청명의 입에서 단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산의 백자 배와 청자 배 사이에 골이 있다면, 과연 지금처럼 적당히 덮어놓고 친한 척 지내라 말씀하셨겠습니까?”
현종이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히…….’
만약 백자 배와 청자 배가 서로 악감정을 숨기고 서로 가식적으로 구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현종은 어떻게 해서든 그 상황을 해결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 어떻게든 말이다. 그건 화산 전체를 위해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니까.
“……내가 저들에게 벽을 치고 있다는 말이더냐?”
“벽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겠지요. 하지만…… 정말 한 문파처럼 생각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현종의 미간이 좁아진다. 정말 그러한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생각과는 달리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청명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뭐 그렇게 심각하실 건 없어요.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잖아요?”
“…….”
“저도 똑같았어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죠.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말이 없는 현종을 보며 청명은 쓰게 웃었다.
“친구니, 뭐니 떠들어 댔으면 우리부터 저들을 한 문파처럼 여겨야죠. 지금까지 우리가 한 모양새는 우리 애들은 빡세게 구르고 열심히 수련해야 하지만, 남의 집 자식은 귀하게 커야 한다고 어르고 달래는 것과 다를 게 없잖아요.”
“…….”
“그건 겉으로 보기에는 남의 자식을 우대해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내 자식만 예뻐하는 거죠. 이제부터는 그래선 안 되지 않을까요?”
현종이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가 아는 청명은 화산에 대한 애정이 광적인 사람이다. 때때로는 화산의 장문인인 그보다 청명이 화산을 몇 배나 더 끔찍이 여긴다고 느껴질 만큼 말이다.
그런 이가 화산과 타문 간에 차별을 두지 말자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청명아.”
“예, 장문인.”
“그게 옳은 것이더냐?”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네. 모든 문제라는 건 해결해 버리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거죠. 위험한 건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 문제가 생길까 봐 무작정 덮어놓는 거라고 봐요.”
현종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응?”
청명이 히죽 웃었다.
“저리 치고받고 싸우다 보면 예전처럼 하하호호 즐겁게 잘 지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전장에서 등 뒤에 선 이를 믿을 수는 있게 될 거예요.”
“…….”
“그거면 된 것 아닐까요?”
현종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네가 친우를 원한다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이제 보니 네가 원하는 건 친우가 아니라 전우(戰友)인 모양이구나.”
“아뇨. 제가 원하는 건 진짜 친구예요.”
“…….”
“겉으로만 친한 척하는 게 아니라, 서로 욕하고 헐뜯기도 하지만 위기에 처하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올 수 있는 사이요.”
그때까지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당군악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화산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해 주었지.”
“네, 맞아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죠. 하지만 제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천우맹에 속한 모두가 서로 그런 관계가 되길 바라는 거죠.”
“어려운 일이군.”
“네, 어렵죠.”
청명이 담담히 말했다.
“당연히 지속은 어려울 거예요. 하지만…… 애쓰고 노력한다면 한동안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사패련과 마교를 상대할 때까지는 말인가?”
청명은 그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씨익 웃어 보였을 뿐이다. 그 웃음을 본 당군악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망상에 가까운 일이지만…… 여하튼 나는 불만 없네.”
“네?”
“이 기회에 당가를 재정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니까.”
말을 마친 당군악이 음울한 얼굴로 ‘최후의 승자는 당가다, 망할 화산 놈들.’ 하고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현종이 청명에게 재빨리 눈치를 줬다. 저러고 있는 걸 보고도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느냐는 듯.
하지만 청명은 여전히 히죽히죽 웃어 대고 있었다. 현종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언제는 안 그랬겠냐마는…….’
청명이 아무런 생각 없이 일을 벌이지 않는다는 것은 현종도 익히 알고 있다. 그저 이번에는 화산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파까지 얽히다 보니 우려가 깊었을 뿐.
“청명아.”
“아아. 걱정 마세요, 장문인.”
“…….”
“문제는 없을 거예요.”
현종이 침중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청명을 마주 보았다.
‘여전하구나.’
현종은 사실 당가와 다른 문파들을 보호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혹시나 청명이 행한 일로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경우, 다른 누구도 아닌 청명에게 책임이 돌아갈까 걱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청명은 이미 현종의 그런 마음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래. 알겠구나. 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결국 그도 청명이 놈에게 힘을 실어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청명아.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또 뭐가 있나요?”
“지금 이 상황을 조장……. 아니, 방조하는 것이 더 낫다는 네 생각은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저들이 이 상황을 버텨 낼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 아니더냐?”
“그건 또 무슨…….”
그 순간 현상이 손에 든 장부를 촤라락 넘기며 입을 열었다.
“금일까지 남궁에서 부상자 열다섯 명, 경상자 스무 명. 녹림에서 부상자 스물여덟 명 경상자……는 파악도 안 됐군. 당가에서도 부상이 열 명이나 나왔다.”
“경상자는 굳이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당가는 그 정도는 자체적으로 치료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하시는구나.”
현상과 당군악의 말이 끝나자 현종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해했느냐?”
“…….”
“최근 들어 부상자의 발생 빈도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부상의 정도도 조금씩 심해지고 있어. 내가 보기에 이건 수련이 격해져서 벌어지는 문제라기보다는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것에 가까워 보이는구나.”
“어…….”
현종이 이번에는 빠져나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좋은 수련이라고 해도 몸이 버티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아니더냐? 네가 평소에는 이런 부분을 고려했었지만, 이 번에는 그 사실을 놓친 모양이로구나.”
“아니, 당가가 있는데…….”
청명이 슬쩍 당군악을 바라보자 당군악이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최선은 다하고 있지만 쉽지 않네.”
“진짜 최선을 다하고 계신 것 맞죠? 진짜로?”
“허허.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자네 눈에는 내가 그깟 작은 호승심 때문에 같은 밥을 먹는 이들을 차별하는 이로 보이는가?”
예전에는 안 그랬죠. 그런데 요즘은 좀 의심이 들기도 하고…….
“맹세코 아니네.”
“끄응.”
물론 당군악은 믿는다.
하지만 저 당군악의 몸속에 흐르는 당가의 피를 믿을 수가 없었다. 저 양반의 몸에도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다는 얼굴로 태연하게 야바위를 치던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쯧.”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청명은 미심쩍은 얼굴로 당군악을 흘기다 현종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 이쯤에서 적당히 봉합하는 게 낫겠구나. 기껏 서로 한마음이 되었는데 골병이 들어 제대로 싸우지 못하게 된다면 안 한 것만 못할 테니까.”
“아, 그건 걱정하실 것 없어요.”
“그래, 잘 생각……. 으응? 뭐라고?”
“걱정하실 것 없다고요.”
“……아, 아니. 청명아.”
“그러니까 지금 상황을 유지하면서도 애들이 버틸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시잖아요.”
“그…렇지?”
“에이. 장문인도. 제가 누굽니까! 그건 다 준비해 놨죠!”
“……응?”
이게 방법이 있는 일이라고?
“뭐, 뭘 어떻게 하려고?”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수련의 강도를 낮추는 것이지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이건 청명이 시키는 수련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산 애들은 어떤데요.”
“응? 화산?”
현종이 현상을 보며 대답을 요구했다. 그러자 현상이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화산은…… 경상자만 이십여 명이고 부상자는 없습니다.”
“아니, 왜?”
“……글쎄요. 쓸데없이 튼튼해서?”
청명이 낄낄대며 웃었다.
“화산의 정기를 받아서 애들이 튼튼할 리는 없죠. 그게 다 지속적인 체질 개선의 결과 아니겠습니까?”
“…….”
“못 버텨? 그럼 버티게 만들어 주면 되지. 어디 약하니까 빠져나가겠다는 변명을 해?”
“청명아. 대체 뭘 준비해 놨다는 것이냐?”
“아마 이제 곧 올 거예요.”
“뭐가?”
“뭐가……이기도 하고, 누가이기도 하죠. 곧 야수궁과 빙궁이 올 거예요. 은하상단을 통해서 전달해 뒀어요. 지난 삼 년 동안 모아 뒀던 것들 모조리 들고 오라고요.”
“…….”
“자소단 한 알씩 입에 쑤셔 넣어 주면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하게 될걸요? 겸사겸사 야수궁이랑 빙궁도 저기에 섞어 넣어야죠. 그 양반들도 그동안 멀리 있다는 핑계로 편히 살았는데, 그 꼴을 계속 볼 수는 없잖아요?”
“어…… 그…….”
청명아. 빙궁과 야수궁도 신경을 쓰겠다는 말을 참 괴이하게도 하는구나. 듣는 사람 오해하기 딱 좋게…….
“낄낄낄낄낄!”
청명이 배를 잡고 웃어젖혔다.
“그동안 우리만 죽어라 피 봤는데, 언제까지 그 꼴을 볼 수는 없지. 이제 죽어도 다 같이 죽는 거야! 나중에 받아먹은 것 없어서 우리는 뒤로 빠진다는 소리는 죽어도 못 하게 해 주지! 으헤헤헤헤!”
아……. 오해가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그래. 그래…….